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작게 만드는 게 생명. 그런데 지금의 실리콘 반도체보다 집적도가 1만배 이상 되는 새로운 반도체 물질이 발견됐다. 발견자는 서울대 물리학과 임지순 교수와 미국 버클리 대학의 마빈 코헨 교수. 그들은 지난 1월 29일 세계적인 과학잡지인 ‘네이처’에 그 내용를 소개해 학계는 물론 산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새로 발견된 반도체 물질은 탄소 나노튜브. 이것이 어떤 물질인지 알려면 먼저 20세기 말 최대의 발견이라는 플러렌의 역사부터 더듬어봐야 한다.
자연상태에서 안정적인 탄소 동소체는 다이아몬드와 흑연 두가지뿐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1985년 미국 라이스 대학의 리처드 스몰리 교수와 영국 서섹스 대학의 해롤드 크로토 교수가 제3의 탄소 동소체를 발견해냈다. 이것이 바로 흑연을 태운 검댕에서 발견되는 플러렌이다.
그후 플러렌의 구조는 축구공, 럭비공, 바구니 등 특이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연구 결과 밝혀졌다. 과학자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플러렌이 초고성능 윤활유, 고강도 신소재, 신약, 고성능 배터리 등은 물론 상온 초전도체 개발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 덕에 1996년 스몰리 교수와 크로토 교수는 노벨화학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플러렌은 과학자들의 예상을 빗나갔다. 구조 자체가 너무 안정적이어서 조작이 힘들고, 연구해 봤자 생산량이 적어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1년 일본전기회사(NEC)의 이지마 박사가 플러렌을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우연히 가늘고 긴 대롱 모양의 탄소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것이 탄소 나노튜브 연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노튜브라는 이름은 그 지름이 보통 1나노미터(10-9m)이기 때문.
탄소 나노튜브의 등장은 플러렌에서 막혔던 연구를 다시 활성화시켰다. 탄소 나노튜브는 전기적으로 도체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가늘고 길기 때문에, 축구공 모양을 하고 있는 플러렌과 달리 이용범위가 넓었다. 더구나 탄소 나노튜브는 지름의 크기나 각도에 따라 반도체가 된다는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반도체적인 성질을 가진 탄소 나노튜브를 만드는 일은 예상밖으로 어려웠다.
다발 모양이 반도체 혁명의 열쇠
그런데 1996년 스몰리 교수가 여러 가닥의 탄소 나노튜브가 다발처럼 묶여 있는 것을 새롭게 합성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임지순 교수는 이 다발형 나노튜브가 어떤 전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버클리대 마빈 코헨 교수와 함께 연구해 마침내 모두가 반도체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발형 나노튜브가 왜 한가닥일 때는 도체의 성질을 지녔다가 다발로 묶으면 반도체가 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 원리를 아는 것은 대량 생산을 하기 위한 중요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1년여 동안 한국과 미국의 슈퍼컴퓨터를 동원해 그 원리를 찾아냈는데, 바로 ‘거울 대칭성’(mirror symmetry)이란 개념이다.
나노튜브 하나는 그 축을 따라 거울을 놓고 보면 원래 튜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좌우가 대칭을 이룬다. 그래서 두개의 에너지 띠가 서로 교차할 수 있어 금속 성질을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튜브들이 다발을 이루거나, 튜브에 다른 원자가 붙거나, 튜브 모양을 적당히 변형시키면 거울 대칭성이 깨진다. 결국 교차하던 에너지 띠가 갈라져서 반도체가 된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탄소 나노튜브를 다발로 묶거나 다른 원자를 붙이기만 하면 모두 반도체가 된다.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는 1전자 트랜지스터(one electron transitor)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완성되면 전자 하나가 트랜지스터 역할을 한다. 임지순 교수는 “탄소 나노튜브가 1전자 트랜지스터라는 목표에 한발 다가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자 하나의 크기까지는 안되지만 나노( 10-9m) 수준까지는 접근한 것이다. 그 결과 실리콘 반도체보다 집적도가 1만배 이상이나 되는 새로운 반도체가 탄생한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나노튜브 반도체가 기존의 실리콘 반도체와 전혀 설계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기존의 실리콘 반도체는 부도체인 실리콘 위에 소량의 불순물을 얹어 미세한 회로를 깐다. 그런데 탄소 나노튜브는 자체가 반도체이기 때문에 불순물을 얹는 복잡한 과정이 필요없다.
기존의 생각으로 판단하면 생산된 탄소 나노튜브가 복잡하게 엉켜 있어 배관공사와 같은 회로설계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임교수는 “그 복잡성을 잘 이용하면 병렬분산기억소자로 새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인간의 두뇌구조와 같은 논리회로를 연구해온 신경망 학자들에게 대단한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 쓰고 있는 회로들은 0과 1의 조합으로 신호를 전달한다. 그러나 인간의 신경조직은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대충 얽혀 있어도 훌륭한 연산을 해낸다. 임교수는 “다발형 탄소 나노튜브가 인간의 신경조직을 닮은 새로운 신물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