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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다녀온 옥수수박사 김순권

잡초까지 사랑하는 노벨상 후보

옥수수는 별일 없나?” 지난 2월 5일 새벽 컴컴한 어둠 속에서 그가 던진 첫마디다. 북한을 방문하면서 근 열흘 동안이나 옥수수를 보지 못했다. “옥수수 한 번 보자.” 하우스 옆 간이 막사에서 잠이 덜 깬 제자를 데리고 그는 하우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온몸을 바쳐 옥수수를 키워냈다. 그의 옥수수가 강한 것은 그의 젊음을 먹고 자란 때문일까.


새벽잠 설치는 옥수수 사랑

훅하고 얼굴을 휘감는 훈기에 제자의 안경에는 금새 이슬이 뿌옇게 서렸다. 온도계는 30℃도를 넘어 있었다. 재빨리 환풍기를 가동하고 자식들을 둘러보는 그의 가슴이 뭉클해 온다. 1백여평의 하우스 안에서 서로의 잎을 맞대고 사이 좋게 자라고 있는 3백여종의 옥수수들. 이들이 그가 재작년 한국에 돌아온 후부터 육종해온 북한형 슈퍼 옥수수들이다.

여독에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 일찍 나왔느냐는 제자의 물음에 “자식들이 궁금해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한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청바지에 운동화차림이다. 언제든 옥수수 밭으로 뛰어가 옥수수를 돌볼 수 있는 5분대기조의 복장. 미국에서 박사를 받고 아프리카에서 옥수수연구로 유명해져 국제학자의 반열에 서 있는 그지만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일은 거의 없다. 언제나 그의 출근은 옥수수 밭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서 칠곡으로 가자, 지금 봐야 되겠다.” 경북대 구내의 하우스에서 칠곡의 시험농장까지는 승용차로도 30분이 족히 걸리는 거리다. 그 길을 이 첫새벽에 가서 옥수수를 쓰다듬고 살펴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나이지리아의 신품종 옥수수 평가학에서(가운데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김순권박사)


통일 앞당길 옥수수

옥수수박사 김순권교수(53세)는 지난 1월 24일 북경을 거쳐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에 슈퍼옥수수를 보급해서 굶주린 북한동포를 돕고 통일의 밑거름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염원이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아직 아무말도 할 수 없어요.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통일원에서 발표한 것 이상은 아무것도 없어요”. 요즈음 그를 찾는 모든 기자들이 들어야하는 한마디다. 누구를 만났느냐,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 어디를 가봤느냐 등의 질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할 수 없다고 입을 다문다. 다만 “서로 협력해야 옥수수도 보급하고 통일도 할 수 있는 게 아니겠냐”며 남북이 순조롭게 협력했으면 하는 기대를 내비칠 뿐이다.

그는 오히려 “우리 동포인데 서로 돕고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매스컴에서 떠들면 될 일도 안된다. 지난번에도 몇번 기회가 있었지만 매스컴에서 미리부터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북쪽을 자극해서 안됐다”며 동포애를 실현시키는 장애물로 매스컴의 호들갑을 염려하고 있다. “저쪽도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인데 그들을 무시하고 얕잡아보는 이야기를 떠들면 그쪽에서 좋아하겠느냐. 제발 발표된 사실만 믿고 가만히 기다려주는 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는 특히 신경을 써서 조용히 일을 처리해 실패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김박사는 이번 방문에서 매우 희망적인 인상을 받았다. 귀국 직후 제자들에게 밝힌 성과의 첫마디는 “매우 흡족했다”였다. 방문 도중 주로 농업관계자들을 만나고 농업관계 시설들을 둘러보고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이번 북한방문의 최대 성과로 밝힌 것은 북한에서 재배되는 옥수수 6종류의 종자를 얻어온 것. 각 종류당 2백알씩으로 모두 1천2백알의 씨앗들은 북한형 슈퍼옥수수를 개발하는 김박사의 연구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김박사는 96년에 북한 적응형 슈퍼옥수수를 선발하는 작업을 완료하고, 작년에는 시험재배에 성공해 북한에 당장 심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되는 약 10여종의 옥수수를 이미 선별해 놓았다. 앞으로 4-5년 정도 품종개발에 힘쓰면 완전한 단교잡종(유전적으로 순수한 두 종류의 옥수수를 교배시킨것) 옥수수를 북한에 보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 북한의 옥수수 생산량이 약 2배로 증가해 식량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통일의 밑그림이다.
 

옥수수방에서 일하는 그를 보고 누가 박사, 교수라고 생각할 것인가


잡종 1세대

김박사는 제자들을 다독여 큰 인물로 키우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옥수수 키우는 일을 보여줄 뿐이다. “세상에 연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아요. 또 많이 필요치도 않고. 1천명 중에 한두 명만 있어도 그 나라의 과학은 발전할 수 있어요. 자신의 능력은 자신이 개발하고 지켜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을까. 아직은 뱁새인 그의 제자들이 그의 황새걸음을 따라가면서 가랑이가 찢어지는 분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제자들은 낮동안의 일로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밤에는 책을 잡아야 한다. 그의 스승이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새벽같이 나와 옥수수를 돌보고 있으니까.

미국 유학 때 그의 지도교수였던 브루베이커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박사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박사는 잡종 1세대다. 그래서 강하고 유능한 사람이 됐지만 여러분은 그런 김박사 아래서 자란 잡종 2세대이기 때문에 다양한 형질을 보일 것이다. 이 중에서 김박사는 우수한 개체들을 선발해서 계속 육종할 것이니 여러분이 분발해야 한다.”

잡종 1세대는 잡종강세 현상이 일어나 유전적으로 강한 옥수수가 된다. 그러나 이 잡종 1세대를 다시 재배하면 유전적으로 분리가 일어나 수확이 적고, 많고, 키가 크고, 작은 다양한 형질을 지닌 옥수수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제자들은 각자의 능력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지만, 스승과 함께 일하면서 1세대와 똑같은 형질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세속적인 연애를 포기하고 그의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옥수수 사랑법을 익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도 고향 마을에서는 평범한 이웃 사람 공구(孔丘)로 불렸듯이, 제자들에게 비친 김박사의 모습은 친근한 선생님일 뿐이다. 작년에는 제자들이 용돈을 모아 김박사의 생일선물로 운동화 한 켤레를 사드린 적이 있다. 옥수수 밭에서는 늘 운동화를 싣고 작업하므로 그것이 가장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돈이 부족해 바닥이 푹신한 고급 신발을 사지 못하고 쿠션이 없는 딱딱한 신발을 사드린 게 못내 죄송스러웠다. 그런데 김박사가 작업할 때 제자들이 선물한 운동화를 신지 않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바닥이 딱딱해 불편해서 그러는 것으로 여기고 그때 더 좋은 운동화를 사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뒤늦게 김박사가 조깅을 할 때만 제자들이 사준 운동화를 신는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는 제자들의 선물을 아끼느라 조깅화로만 신고 옥수수 밭에서 작업할 때는 신지 않았던 것이다.
 

옥수수밭은 그의 연구실이자 응접실이다. 지난 대선 기간중 김대중 후보가 그를 만난 곳도 칠곡의 옥수수밭이었다.


자연은 다함께 사는 곳

옥수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되고, 모든 자연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이다. 그의 소망은 잡초에게도 살 자리를 주는 옥수수, 즉 공생의 옥수수를 통해 자연에서는 벌써 실현됐다. 아프리카 곡물 재배 면적의 70% 이상 되는 5천만 ha를 황폐화시키는 ‘스트라이가(Striga)’는 선진국학자들이 1백년 이상 매달려 싸워왔지만 결국 굴복하고 만 난공불락의 독초였다. 이 독초로 인해 아프리카지역이 입는 곡물피해는 매년 약 70억달러에 이른다.

그는 선진국학자들이 스트라이가에 강한 옥수수 품종을 찾아내지 못한 것은 잘못된 연구목표에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스트라이가를 완전히 박멸해 지구상에서 다시는 스트라이가가 발붙일 수 없도록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모든 생물은 살아있을 의미가 있고 공생해야 한다는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는 잘못된 생각이었다. “자연은 우리에게 식량을 공급해주는 옥수수는 물론이고 스트라이가와 같은 독초들까지도 종족을 보존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공생의 장’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김박사의 믿음이다. 아프리카인들을 기아에서 구하고 북한 동포를 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생의 장’.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표는 스트라이가를 100% 박멸하는 것이 아니라 스트라이가에게 5%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것이어야 했다. 모든 생물들은 자신의 존재를 없애려는 극단적인 공격에 대해 처음에는 맥을 못 추지만 곧 돌연변이를 일으켜 이를 무력화시킨다. 항생제를 가지고 세균을 박멸하려고 하면 어느 순간에 세균은 돌연변이를 일으켜 항생제에 저항성을 지니게 된다.

옥수수도 마찬가지. 다른 저항성을 생각지 않고 스트라이가에만 강한 단일유전자 품종을 개발한다면 처음에는 스트라이가를 무력화시킬 수 있지만, 몇년 후에는 틀림없이 스트라이가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이 옥수수를 무력화시킬 것이다. 스트라이가에게도 존재의 의미를 인정해줘야 했다. 그는 스트라이가에게 5%의 생존을 허락해주면서 스트라이가가 일으킬지도 모르는 돌연변이를 막고 다른 병해에도 저항성을 갖는 복합유전자를 갖는 옥수수품종을 개발하고자 했다.

처음에 이 생각은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됐다. 아프리카 열대농업연구소(IITA)에서 일하는 동안 그의 지론은 수많은 반대와 시기를 이겨내야 했다. 10여년의 끈질긴 분투 끝에 1994년 드디어 스트라이가와 함께 자라면서도 스트라이가에 피해를 입지 않고 공생하는 새로운 옥수수를 만들어 냈다. 그의 노력의 승리이자 철학의 승리였다. 복합유전자로 수평저항성을 가진 옥수수는 아프리카의 농업혁명을 이끌었고, 나이지리아는 50코보짜리 동전에 그가 개발한 공생의 옥수수 ‘오바슈퍼 1호‘와 ‘2호’를 새겨 그가 모든 아프리카인을 기아에서 구할 진정한 ‘추장’임을 알렸다.

“김박사는 저항성 옥수수 생산을 통해 아프리카 주민들의 생활을 놀라울 만큼 향상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공헌임을 인정하기에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합니다.” 전 나이지리아 대통령 오바산조 장군의 추천사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을 기아에서 구한 기여는 노벨평화상감이지만 생물계에 공생의 장을 역설하고 이것을 연구로 실현시킨 기여는 노벨생리의학상감이었다. 모든 과학계가 아직 김박사의 철학과 이론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1996년 노벨상위원회에 제출된 김박사의 업적 논문이 “수평저항성: 아프리카의 스트라이가 저항 연구의 돌파구”였던 것은 그의 지론과 연구성과가 노벨상감으로 인정돼가고 있다는 것을 대변해준다.

1등 한번 못해본 노벨상 후보

해마다 노벨상 후보에 오르는 그가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아인슈타인처럼 천재나 수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학창시절 평범한 학생이었을 뿐이다. “내 IQ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낮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시골의 신명초등학교는 학생수가 한 반에 20명 정도였지만 최고 성적은 2등을 한 게 고작이었다. 중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양남중학교, 울산농고를 거치면서도 한 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밝힌 그의 성적표다.

그는 학창시절 큰 시험에 세 번이나 낙방하는 쓰라린 경험을 맛보았다.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살림에 도움을 주고자 상고에 진학하려 했지만 보기 좋게 미끄러지고, 그 길로 아버지 손에 이끌려 새벽마다 소똥, 개똥을 모으고 논밭에서 쟁기질을 하는 농부의 길로 들어서야 했다. 1년간 농사일을 한 끝에 울산농고에 들어갔고, 졸업하면서 농협 입사시험에 응시했다. 당시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가세가 기울어 있었기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낙방하고 나니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았다. 결국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결심으로 경북대 농대에 지원했다. 입학금도 없고 집에 손을 벌릴 형편도 아니었다. 이때 어머니는 가족들 몰래 논을 팔아 입학금을 마련해주었다.

실패가 이끌어준 옥수수 육종의 길

하지만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던가. 그는 실패와 시련을 겪을수록 더욱 이를 악물었다. 경북대 농대에 들어가서는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에 매달렸다. 부모님을 생각하고 지금까지 느껴온 좌절을 생각하면 한시도 놀 수 없었던 것이다. 싸움하듯 공부를 하던 어느날 그에게 여학생이 다가와 고시 공부하는 법대생이냐고 물어본 일도 있었다.

농대를 졸업할 무렵, 그는 농업경제학을 전공해 교수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토록 공부를 열심히 하고도 서울대 대학원 시험에 또다시 떨어졌다. 하도 억울해서 담당교수를 찾아가 따졌더니 “자네는 촌놈처럼 생겨서 농업경제학은 안 어울리니 육종학을 계속 공부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길로 농촌진흥청에 들어갔고 옥수수과에 배치됐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후 미국유학을 하고 아프리카에서의 연구를 통해 세계적인 옥수수 육종학자가 될 수 있었으니 대학원 시험에 낙방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던 것이다.

월말고사 시험 성적이 나쁘다고 자살까지 하는 요즘의 청소년들을 생각하면 그는 죽어도 여러번 죽어야 했다. 그러나 몇 차례의 낙방을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자각하고, 항상 ‘남보다 열 배는 더 열심히 해야 앞서 나갈 수 있다’는 투지를 기르는 기회로 삼았다. “사람에게 가장 큰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데 있다”. 김박사가 1등만을 강요하는 우리의 교육제도 속에서 좌절하는 학생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옥수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실패와 시련 속에서 단련된 성실성과 노력하는 태도는 후에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됐다. 미국에 유학할 때 그의 지도교수는 세계적인 옥수수 육종학자인 브루베이커 교수였다. 한국의 학생이 미국의 저명한 학자에게 인정받는 길은 성실한 노력뿐이라고 생각하고, 낮에는 브루베이커 교수의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공부를 해내는 주경야독을 실천했다. 브루베이커교수가 아침 7시에 나와서 어느 어느 종자를 교배해 놓으라고 하면, 그는 6시부터 나와 지도교수가 올 때쯤에는 일을 절반 이상이나 마쳐놓았다. 아침마다 지도교수보다 먼저 나와 땀에 젖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본 브루베이커 교수는 얼마 지나자 김박사를 완전한 제자로 인정해줬고, 강의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육종학의 핵심 기술을 모두 전수해 주었다. 이때부터 옥수수 밭에서 일하는 시간은 노동이 아니라 그 자체가 육종학 수업이었다.

그는 유학 시절 손이 빠르기로 유명했다. 옥수수교배 올림픽이 있다면 금메달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칠곡의 농장에서 옥수수 생장 상태를 체크할 때면 그를 따르던 젊은 보조원들은 헉헉거리기 일쑤다. 그는 옥수수 밭만 가면 그야말로 훨훨 난다. 한 번은 그가 급한 볼일이 있어 3명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작업하고 남은 절반을 오후에 마저 하라고 당부하고 나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3명이 오후 내내 죽도록 매달렸지만 김박사 혼자 오전에 한 양을 채울 수가 없었다.

지난 95년 겨울, 그는 17년간의 아프리카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서 생의 마지막 목표를 되새겼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조국 통일에 기여하려고 한다.” 그가 한국땅을 밟으면서 가슴 속에 되새긴 귀국의 이유였다. 그는 한국에서의 연구목표를 세가지로 정했다. 북한 지역에 맞는 슈퍼옥수수, 남부 평야지대용 옥수수, 강원도 지역에 적응할 사료용 옥수수를 개발해 마지막 생을 동포를 위해 헌신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 아프리카에서의 연구생활을 통해 20년이 넘게 해온대로 그의 옥수수와의 열애가 다시 우리땅에서 시작됐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옥수수 재배를 시작했다.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하는 고된 일과가 계속됐다. 한마디로 옥수수가 눈에 보이는 시간은 옥수수 밭에서 살았다.

2년여의 강행군 끝에 현재 경북대와 칠곡의 하우스에서는 김박사가 키워낸 우수한 옥수수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또 경북대의 온실에서도 3백여종의 옥수수들이 저마다 북한에 심어지게 해달라고 조르고 있다.

싹트기 쉽지 않은 슈퍼옥수수

김박사의 방문성과에 힘입어 제자들은 요즘 북한에 보급될 옥수수의 종자증식을 위한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김박사와 제자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외부 지원과 인력부족이다. 북한형 옥수수개발을 위해서는 옥수수 육종은 물론 북한의 기후풍토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십억원의 예산이 소요될 예정이지만, 현재 김박사의 슈퍼옥수수개발을 위한 외부지원은 연간 몇천만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옥수수 육종과정에서 필요한 일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슈퍼옥수수의 성장을 어렵게 하고 있다.

현재 슈퍼옥수수를 키워내는 것은 거의 김박사와 그의 연구를 돕는 몇몇 제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전부다. 국제농업연구소의 행정요원 곽은경, 자료분석요원 신영수, 연구보조원 김현우, 박사과정의 허창석, 정태욱, 석사과정의 김영환, 이미라, 김형욱, 한만석, 그리고 학부생인 김도헌, 소윤섭, 이정윤 등 10여명이 시험장에서의 슈퍼옥수수 개발작업과 학교공부를 동시에 해나가는 힘겨운 야전 부대생활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이들 10여명밖에 안되는 인원으로 1만5천평에 달하는 옥수수 밭을 운영하는 일은 거의 기적에 가까울 지경이지만, 그들은 보수도 없이 스승의 헌신만큼이나 값진 희생을 슈퍼옥수수에 바치고 있다. 불행히도 김박사가 북한을 방문하고 있던 지난 2월 2일에는 습기찬 온실을 지키던 제자가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슈퍼옥수수의 성장이 또한번 주춤해지는 순간이었다.

96년부터 옥수수 작업을 돕는 일이 중고등학생들의 봉사활동으로 인정돼 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일을 돕고 있지만, 갈수록 일이 고되다며 참여가 줄어들고 있다. 그나마 방학동안에는 뜻있는 봉사학생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지금은 개학이 돼 이마저도 쓸 수 없는 실정이다. 4월까지 적응성 시험을 위한 종자준비를 마쳐야 하지만 일손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제자들의 심정을 누가 아랴. 현재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오는 경북지역 적합 옥수수 지원자금이 연구비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외부 지원은 싹이 말라 있다. 이런 실정은 아랑곳 없이 신문과 방송에서는 ‘통일의 씨앗’ 운운하며 요란스럽게 떠들지만, 정작 통일의 씨앗은 너무나 어렵사리 자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과 협의가 잘 돼 내년에 당장 옥수수를 심을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옥수수는 혼자 자랄 수 없다. 옥수수는 다른 어떤 작물보다도 비료를 많이 필요로하는 작물이다. 우리사회의 조직적인 지원이 없는 한 제아무리 ‘슈퍼’라 할지라도 옥수수는 대가 마르고 씨를 맺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은 어떻게든 올 봄 파종 때까지 작년에 수확한 옥수수를 탈곡해 파종준비를 하려고 유급인력이라도 구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연구비에서 떼어주는 하루 일당 1만원을 받고 일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동포를 먹여 살릴 통일의 씨앗은 동포들 모두가 주는 비옥한 퇴비를 원하고 있다.

새벽의 기도

연구비가 제대로 지원되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 학교의 행정잡무와 각종 보고서 등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까지 김박사의 연구여건은 참으로 가혹하다. 아프리카 열대농업연구소에서의 여건과 비교하면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다. 그 속에서 학문적인 입장을 달리하는 국내외의 학자들과 경쟁하고 자신의 이론을 역설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근래에 북한에 보급할 옥수수를 개발하는 일이 정치적인 문제로 지연되고 방해받는 일을 겪으며, 김박사의 마음은 더 한층 무거운 짐을 안게 됐다.
 

1998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전용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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