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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필름 끊기는 이유

알코올이 주범, 감기약·환경오염·강박관념도 한몫

술을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술을 마시지 않아도 필름이 끊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환경오염 때문에 건망증이 심해진다는 진단도 나왔다. 우리의 기억을 상실시키는 여러 가지 이유를 알아보자.

30대 직장인 K씨는 건망증 때문에 남모를 고민에 빠졌다. 회사에서 옆부서에 갔다가 "내가 뭘 하려고 여기 왔지?" 하고 멍하니 서있거나 상사로부터 금방 지시받은 일을 잊어버려 낭패를 보는 일이 자주 생겼다. 어떤 때는 집 전화번호나 주소가 떠오르지 않았고, 읽기 쉬운 잡지 기사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 몇번은 전날 밤 무리하게 마신 술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도 건망증이 반복됐다. '늙어서'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억울한 나이다. 도대체 머리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어느 사건이 일어난 시점 이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진행성(anterograde) 증상이 나타날 때 흔히 '필름이 끊겼다'고 말한다. 이를 의학 용어로 '일시적 기억상실'(blackout)이라고 부른다. 이때 다른 정신 기능은 유지되기 때문에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 그래서 주변 동료들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필름이 끊기는 대표적인 원인은 알코올이다. 그러나 환경오염과 심리적 강박관념도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증상은 한창 '머리 쓸' 나이인 청소년에게도 나타난다.
 

자가공명장치로 뇌를 촬영하면 이상 부위가 금방 드러난다.


알코올에 오므라든 뇌

K씨는 휴가를 하루 내서 병원을 찾았다. 처음 간 곳은 알코올 증상을 다루는 정신과.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주 과음한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의사가 평소 술 마시다 '필름 끊긴' 경우가 있었냐고 묻자, K씨는 전에 비해 요즘 자주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의사는 술을 마시다 필름이 끊긴 횟수가 며칠 간격으로 3-4회 발생했다면, 이미 뇌가 어느 정도 손상돼 평소에도 5-10분 내에 있었던 일을 깜빡 잊어버리는 '단기기억상실' 증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알코올이 뇌에 어떤 영향을 미쳤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뇌에서 기억 기능을 담당하는 주요 장소는 대뇌피질 측두엽에 위치한 해마(hippo-campus) 부위다(그림 1). 오동열과장(국립정신병원 정신위생과)은 "몸에 흡수된 알코올이 해마를 일시적으로 마비시켜 단기적인 기억상실을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알코올 중독자의 뇌를 자기공명장치(MRI)로 촬영해 정상인의 뇌와 비교하면 이 사실이 보다 명확해진다. (그림 2)에서 보듯이 알코올 중독자의 뇌는 측두엽 부위를 비롯해 전반적으로 크게 오므라들어 있다. 이런 상태에서 기억 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이때 생리적으로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뇌는 수많은 신경세포로 구성되며, 신경세포 간 정보 교류는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이루어진다. 알코올은 바로 이 물질의 정상적인 작용을 방해한다.

오동열과장은 "알코올 중독자의 해마 부위에서 학습이나 기억에 관계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과 글루타민산의 농도가 떨어진다" 고 말한다. 또 서유헌교수(서울대 의대 약리학교실)는 "글루타민산이 다른 신경의 세포막에 접합하려고 할 때 알코올이 이를 방해할 수 있다" 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과음한 경험이 많을수록 건망증이 심해진다. 이때 걸리는 건망증은 급성(Wernicke 병)과 만성(Korsakoff 병)으로 구분되는데, 두가지 모두 어떤 시점 이후의 일뿐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자신의 병실에서 매점까지 가는 길을 기억하는데 몇주가 걸리기도 한다.

이 건망증이 발생하는 이유는 필수비타민인 티아민(thiamine)이 결핍됐기 때문이다. 티아민은 뇌세포의 각종 대사 과정에 관여하며, 몸에서 직접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음식을 통해 체내에 섭취돼야 한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는 보통 며칠 동안 음식을 안먹고 술로 세월을 보내기 일쑤다. 또한 알코올은 소화기관에서 비타민이 흡수되는 과정을 방해한다. 그 결과 티아민이 부족해져 뇌의 기억 기능이 심하게 손상되는 것이다.

의사는 K씨에게 또다른 원인을 찾았다. K씨는 평소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약을 먹는 습관이 있었다. 재채기가 나면 당장 감기약을 사먹었고, 술먹고 난 뒤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 술깨는 약, 간장약을 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오동열과장은 "어떤 약물에는 몇초간 멍하니 '살짝 뜨는'(high) 기분을 느끼게 하는 성분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를 장기간 복용하면 알코올로 인한 기억상실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콧물을 마르게 하는 항히스타민제. 감기약을 먹었을 때 머리가 잠시 몽롱해지는 것은 이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뇌의 구조


입시증후군은 신경성이 아니다?

문제는 일부 청소년들이 '살짝 뜨는' 기분을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 감기약을 대량으로 사먹는다는 사실이다.

본드나 부탄가스 등 각종 환각제도 마찬가지다. 오동열과장은 "현재 밝혀진 바로는 이런 약물들이 뇌에서 상벌(賞罰)을 인식하는 부위(nucleus accumbens)에 손상을 주기 때문에 수치심이 없어진다"고 말하면서, "만일 약물을 장기간 복용하면 해마 부위를 비롯한 뇌 전체에도 영향을 미칠 것" 이라고 예상했다.

약물의 위험성에 대해 서유헌교수는 보다 심각하게 경고한다. 뇌에는 혈관을 통해 침투된 약물이나 이물질이 쉽게 신경세포에 전달되지 못하게 막는 세포 장벽이 있는데, 이를 혈관뇌장벽이라고 한다. 서유헌교수는 "하지만 본드나 부탄가스는 다른 물질을 녹이는 성질이 있어 혈관뇌장벽을 쉽게 통과, 뇌를 망가뜨릴 위험이 있다" 고 말한다. 단순히 머리가 나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이다.

K씨는 건망증을 없애기 위해 몇가지 목표를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술을 마셔도 필름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 자제해서 마셨고, 웬만해서는 약을 먹지 않고 버텨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도 건망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쉬어도 피로감이 없어지지 않았고, 특별히 무리한 일도 없는데 관절이나 근육이 아파왔다.

답답해진 K씨는 병원에서 종합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이상이 없다' 는 것이었다. 의사에게 자신의 증세를 호소하자 의사는 '신경성' 이라는 애매한 진단을 내렸다.

박태홍원장(만성피로증후군센터)은 "일상 생활에 큰 지장을 줄 정도로 기억력이나 집중력이 갑자기 떨어지면 두뇌의 모세혈관에 염증이 생기지 않았나 의심해봐야 한다" 고 지적하면서, "이는 또하나의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라 불리는 만성피로증후군(CFS, Chronic Fatigue Syndrome)의 한 증상" 이라고 말한다.

이 증후군은 에이즈와 상당히 유사한 증세를 보인다. 만성피로가 오래 진행될수록 몸의 면역 기능이 점점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이즈바이러스를 발견한 레비 박사를 비롯해 많은 에이즈 연구자들이 만성피로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과학자는 만성피로가 에이즈로 가는 한 단계라고까지 생각한다.

만성피로의 원인은 환경오염이다. 심하게 오염된 공기나 물을 비롯해 각종 독성 물질에 몸이 노출되면 면역 기능이 활성화된다. 하지만 오염물질에 노출되는 기간이 길어지면 체내 면역 기능은 이를 감당하지 못해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이미 심각한 만성피로 환자가 된 상태다.

박태홍원장은 "평소에는 면역세포(T 임파구)의 20% 정도가 활성화돼 있는 것이 정상인데, 오염물질이 몸에 침투해 항상 80-90%까지 활성화된다"고 설명한다. 특별한 병원균이 몸에 침입한 것도 아닌데 면역 기능이 최대로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염증을 만드는 물질인 싸이토카인(cytokine)이 면역세포에서 대량으로 분비된다. 그 결과 온몸의 모세혈관에서 염증이 발생하는 것이다.

두뇌가 이 상황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박태홍원장은 "기억력 상실 환자의 뇌를 자기공명장치나 스펙스캔 등을 이용해 촬영하면 해마 부위를 비롯한 곳곳에서 염증이 발견된다"고 설명한다.

원인이 환경오염이다 보니 공격을 받는 대상은 무차별적이다. 그래서 3-40대 주부나 직장인에게 나타나는 건망증은 물론 수험생에게 나타나는 '입시증후군'의 원인도 해석이 가능하다. 항상 머리가 아프고 교실에서 선생님 강의가 전혀 이해되지 않거나 금방 들었던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이 단지 '신경성' 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가공명장치 영상으로 본 뇌^알콜올 환자(우)의 경우 정상인(좌)에 비해 뇌 표면의 뇌척수액(빨간색)의 크기가 증가한 반면, 해마가 있는 측두엽 부위(푸른색)와 간뇌(노란색)가 크게 줄어들었다.


일부러 기억 잃기도

만성피로에 대한 연구는 현재 미국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걸프전에 참전했던 미군의 25%가 기억력이 심하게 상실되고, 요통, 두통, 우울증 등 만성피로증세를 보였다. 중동전에서 다량의 살충제와 유기용매가 사용된 것도 중요한 연구 소재가 되고 있다. 현재 미국 뉴저지대 만성피로센터는 국방부 지원으로 만성피로의 정확한 원인을 연구하고 있다.

알코올이나 환경오염과 달리 고도의 정신능력을 이용해 '의식적으로' 기억이 상실되기도 한다. 이민수교수(고려대 의대 정신과)는 "때때로 사람은 현실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어떤 사건을 잊기 위해 스스로 두뇌를 강하게 억압한다" 고 설명하면서 "이런 현상은 세상에 대한 반발감이 강한 청소년기에 보다 심하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혼한 30대 후반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얼마 전 불교에 귀의해 스님이 됐다.

남편은 아내가 보는 앞에서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말했고, 누가 사실을 얘기하면 남편은 스님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심리적 갈등이 심해 현실을 부정하는 경우다.

이런 현상은 청소년기에 강하게 나타난다. 입시제도나 기성세대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경우 엉뚱한 상상에 쉽게 빠지거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이 자신은 고등학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증상도 두뇌의 해마 부위에 손상이 와서 발생한 것일까. 이민수교수는 "이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도의 정신 기능을 담당하는 대뇌피질, 특히 전두엽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 이라고 설명한다. 구체적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제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증세는 더 이상 노인에게만 국한될 수 없는 것 같다. 굳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우리의 '필름을 끊는' 위험 요소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상실증은 현대 문명이 낳은 또하나의 치유될 수 없는 병일지도 모른다.

신경전달물질

신경세포들 사이에는 5만분의 1mm 정도의 작은 틈이 있다. 이 틈에서 신경전달물질이 오가며 정보를 전달한다. 신경이 자극되면 세포내에서 작은 주머니에 저장된 신경전달물질이 신경말단에서 분리되고 이것이 다음 세포의 수용체와 결합, 신호를 전달한다. 신경전달물질은 현재 40여종이 발견됐다.

혈관뇌장벽

혈관과 신경세포 사이에 있는 2중 장벽. 간격 없이 치밀하게 붙어 있는 혈관내피세포가 바깥 장벽을, 신경교세포가 견고하게 안쪽 장벽을 이룬다. 그래서 체내에서 혈관으로 전달되는 물질이 신경까지 쉽게 통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혈관뇌장벽에도 틈새가 있다. 첫째 이 장벽은 뇌 전체로 볼 때 약 90% 부위에만 존재한다. 즉 뇌하수체와 시상하부의 내융기부위나 뇌척수액이 통과하는 부위에는 이 장벽이 없다. 그래서 주변 혈관을 통과하던 약물이나 이물질은 이 부위에 쉽게 침입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둘째 이 장벽을 쉽게 통과하는 물질이 있다. 우선 알코올은 지용성(脂溶性) 물질에 녹은 상태로 장벽을 쉽게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지용성 물질은 장벽을 구성하는 세포막을 잘 통과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본드나 부탄 가스는 다른 물질을 녹이는 유기용매이므로 아예 뇌를 망가뜨려 중추신경을 파괴한다. 그래서 단 1회의 흡입으로도 뇌가 망가지거나 생명을 잃을 수 있다.
 

1996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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