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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마시고 먹는 약은 사약

다이아나 운전사 음주에 항우울제까지 복용

지난 8월 31일 새벽 프랑스 파리 시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영국 다이애나(36)빈의 사고경위에 대해 세인의 이목이 집중됐다. 파리 검찰은 사고차량을 몰다 즉사한 운전사의 혈액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다. 혈중 알코올농도가 법적 허용한도의 3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더욱이 참사가 일어나기 전 운전사가 두종류의 항우울제를 복용했다는 점도 밝혀졌다.

그렇다면 운전사는 평소보다 정신적으로 무척 불안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항우울제를 알코올과 함께 복용하면 몸에서 약물의 부작용이 증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이애나 사고차량 운전사 헨리 폴. 파리 검찰은 그가 운전하기 전 술을 많이 마셨고, 두가지의 항우울제를 복용했다고 밝혔다.


비극적 에피소드

평소 얌전한 사람이라도 알코올을 많이 섭취하면 수다를 떨거나 쉽게 흥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흔히 알코올이 뇌와 척추로 구성된 중추신경계의 작용을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알코올의 효과는 반대, 즉 중추신경계를 억제한다. 그 결과 집중력이나 판단력과 같은 인지기능, 그리고 호흡이나 대사와 같은 생리적 기능이 떨어진다. 술을 먹고 과감해지는 이유는 알코올이 뇌의 자제력 조절 부위를 억제하기 때문이다.

만일 중추신경계를 억제하는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이 알코올을 섭취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억제 효과는 커진다.

감기약의 예를 살펴보자. 콧물이 나올 때 사용하는 항히스타민제는 중추신경계를 억제해 졸음을 유발시킨다는 점이 문제시 됐다. 그래서 이 약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운전할 때 복용하지 말도록 권고돼 왔다. 심한 경우 낮의 일상 활동에 지장을 줄 정도다. 최근에는 부작용을 없애는 방향으로 약이 개발되고 있지만, 알코올을 항히스타민제와 함께 먹으면 졸음이 심해지고 더욱 몽롱해지는 현상은 피할 수 없다. 코감기에 걸려 약을 먹을 때 술을 피해야 하는 이유다.

다이애나빈 사고차량의 운전사가 복용한 항우울제 역시 중추신경계를 억제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대표적인 약물이다. 파리 검찰에 따르면 운전사 혈액에서 검출된 항우울제는 프로작과 티아프라이드라고 한다. 프로작은 수면장애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처방되는 약으로, 구토, 정신착란, 기억과 집중장애와 같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한편 티아프라이드는 급성정신병이나 알코올중독증에 걸린 환자의 불안감을 제거해주는 신경각성제의 일종으로, 판단력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이 보고돼 있다.

물론 약물의 부작용이 항상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알코올의 섭취량이 많은 경우라면 ‘억제 기능’이 상승한 탓에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특히 사고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다이애나빈 일행을 집요하게 쫓던 사진사들의 존재는 운전사의 판단력과 자제력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 사고는 알코올과 약물을 함께 먹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하나의 비극적 에피소드로 약학사에 기록될지 모른다.

알코올과 약물의 상극작용은 비단 중추신경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먹는 약물과 알코올이 몸에 들어왔을 때 반드시 거치는 곳은 간이다. 이곳에서 또다른 상극작용이 펼쳐진다.

간은 알코올이나 약물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분해시킨다. 알코올은 몸에서 빨리 분해될수록 좋다. 하지만 약물이 많이 분해된다는 얘기는 몸에서 약효가 그만큼 떨어진다는 의미다. 그래서 먹는 약은 흔히 상처 치료에 필요한 양보다 많이 처방된다.

‘약발’이 안받는 이유

알코올은 간에서 아세트알데히드를 거쳐 아세트산으로 최종 분해된다. 이 과정에 주로 관여하는 효소를 탈수소효소라고 부른다. 그런데 탈수소효소의 양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알코올을 많이 섭취할 경우 이를 모두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몸에서는 또다른 효소(시토크롬 P450)가 활성화돼 알코올 분해에 동원된다. 이처럼 간에서 분해 효소의 양이 증가하다 보면 약물도 더욱 많이 분해되기 마련이다. 알코올중독자에게 ‘약발’이 잘 안받는 이유다.

때때로 시토크롬 P450은 특정 약물과 반응해 인체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진통제의 주성분(아세트아미노펜)은 이 효소에 의해 맹독성의 물질로 변환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이 평소에 문제가 없다가도 알코올을 섭취할 경우 강한 통증이나 발작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

알코올과 약물의 상극작용은 우리 생활과 멀리 떨어진 얘기가 아니다. 누구라도 약국에서 갖가지 약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데다가, 알코올 소비량은 세계 수준을 달리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약을 ‘먹느니 차라리 앓는’ 편이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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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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