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에는 이른바 ‘비트족’이라 불리는 반항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찻집에 모여 앉아 아이젠하워 시대의 획일성을 비판하면서 전후의 우울을 달랬다. 60년대에는 기성의 사회통념이나 가치체계, 생활양식에 반발한 ‘히피족’이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섹스와 마약, 록큰롤에 탐닉하며 반전운동을 벌였다. 그들의 전통은 70년대 ‘펑크족’에게로 이어져 기성의 대중문화에 반하는 하위문화를 형성하면서, 사회가 가지는 타성을 견제하고 보수주의에 맞서 싸우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소련과 함께 몰락했고, 정보를 낚는 그물 ‘인터넷’이 지구를 빈틈없이 덮고 있는 이 시대의 반항문화는 무엇일까. 1990년대에 들어와 컴퓨터가 급속도로 보급되고, 컴퓨터 문화가 사회 전체를 주도하게 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하위문화가 등장하였다. 이른바 ‘사이버펑크’(cyber punk)가 바로 그것이다. ‘사이버 시대’의 ‘펑크’(punk, 반항아, 불량배)라는 의미를 가진 사이버펑크는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을 깊숙히 지배하고 있는 디지털 시대의 반항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인간을 조종하는 컴퓨터
사이버스페이스의 전자 게시판 앞에 붙어사는 네티즌,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자기들끼리 폐쇄적이고 열광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몰두하는 컴퓨터광들,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가진 골수 해커는 물론이고, 다마곳치에 정신을 뺏긴 국민학생과 비디오 게임에 중독된, 사춘기도 못 넘긴 10대도 넒은 의미에서 사이버펑크족에 속한다.
‘사이버펑크’라는 말은 원래 1980년대 중반 어두운 미래사회에 대한 SF소설을 써오던 몇몇 소설가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980년대 초, 캐나다의 소설가 윌리엄 깁슨은 ‘뉴로맨서’(Neuromancer)라는 소설을 내놓았다.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미래 사회는 독자뿐 아니라 다른 소설가에게까지 강한 인상을 주었고, 몇몇 SF소설가들은 이와 비슷한 경향의 소설들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SF소설 평론가 가드너 더조이스는 윌리엄 깁슨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SF 소설가들, 예를 들면, 브루스 스터링, 톰 매덕스, 루 샤이너, 루디 루커, 존 셜리, 패트 카디건 등을 가리켜 ‘사이버펑크’라고 불렀는데, 이는 브루스 베스케의 단편 소설 ‘사이버펑크’에서 따온 말이었다. 이것이 ‘사이버펑크’라는 단어의 유래다. 일반적으로 사이버펑크 문학은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화의 체제 안에서 동화되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뉴로맨서’의 무대는 마약과 살인, 인간성 상실과 자아 정체성의 문제로 고민하는 암울한 미래 공간이다. 주인공 케이스는 마약을 상습적으로 복용하면서 남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해커다. 불행히도 그는 지나친 마약 복용으로 신경계를 다쳐 자신의 뇌를 더 이상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할 수 없는 폐인이 되어, 술집을 전전하며 희망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제의를 받는다. 케이스의 신경계를 고쳐주고 최신 컴퓨터를 빌려주는 대신, 부탁하는 일을 처리해 달라는 것이다. 케이스는 가죽 잠바에 선글라스를 끼고 손톱이 모두 칼날로 만들어진 몰리라는 여자 파트너와 함께 부탁 받은 일을 해나간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일을 맡긴 사람이 ‘윈터무트’라는 인공지능 컴퓨터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핵전쟁 이후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대기업 테시어 애시플에서는 두개의 인공지능 컴퓨터가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인공지능을 합체함으로써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이 둘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기계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그래서 인공지능 컴퓨터는 이 일을 수행할 조력자로 케이스를 택한 것이다.
‘뉴로맨서’에서 ‘사이버스페이스’란 인간의 두뇌와 컴퓨터를 전극으로 연결하여 형성된 가상 세계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지리적·시간적 개념을 넘어 초공간적인 활동 영역이고, 오직 컴퓨터와 터미널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터미네이터가 보여주는 미래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은 윌리엄 깁슨의 단편집 ‘버닝 크롬’에서 처음 사용됐다고 한다. 사이버펑크라는 말은 ‘뉴로맨서’의 실질적인 배경인 사이버스페이스와 등장인물들의 펑크적인 캐릭터가 맞물려서 만들어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사이버펑크라는 말은 그 후 단순히 일군의 SF소설가들을 지칭하는데 그치지 않고 특정 소설과 영화 장르를 가리키다가, 이제는 사회의 한 흐름이나 문화를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이버펑크에 대한 정의는 매우 다양한데, 그것들의 공통점은 컴퓨터와 인터넷, 디지털 전자 기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과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SF해설가 박상준씨에 따르면 “사이버펑크는 일견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반항하는 듯이 보이나, 사실 그들이 거부감을 갖는 대상은 아직 고도 정보화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대다수 구세대들의 문명적 구태의 총체”라고 한다. 그들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해 줄 것인가’ 하는 낡아빠진 질문에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에게 과학기술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환경일 뿐, 그것을 인간에게 이롭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스스로에게 달린 문제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히피들과는 반대로, 과학기술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모색한다. 우리가 기술을 지배하지 못하면 기술 자체에 예속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이 야기하는 인간 정체성의 상실, 인간 소외 문제, 기계문명과의 갈등, 전문화사회에서 기계화된 인간관계 등을 극복하는 방법을 과학기술 문명 그 자체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이버펑크가 그리는 미래상은 사이버펑크라 분류되는 영화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사이버펑크 영화’란 일반적으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물질 문명의 이기 속에 나타나는 인간 소외를 다루면서 휴머니즘의 매몰을 경고하는 영화들을 말한다. 대표적인 사이버펑크 영화로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 ‘론머맨’(The Lawnmower man), TV와 인간 의식의 관계를 다룬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롬’(Videodrome), 디스토피아적 미래 세계를 보여주는 ‘터미네이터 1, 2’(Terminator) 등이 있다.
사이버펑크 영화들은 액션과 긴박감이 넘치고, 미래 사회와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치밀하면서도 감각적이다. 시간적·공간적 배경과 이야기 전개는 첨단과학기술과 맞물려 있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이 미래 사회를 유토피아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낙관론이나, 인류가 과학기술에 종속될 것이라는 비관론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고도 문명의 이기에 열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고도 문명에 대한 경멸감을 담고 세계를 본다. 특히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와 오토모 카츠히로의 ‘아키라’에는 사이버펑크적인 미래가 감각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파괴된 세계에서 재건의 희망 암시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각색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뉴로맨서’에 나타난 미래사회와 매우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2019년, 화려한 네온 간판과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의 미소가 빌딩 숲 맨 꼭대기를 장식하고, 그 사이에 좁다랗게 놓인 골목길에서는 인조인간들의 부속품을 뒷거래하는 암시장이 있다. 인간들은 자신과 거의 똑같은 신체와 지능을 가진 리플리컨트(복제인간)들을 만들어 전쟁과 노동에 이용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 도시의 뒷골목은 사이버펑크족들이 그리는 불안정하고 암울한 미래상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오토모 카츠히로가 줄거리를 쓰고 감독한 ‘아키라’는 일본 SF애니메이션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영화의 무대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핵전쟁이 발발한 후 폐허가 된 일본의 수도 네오 도쿄다. 반항아이며 문제아인 고등학생 카네다와 그 친구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고속도로에서 싸움을 벌이는 폭주족이다. 네오 도쿄에서 가정과 학교라는 존재는 이미 붕괴해버렸고, 소년들은 흉폭해져 거리를 싸움터로 만들며 파괴를 일삼는다. 타락한 도시에서 자라온 소년들은 극도의 허무 속에서 이 사회를 모두 쓸어버리고 싶은 파괴 욕구를 갖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정신력을 사용하는 어린애들 때문에 카네다의 친구 데츠오가 병원에 실려가게 되고, 데츠오는 군부가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는 ‘아키라’라는 정신 감응 연구의 희생양이 된다. 결국 카네다와 괴물로 변한 데츠오는 엄청난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회복 불가능한 사회에 대한 거대한 파괴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면서 영화는 파괴된 세계를 재건할 희망적인 암시와 함께 3명의 소년·소녀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아키라’의 매력은 살인과 폭력, 데모와 테러로 얼룩진 도쿄의 모습과 그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젊은이들의 반항과 허무, 파괴와 재건으로 이어지는 사이버펑크적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저자인 이성호씨는 “사이버펑크란 결국 컴퓨터를 매개로 인간의 유대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시키고 인종과 나라와의 벽을 허물며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컴퓨터를 통한 사이버스페이스의 탄생은 시공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현실화시킨 강력한 도구이다.
사이버펑크족들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겪는 가상현실의 경험을 중시한다. 사이버펑크족들에게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경험과 현실 세계에서의 경험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 짓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이버스페이스의 경험은 감각적·의식적으로 현실과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이버펑크족들은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실제 생활에서 겪는 인간 소외와 정체성의 상실, 의사소통의 단절 등을 극복하려고 한다. 컴퓨터 통신망은 그들이 원하는 모든 정보를 자유롭게 입수하거나 교환할 수 있게 해주면서 모든 과정에서 익명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1960년대 히피들에게 삶은 무거운 것이었다. 현실과 죽음을 초월하기 위해 그들은 마약과 섹스, 록큰롤을 택했다. 마약은 그들에게 초현실적 환각을 제공했고, 록큰롤과 섹스는 열정과 쾌락의 안식처였다. 1960년대 히피들이 마약과 섹스, 록큰롤을 통해 현실이 옭아 메고 있는 족쇄로부터 자유로와지기를 꿈꿨다면, 사이버펑크족들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영혼의 새로운 안식처를 찾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컴퓨터가 주는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감성에 중독되어 갔고, 사이버 섹스에 탐닉하게 되었다.
현실로 뛰쳐나와야
1960년대 히피문화가 대중문화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고도의 컴퓨터사회가 된다 하더라도 사이버펑크가 주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히피가 사라진 지금도 히피정신만은 남아있어야 한다. 삐뚤어진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 젊은이의 패기와 열정은 계속 남아서 사회가 고여 썩지 않도록 견제해야 한다.
사이버펑크의 정신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보다 나은 미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술 그 자체에 예속돼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버펑크 정신은 사이버스페이스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이버펑크족들은 사이버스페이스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현실로 나와서 사회에 새로운 열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새로운 것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