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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칩에 갇힌 전자파놉티콘의 죄수들

정보화 바람을 타고 개인의 신상과 관련된 오만가지 정보가 디지털데이터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저기 흩어진 이들 정보는 어느날 하나로 통합돼 나를 대신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들 정보의 데이터베이스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과연 정보화는 문명의 발전을 이끌 것인가. 재앙이 될 것인가.
 

마이크크로칩에 갇힌 전자파놉티콘의 죄수들


사례 하나. 회사원 봉태웅씨는 얼마 전 은행 직원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평소 은행이라곤 온라인으로 들어오는 월급을 보관했다가 찾아 쓰는 정도 외에 별다른 거래가 없는 그였다.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한 은행원은 평소 우리 은행을 이용해줘 감사하다는 의례적 인사 뒤에 이내 본론을 꺼냈다. 여유자금이 있는 것 같은데, 이율이 높은 새 상품에 가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지갑을 털린 듯한 기분이 든 그가 자신의 재산 상태가 얼마나 되는지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느냐고 묻자 은행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입니까. 단말기 두드려보면 다 나와요.”

사례 둘. 매일밤 한편의 비디오 관람으로 하루를 정리하는 봉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퇴근길에 단골 비디오 대여점으로 향했다. “오늘은 뭘 볼까.” 선택의 길목에서 헤매고 있는 그에게 가게 주인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저씨 좋아할만한 거 하나 들어왔어요. ‘빨간 xxx’라고, 요즘 정신 없이 나가는 건데 지금 막 돌아왔네요.”

가게 주인은 테이블에 놓인 컴퓨터의 대여 관리 프로그램에 김씨의 이름을 넣고 오늘 빌린 비디오 이름을 입력한다. 힐끗 보니 김씨 이름 아래에는 그동안 그가 빌려간 비디오의 이름이 좌르르 펼쳐진다. ‘△△부인 …’ ‘에로틱 □□’ ‘섹시…’.

도처에 깔린 ‘몰래 카메라’

지난 10여년 사이 사회 전반을 강타한 정보화 드라이브는 실로 많은 우리의 일상사를 변모시켰다. 구경조차 힘들던 컴퓨터가 거의 집집마다 놓이면서 보급대수는 이미 선진국 소준에 도달했고, 컴퓨터를 필요한 범위에서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정보화 덕분에 편리해진 점은 한둘이 아니다. 동사무소에 가서 증명서 한통 떼는 것만 해도 그렇다. 예전에는 길게 줄을 서 신청서를 제출한 뒤 대장(臺帳)을 찾아 복사하고 도장 찍어 건네받는데 걸리던 시간이 하루 반나절이었다. 그러나 행정전산망이 완료된 지금은 구태여 거주지 동사무소까지 찾아갈 필요 없이 주변의 가까운 동사무소를 찾아가 원하는 증명서를 발부받는데 단 2-3분이면 충분하다. 전화나 컴퓨터 통신으로도 신청할 수 있다. ‘세상 좋아졌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만 하다.

정보화의 이점이 피부로 와닿을 무렵부터 벌어진 특기할만한 변화는 컴퓨터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다. 이를테면 프린터가 찍어낸 은행 온라인 장부의 덧셈 뺄셈을 일일이 확인해보는 사람은 없다. 컴퓨터가 했으니 당연히 옳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동네 어귀의 세탁소가 자랑스레 내건 ‘컴퓨터 클리닝’ 간판은 ‘완벽한 세탁’으로 받아들여지는 등 우리의 언어생활에도 컴퓨터는 곧 ‘정확’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같은 변화에 익숙해지면서 정보화의 필요성에 대한 왈가왈부는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로 치부된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새롭게 등장한 테크놀러지는 편리함을 제공하는 한편으로 이전에 없던 문제를 불러온다. 앞서 본 봉씨의 경우처럼 원하건 원하지 않건간에 개인 생활의 흔적들이 여기 저기 널려 흩어진 채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은행이나 비디오 가게는 단지 봉씨의 필요에 의해 설정된 거래 관계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가 얼마나 돈을 가지고 있든, 또 어떤 종류의 영화 장르를 좋아하든 이 관계에서는 고려할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이를 언급한다는 것은 사생활 침해의 소지가 많다.

물론 혹자는 재산 상태를 관리해주겠다는 은행원의 전화나 손님의 선택을 도와준 비디오 가게 주인의 행위를 호의로 해석, “상대방의 뜻을 굳이 그런 식으로 볼 필요가 있는가”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화가 진전될수록 개인의 흔적이 기록되는 곳은 비단 은행과 비디오 가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몰래 카메라’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사는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타인에게 노출될 수 있는 위험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이들 기록이 국가처럼 언제라도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권력에 의해 통합될 경우, 우리는 창살없는 감옥에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 도대체 특이할 것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소시민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어김없이 기록되고 있으며, 필요하면 언제라도 까발려질 수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가 오히려 지금만도 못한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탈출 불가능의 감옥을 그린 영화 '압솔롬 탈출'의 한 장면.


효율성인가, 사생활 보호인가

상당수 학자들은 정보화의 진전이 사회 구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도 있지만, 새로운 통제체제로 몰고 갈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한다. 바야흐로 정보화로 인한 유토피아의 도래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 즉 디스토피아의 위험성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란 것이다.
애초의 의도에서 변질된 정보화 사회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견해가 파놉티콘(panopticon), 즉 원형감옥에 관한 논의다. 원래 파놉티콘은 19세기의 대표적인 공리주의자인 제레미 벤덤이 사회통제를 위한 제도적장치로 구상했던 건축물이다.

파놉티콘은 중앙에 원주형 탑을 둔 반원형의 건물이다. 이 탑에는 여러개의 큰 창문들이 뚫려 있으며, 바깥쪽 건물은 탑과 마주보는 창문이 달린 작은 독방으로 나뉘어 있어 이곳에 수감된 죄수들은 서로를 볼 수 없다. 탑 속에 배치된 간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감옥에 갇힌 모든 죄수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다.

이에 따라 죄수들은 감시와 통제가 있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죄수들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당연히 감시당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하며, 복종만이 유일한 선택이다. 감시의 효율성이 큰 이러한 장치는 감옥 뿐만 아니라 정신병원, 학교 그리고 공장 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며, 자동적이면서도 중단없는 제도적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

1백년도 더 지난 이 개념이 요즘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인 미셸 푸코의 역할이 크다. 푸코는 감옥의 역사를 다룬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19세기 프랑스 감옥의 원형으로 구상됐던 파놉티콘이 현대의 사회 통제방식에 원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푸코의 견해를 받아들인 학자들은 정보화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는데 정치권력의 역할이 더욱 더 증대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에 따라 사회에 대한 정치권력의 통제는 정보화의 진전과 더불어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사회적 감시의 범위와 정도도 증대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푸코의 지적처럼 정보화는 사회 통제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적인 수단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이 관점에 따른다면 기술은 감시 수단을 통해 발전해왔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비록 정보의 생산, 관리, 그리고 배분 방식이 정보화의 진전과 더불어 다원화되고 있지만, 아직도 이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주체는 국가와 정치권력이기 때문이다.
 

전자 주민카드에 담겨 있는 각종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휴대용 신분확인 단말기. '자랑스럽게도'국내 기술이 이루어낸 작품이다. 첨단을 자랑하는 테크놀러지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기 보다는 개개인의 사사로운 행동 하나하나를 일일이 기록하고 감시하는 역할에 더 열심인 것은 아닐까.


"온세상이 컴퓨터에 들어 있어요"

전자 파놉티콘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학자들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을 상기시킨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나라 오세아니아의 통치자인 빅 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이란 기계를 이용해 주민의 사상과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 어떤 소리라도, 비록 그것이 매우 낮은 속삭임일지라도 텔레스크린은 놓치지 않는다.

텔레스크린의 공포는 당사자가 감시당하는지 조차 알 방법이 없다는데서 극대화된다. 이같은 상황에서는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항상 감시당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때문에 구성원들은 항상 사회적 감시에 놓여 있는 상태를 내면화함으로써 체제에 순응한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텔레스크린을 사회 곳곳에 놓여 있는 '정보기계'의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 등장한다. 술집에서 호기좋게 긁은 카드대금 내역은 카드회사의 컴퓨터에 차곡 차곡 보관된다. 동네 구멍가게는 고객관리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집이 한달에 몇병의 맥주를 소비하는지 기록하고 있다(실제 미국의 슈퍼마켓들은 소비자의 구매 행태를 일일이 기록, 물건이 떨어질 즈음이면 할인 쿠폰을 보내는 식의 마케팅 활동이 일반화돼 있다).

전화 회사는 누구와 몇시에 통화했는지를 자동으로 기록한다. 병원의 컴퓨터는 나의 모든 진료 상황과 병력을 입력하고 있다. 세무서는 내 한달 월급을 일일이 챙기고 있으며 또 얼마짜리 집에 사록 있는지를 훤히 알고 있다. 각 정당은 내가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 누구 손에 의해 관리되느냐에 따라 내게 중대한 흉기로 돌변할 수 있는 정보들이다.

오웬의 소설에서 벙보의 생성과 소멸을 다루는 '진실부서'(ministry of truth)가 등장하는 부분은 국가의 모든 자료가 디지털화되고 있는 요즘의 실정에서 특히 의미심장하다. 현재의 컴퓨터 기술은 컴퓨터에 의해 기록된 데이터를 덧쓰거나 지워도 그 흔적을 남기지 않게 한다. 이는 데이터의 신뢰성에 의문점을 제기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자료의 입력이나 관리를 맡은 주체가 한 개인의 신상을 잘못 기록했다면 그는 살아 있음에도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 꼴이 된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했건, 아니면 실수에 의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산드라 블록이 주연을 맡은 영화 '네트'는 바로 이같은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천재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주인공 안젤라는 어느날 갑자기 황당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얼굴을 알 수 없는 적이 정부의 전산망에 들어가 그의 모든 개인 정보를 몽땅 지워버린 것이다. 컴퓨터가 말해주는 것만이 진실이 세상에서 그는 허위로 입력된 정보에 의해 범죄자 신세가 돼 경찰에 체포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변호사에게 말한다.

'온 세상이 컴퓨터에 들어 있어요. 사회보장기록, 차량기록, 병원기록, 신용기록….나에 대한 모든 게 다요."

이 꿈같은 이야기는, 그러나 실제 상황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 6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민등록증을 인감증명을 포함해 다목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주민카드로 대체하고, 내년 1년 동안 제주도에서 시범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 주민카드에는 개인의 주민등록사항 외에도 인감증명, 운전면허, 국민연금, 의료보험, 병역사항, 세대사항 등 7대 항목41가지 사항이 포함된다고 한다. 세계처음으로 현재의 주민등록증이란 제도를 시행한 우리나라에서 전자주민증이 발급된다면 이 또한 세계 처음이 된다.

이 제도의 실시에 찬성하는 측에서는 전자주민증 도입을 통해△각종 증명서 발급을 처리하는 인건비 등 행정비용 절감△주민등록증 위ㆍ변조로 인한 각종 사회 범죄 예방△카드 도입을 통한 기술 축적△국민의 정보화 마인드 제고등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순기능이 더 큰 이 제도에 반대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며, 현재 제기되고 있는 비관적 우려는 다분히 '막연한 의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만으로 각종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전산화함으로써 개인정보가 공권력에 의해 무제한적으로 발가벗겨진다는, 전자 파놉티콘을 경계하는 반대론자들의 걱정을 씻어내진 못한다. 바야흐로 국민 모두가 죄인 아닌 죄인이 돼 감옥 창살이 아닌 마이크로칩에 갖히는 상황이 오고 있는듯하다.
 

1997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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