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봄학기 중간고사 기간. 해가 중천에 떴다. 벚꽃이 휘날리는 창 밖 거리는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학생들의 소란으로 분주하지만, 나는 아직도 기숙사 침대에 누워있다. 밥맛도 없고, 친구들도 보고 싶지 않다. 그래도 시험 공부를 해야할 것 같아 씻지도 않고 도서관에 갔더니, 오랜만에 마주친 친구가 날 보고 놀라 소리친다.
“너 꼴이 이게 뭐니?! 혹시 우울증 아냐?”
10년도 더 전인 대학교 3학년 시절 기자가 겪었던 일입니다. 그때는 왠지 피곤하다고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시험 공부는 항상 하기 싫잖아요),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제가 겪었던 일들이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란 걸 알게 됐지요. 하지만 그때는 내가 우울증이 맞긴 한지, 우울증이 치료할 수 있는 병인지, 우울증을 치료하려면 정신과에 가야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저 말고도 정신과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이번에는 그런 분들을 위한 게임을 찾았습니다.
‘헬프 미!(Help Me!)’는 직접 정신과 병원의 원장이 돼, 동물 환자들을 진료하는 게임입니다. 2021년 하반기, 한국의 게임 개발사인 유닉온과 의사 유튜버 ‘닥터프렌즈’가 힘을 합쳐 만들었습니다. 상담을 통해 병원에 찾아온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상태를 파악해, 그에 맞는 약을 처방하는 식으로 진행되죠. 이제 환자를 만나러 ‘헬프 미!’의 세계로 가봅시다.
어이어이, 정신과 진료는 만만치 않다고!
첫 손님은 CEO 사자 ‘라이건’입니다. 풍채도 좋고 멋진 옷도 차려입었는데요, 자리에 앉자 제게 나지막히 고민을 토로합니다.
“의사 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사자가 아니라 물고기 같습니다….”
이, 이게 무슨 말이여? 어이가 없었던 저는 ‘거울을 보여준다’는 선택지를 골랐습니다. 저, 선생님. 거울 좀 보세요. 선생님은 누가 봐도 멋진 갈기를 가진 당당한 사자시라고요!
그랬더니 라이건은 “선생님도 제 말을 믿지 않으시는군요…”라 읊조리더니 쓸쓸한 표정으로 병원 밖을 나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렇게 바로 게임 오버~.
이런,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봅니다. 아무리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라도 다 맞다고 수긍해줘야 하는 걸까요? 이번에는 라이건의 말에 맞장구 쳐주기로 결심하고 다시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돌아온 선택지 화면. 이번에는 물고기가 맞으니 바다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행복해하는 표정의 라이건, 병원 밖으로 나섰다 바다로 뛰어들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번에도 게임 오버~.
솔직히 제가 게임을 그렇게 못하는 편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시작하자마자 5분 만에 무려 5번이나 게임 오버를 당했어요. 아무래도 정신과 의사가 하는 일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나봅니다. 그래서 게임을 만드는 데 참여한 유튜브 채널 ‘닥터프렌즈’의 오진승 디에프정신건강의학과 청담클리닉 원장님께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정신과 진료의 핵심 중 하나는 ‘망상에 섣불리 동조하거나 부정하지 말라’입니다. 망상에 동조하면 환자의 망상이 강화되고, 망상을 부정하면 마음의 문을 닫기 때문이죠.”
라이건이 보여준 증상은 ‘망상’인데, 본인이 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물고기라는 실제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망상은 조현병이나 우울증과 같은 다양한 정신 질환에서 생길 수 있습니다. 오 원장은 “망상 자체는 사실이 아닐지 모르지만, 망상을 경험하는 환자의 감정은 진짜”라 말했습니다. 그래서 망상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환자의 감정에 집중하며 신뢰를 쌓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저도 라이건에게 섣불리 거울을 보여주거나 바다로 돌아가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 했습니다. 그래야 라이건이 어떻게, 왜 자신이 물고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알게 돼,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몰랐던 정신과를 보여주는 게임, ‘헬프 미!’
정말 자신을 물고기라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오 원장은 “실제로 있었던 사례는 아니지만, 실제 사례를 각색해 질환의 특징이 잘 드러나도록 게임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망상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등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며 쫓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례가 있다고 했지요.
‘헬프 미!’에는 라이건 말고도 다양한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우울증, 공황장애, 알코올성 기억상실증 등 각각 다른 정신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질환들이죠. 게이머는 다양한 치료법을 통해 환자들의 증상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오 원장은 “병원에서 쓰이는 치료법을 게임에서 소개했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게임에서 소개되는 EMDR은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의 준말로,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을 잊는 치료법입니다. 전쟁이나 성폭행 등으로 몸과 마음에 큰 상처가 남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환자들에게 오래전부터 실시되어 온 치료라고 하네요. 정신과에서 상담이나 약물 치료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정신질환에 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정신과를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가는 곳’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통계청의 2021년 자료 기준, 한국의 자살률은 10만 명 당 26명이었습니다. OECD 회원국 중에서는 평균보다 약 두 배 높은 최고치를 기록했지요. 그만큼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겠죠.
게임을 진행하고 라이건의 말을 들어주면서, 기자는 지금까지 정신과에 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됐습니다. 기숙사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던 10년 전의 제가 이 게임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랬다면 자신의 상태를 조금 더 빨리 의심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친구들이나 정신과 전문의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마음이 지치고 힘든 분이 계시다면, ‘헬프 미!’가 자그마한 위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신과의 선입견을 게임으로 바로잡고 싶었어요.” _ 오진승 원장
‘헬프 미!’를 플레이하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 게임이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게임 뒤에는 정신건강의학과에 관한 편견을 없애고 싶은 의사의 마음이 녹아있었는데요, ‘헬프 미!’ 개발에 직접 참여했으며 유튜버로도 유명한 오진승 디에프정신건강의학과 청담클리닉 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 반갑습니다! 게임보다도 유튜브 하는 의사로 유명하다면서요?
그렇습니다(웃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오진승입니다. 내과 전문의 우창윤 선생님, 이비인후과 전문의 이낙준 선생님과 ‘닥터프렌즈’라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2018년부터 운영하고 있습니다. ‘의사’ ‘병원’ 하면 딱딱하고 무섭게 느끼시는 분이 많은데, 영화나 게임, 드라마 등의 미디어를 통해 의학 콘텐츠를 즐겁게 누릴 수 있도록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어요.
Q. 유튜브에서 게임 소개 영상을 보고 이 게임을 꼭 다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게임을 만든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예전에 닥터프렌즈 유튜브 채널에서 ‘후 앰 아이 : 도로시 이야기(Who Am I : The Tale of Dorothy)’라는 게임을 소개한 적이 있어요. 다중인격(해리성 주체성 장애) 환자가 나오는 게임인데, 댓글이 2000개 넘게 달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죠. 이때 게임이라는 매체의 힘을 느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쉽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게임을 통해 정신과를 소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정신과란 장소를 소개하고, 진료 과정은 물론 어떤 치료법을 처방하는지도 보여드릴 수 있겠다고요.
성인이지만 부모 눈치가 보여 병원에 몰래 찾아왔다는 환자도 있어요. 아직 정신의학과에 관한 선입견이 많이 남아있거든요.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으면 치매가 온다든가, 기억력이 떨어진다든가 하는 잘못된 정보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Q. 게임이 발매된 지 1년이 넘었지요? 어떤 반응이 있었나요?
정신과 환자들이 반가워했어요. 권유 받은 치료법이 게임에 나와서 생각을 바꿨다거나, 치료가 무섭지 않아져 병원을 열심히 다니게 됐다는 반응이요. 한두 분이라도 치료를 받는 데 도움이 되었다니 뿌듯했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반응은 한 유튜브 댓글이었어요. 언니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헬프 미!’를 하면서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다보니, 언니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셨지요.
Q.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에 가길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서 정신과를 찾아가면 좋을까요?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 스트레스는 견디면서 사는데, 내가 겪는 게 힘든 게 맞을까?’라고 고민하다가 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는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나와 나를 비교했으면 좋겠어요.
감기에 걸리면 주변 사람들과 증상을 비교해서 보고 병원에 가는 게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 증상이 심하면 병원에 가서 약을 타오잖아요? 정신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 사람이 아닌 예전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했을 때, 확실히 요즘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느낀다면 정신과에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병은 빨리 치료할수록 빨리 낫거든요.
Q. 정신과 의사에 관심을 가지는 과학동아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저도 학생 때 2년 동안 과학동아를 구독했던 적이 있어요(웃음). 정신건강에 관한 편견이 많이 사라지면서, 정신과 의사가 꿈이 됐다는 학생도 많아졌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가 다루는 영역 ‘정신’에 대한 비밀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통해 환자의 마음을 다루는 건 물론, 뇌과학도 잘 알아야 하지요.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큰 유망한 학문이라 생각하니,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