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들 사료 먹고 떼죽음
1960년 영국에서 사료를 '잘못 먹은' 칠면조 10여만마리가 집단 떼죽음을 당했다. 사료에는 브라질에서 생산된 땅콩이 섞여 있었다. 수입사료를 먹은 지 1주일만에 벌어진 '칠면조 X 질병' 사건의 시작이었다.
즉시 원인규명에 나선 과학자들은 칠면조에 간암이 발생했음을 발견했다. 동시에 땅콩사료가 아스퍼질러스(Aspergillus)라는 곰팡이에 심하게 오염돼 있음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곰팡이가 병을 일으킨 것이 자명하다. 흥미로운 점은 병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은 곰팡이 자체가 아니라 곰팡이가 분비한 독소라는 점이다.
극소량으로 치명타 입혀
곰팡이가 핀 농산물을 사료로 사용할 경우 동물은 본능적으로 사료를 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곰팡이가 생성하는 독소(mycotoxin) 때문이다. 실제로 독소를 정제해서 사료에 섞어 동물에게 주면 동물이 사료 섭취를 꺼리는 현상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곰팡이 중에서 치명적인 독소를 만들어내는 종류는 극히 드물다. 현대 과학은 곰팡이가 왜 이런 독소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단지 곰팡이가 어떤 경로를 통해 독소를 만드는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연구는 1960년 영국의 '칠면조 X 질병'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곰팡이 독소는 사람에게 2중으로 악영향을 미친다. 먼저 작물이 자라는 동안이나 수확된 이후에 질병을 일으켜 품질을 떨어뜨리거나 수확량을 감소시킴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다.
동시에 곰팡이 독소는 식물에 축적돼 먹이사슬을 통해 육류와 어류에 전달되고, 결국 사람에게 급·만성 질병을 일으킨다. 특히 곰팡이 자체는 작물 수확 후 여러 가지 처리 과정에서 소멸되는 경우가 많지만, 독소는 화학적으로 안정하기 때문에 가공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칠면조의 간에 암을 발생시킨 원인은 아스퍼질러스가 만든 독소 아플라톡신(aflatoxin)이었다. 현재까지 천연물 가운데 가장 적은 양으로 간암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독소다. 만일 아플라톡신에 감염된 사료를 젖소가 먹을 경우 아플라톡신 성분은 우유를 통해 사람에게 전달된다.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는 아플라톡신의 식품 허용농도를 1g당 10ppb(1ppb=10-9)g 이하로 규제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아플라톡신은 주로 열대나 아열대 지방과 같이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 콩, 면실, 견과류와 같은 농산물에서 흔히 검출된다. 따라서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지방에서는 오염 정도가 적은 편이다. 1960년대 후반 일부 학자들이 전통 발효 식품인 메주에서 오염 가능성을 지적해 화제를 모은 적이 있지만, 과학적으로 정확한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국이 곰팡이 독소로부터 안전한 지대는 아니다. 우선 1980년대 초부터 곡물의 수입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앞으로 더욱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수입된' 아플라톡신의 위험으로부터 점차 피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더욱이 국내 농산물에 존재하는 독성 곰팡이들의 잠재력이 만만치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후모니신이다.
후모니신은 후사리움(Fusarium) 곰팡이가 만들어내는 곰팡이 독소다. 후모니신의 특징은 동물마다 다양한 증세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이 독소에 오염된 옥수수를 말이나 당나귀가 먹으면 대뇌 백질이 녹아버리는 현상(백질 연화증, LEM)이 발생한다.
중독된 말은 심한 흥분 증상을 보이며 날뛴다. 한편 돼지는 폐렴을 일으킨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남아프리카 남서지역과 중국 하남성 일부 지역에서는 식도암이 많이 발생하는데, 이곳의 옥수수에서 후모니신 오염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높다는 점이 밝혀졌다.
급성 아니라고 안심 못해
후사리움 곰팡이의 일부는 트리코세신이라는 독소를 분비해 설사, 구토, 소화기관의 출혈, 피부독성을 일으킨다. 한국의 경우 1963년 남부지방에서 밀과 보리의 수확량을 40-80% 감소시켰으며, 이 독소에 감염된 식품과 사료로 인해 사람과 가축이 심한 중독 증세를 보였다.
현재에도 국내 곡물에서 트리코세신은 흔하게 검출된다. 사람이 배탈이 나서 설사를 일으키고 동물이 사료를 기피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단지 급성으로 질병을 일으킬 정도의 농도에 이르지 않았을 뿐이다. 심각한 문제 발생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1963년 트리코세신 중독 증세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발생했다. 하지만 그 원인 규명에 대한 연구 규모는 대조적이었다. 현재 일본에서 이 독소 하나에 매달린 연구원은 5백여명에 이른다. 이에 비해 국내에서는 지속적인 연구가 거의 없었다. 수입농산물이 늘어나고 국산 농산물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곰팡이 독소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