로베르트 코흐는 1843년 12월 11일 체코와 인접해 있는 하르츠산 기슭의 클라우시탈이라는 탄광촌에서 광산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 신문을 가지고 혼자서 글을 깨우쳐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지만, 초·중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차분하고 끈기 있고 착실한 소년이었을 뿐 별다른 에피소드는 없었다. 다만 뒷날을 예감케 하는 것으로 생물학에 취미가 있었던 점과 내륙 지방에 살면서도 바다에 관심을 나타냈던 것은 특이했다.
결혼 약속 받기 위해 개업
코흐는 19세 나던 1862년 괴팅겐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 4년의 학업을 마친 뒤 1866년에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 코흐는 당대의 대표적인 해부학자이자 병리학자로 괴팅겐의 교수 로 있던 헨레(1809∼1885)가 쓴 책과 논문들을 탐독했다. 헨레는 이미 1840년에 '장기성(氣 性, 나쁜 공기에 의한) 및 접촉성 질병' 이라는 논문에서 '코흐의 공리'의 선구가 되는 이론 을 제창했는데, 헨레와 코흐의 만남은 그들뿐만 아니라 의학의 발전에도 큰 축복이었다.
의과대학 졸업 후 코흐는 베를린으로 가 세포병리학의 창시자로 '의학의 교황' 이라는 칭송 을 받게 된 비르효(1821∼1902)에게서 6개월 동안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는 잠시 함부르크 종합병원의 정신과에 근무했지만 정신과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때 코흐는 여가가 생기면 함부르크 항구의 방파제를 산책하면서 미국과 인도 등지에서 온 큰배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렸을때부터의 소원이던 항해사와 탐험가가 돼 세계 각처를 돌아 다니는 꿈을 꾸면서. 이 꿈은 뒷날 의학의 항해사와 세균 탐험가로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는 것으로 실현됐다.
코흐는 학창 시절부터 에미 프라츠라는 고향의 아름다운 소녀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다. 함부르크 종합병원에 근무하던 시절에 코흐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구혼했다. 구혼을 받은 에미는 "당신이 모험이나 탐험의 꿈을 접고, 평화롭게 선량한 개업의사가 돼 여유 있고 즐거운 미래를 약속한다면 결혼하겠다" 라고 대답했다. 코흐가 그녀의 조건을 수락해 둘은 1866년 말에 결혼했다. 신혼의 코흐는 란겐하겐, 니메그, 라크비츠 등지의 종합병원과 보건소에서 일한 다음, 볼쉬타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비로소 자신의 병원 간판을 걸고 개업의로 정착하게 됐다. 의과대학을 졸업한지 3년만이었다.
첫사랑과의 이별
1870년 보불전쟁이 벌어져 프로이센 군대의 군의관으로 철정한 몇 달을 제외하고, 코흐는 그곳에서 감기환자를 치료하기도 하고 배탈환자에게 투약을 하기도 하면서 제법 바쁘고 겉보기에 보람 있는 생활을 보냈다. 그러면서 수입도 꽤 올렸기에 에미는 코흐와의 결혼생활에 만족했다. 그러나 코흐는 결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분주한 하루의 진료가 끝나면, 피곤한 몸을 침대에 내던지고는 천장을 멍하게 쳐다보면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날이 계속됐다. 그런 모습을 보고 에미는 남편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코희의 서른번째 생일에 새로 나온 자이츠 회사의 귀한 현미경 한 대를 선물했다. 이 현미경이 뒷날 코흐에게는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발휘해 인류에게 헌신하는 도구가 된 반면, 이것을 선물한 에미에게는 이혼이라는 눈물의 씨앗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코흐는 그녀가 선물한 현미경을 이용해 탄저병 연구를 했고 실험결과를 정리해 1876년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 논문은 전염병이 세균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완전무결하게 증명한것으로서 그때까지 논쟁의 대상이던 세균병인설을 확고한 거승로 만들었다. 코흐는 탄저병에 걸린 동물로부터 병원균을 분리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한종류의 병원균만을 순수하게 배양하는 방법을 더욱 면밀히 다듬을 수 있었다. 이 때부터 코흐는 유명세를 톡톡히 치뤄야했다.
탄저병 연구로 명성을 얻은 코흐는 이제 일반환자를 진료할 짬이 없었다. 대신 연구를 계속했고, 나라 안팎에서 많은 학자들이 그 시골로 그를 찾아 왔다. 부인 에미의 꿈을 충족시키던 개업의로서의 평화스런 생활은 영영 돌아올수 없게 됐다. 에미는 절망한 나머지 하나뿐인 딸과 함께 코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시련속에 얻은 젊은 애인
코흐는 1885년에 베를린 대학 위생학 교수로 임명된 뒤 주로 결핵의 치료법 발견에 몰두했다. 5년 뒤인 1890년 결핵균의 배양액으로부터 튜베르큘린을 처음으로 제조했다. 코흐가 튜베르클린을 결핵의 특효약으로 발표하자 많은 학자들이 큰 기대를 가지고 임상실험을 했지만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튜베르큘린은 오늘날에는 결핵 감염의 유무를 검사하는 데에 쓰이고 있다. 코흐의 낙담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세균학자로 입신한지 15년만에 맞는쓰라린 시련이었다.
겉모습은 예전과 마찬가지였고 세인들의 찬사도 여전했지만, 코흐는 연구자로서 한계를 느끼며 실의에 빠졌다. 이때 코흐를 위로하고 그에게 삶의 용기를 새로이 불어넣어 준 사람은 18세의 애송이 여배우 헤드리히 프라이베르그였다. 코흐는 1893년 50세가 되던 해에 그 여자와 재혼했다. 튜베르큘린의 실패와 나이가 너무 차이 나는 여배우와의 결혼으로 코흐는 학계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내렸지만, 코흐는 실로 오랜만에 개인적인 행복과 안온함을 누릴수 있었다.
어리지만 이해심 많고 사려 깊은 아내와의 동지적 연대 속에서 자신감을 되찾은 코흐는 1896년 영국 정부의 의뢰로 남아프리카에 가서 그곳에서 유행하고 있는 우역(牛疫)에 대한 치료법을 연구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1897년에는 인도에서, 그리고 1903년과 1904년에는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 수면병, 흑수열, 아프리카 재귀열, 페스트 등에 대해 세균학과 역학 연구를 했다. 인생의 반려자 없이 지낸 세균학자로서의 처음 반생(半生)보다는 못하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아름다운 헤드비히가 곁에서 큰 힘이 되었던 나중 반생도 적지 않은 업적을 남긴 시기였다.
62세의 생일 선물 노벨상
코흐의 생애에 걸친 수많은 업적에 대해 세계 여러 나라는 많은 상과 메달 등으로 보답했다. 코흐는 하이델베르그 대학교와 볼로냐 대학교로부터는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베를린, 볼쉬타인 그리고 고향 클라우시탈로부터는 명예시민권을 받았으며 베를린, 빈, 포센, 나폴리, 뉴옥 등의 학회 및 학사원의 명예회원이 됐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뒤에는 여러 나라에서 기념비를 세우는 등 그를 기리는 행사가 잇따랐다.
코흐의 업적 가운데에서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1882년에 결핵균을 발견하고 그것이 결핵이라는 질병의 원인라는 사실을 증명한 일이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결핵에 대해 연구했지만 결핵균의 발견에서부터 그 균이 실제로 결핵을 일으킨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명료하게 밝힘으로써 결핵의 정체를 드러내고, 또 그럼으로써 결핵의 치료와 예방에 관한 올바른 길을 제시한 것은 바로 코흐였다.
1905년 코흐의 노벨상 수상 강연은 '결핵에 대한 투쟁의 현황' 이라는 제목으로 62회 생일 바로 다음날인 1905년 12월 12일에 행해졌다. 강연회의 좌장을 맡은 스웨덴 왕립 카롤린스카 의과대학 학장 뮤넬은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림 카롤린스카 의과대학은 귀하의 결핵에 관한 연구와 결핵균의 발견에 대해 금년도 노벨 생리의학상을 귀하에게 수여토록 결정한 노벨상 선정위원회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 혼자의 힘으로 귀하가 행한 것처럼 그렇게도 많고 중요하고 또한 선구적인 발견을 한 예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귀하는 그 선구적인 연구로 결핵의 세균학을 해명하고 나아가 의학의 역사에 그 명성을 길이 남기게 되었습니다."
코흐는 바덴바덴의 자택에서 젊은 아내 헤드비히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1910년 5월 27일 협심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였다. 코흐가 사망한 2년 뒤인 1912년, 그가 결핵균 발견을 발표한 3월 24일에 '베를린 전염병연구소'는 그를 영구히 기리기 위해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로 개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