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이다. 여러 모양의 분수와 계단식 폭포가 곳곳에 꾸며지고, 연못의 잔잔한 수면이경치를 더욱 환상적으로 만든다.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진 유럽의 대표적인 정원을 돌며 물의 유희를 함께 즐겨보자.
불새분수에서 경복궁 향원정까지 멋과 과학의 조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외부 환경은 공원, 광장, 나무, 분수 등 다양한 장식적인 구성물로 이뤄진다. 청결함, 신선함의 이미지를 갖춘 물은 외부 환경을 꾸미는 중요한 요소다. 물이 없는 공원이나 분수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특히 물은 아랍이나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정원에서부터 현대의 정원에 이르기까지 각종 정원에서 중요한 조형요소로서 인식돼 왔다. 물 자체를 주요 테마로 삼은 정원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경우 물은 멋의 측면뿐 아니라 과학적으로 사용된 사례가 많다. 경복궁 향원정의 취수구가 한 예다. 물이 연못에 흘러들어갈 때 수면의 잔잔함을 방해하지 않도록 수직으로 두 번 꺽음으로써 유속을 줄이면서 물이 유입되도록 만들었다.
현대 도시를 꾸밀 때 물을 이용하는 일은 이미 일상화되고 있다. 과거처럼 단순한 분수 형태뿐 아니라 개천을 도시에 도입시킨다든지 놀이시설에 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등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물의 특성을 살리고 있다.
이탈리아 란테정원 계단 폭포 따라 환상의 물놀이
란테 빌라(Villa Lante)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0km 정도 떨어진 비테르보라는 도시외곽의 바그나이아라는 조그만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전형적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으로 유럽 정원예술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정원의 평면은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로 구성돼 있지만 경직되거나 지루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1566년 비테르보의 주교는 한 건축가에게 자신의 여름 별장용으로 빌라와 정원을 설계해달라고 의뢰했다. 이 건축가는 주교 가문의 문장인 가재로 빌라를 장식하고 정원을 갖가지 조형물로 화려하게 꾸몄다.
이 호사스런 정원을 꾸미는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 당시 주변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교황청은 란테 정원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소유권을 교황청으로 이전하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정원을 정열적으로 사랑한 주교는 끝내 요지부동이었다.
이 정원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요소는 물이다. 정원 상부의 인공동굴로부터 하부 화단의 사각형 연못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물 놀이’가 진행되고 있다. 물은 모든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의 조형요소 중 하나이지만 이 정원의 ‘물 놀이’는 가히 환상적이다.
인공동굴의 거친 암벽으로부터 떨어지는 물은 이끼가 자라는 말발굽 형태의 연못에 모인다. 이 물은 동굴 앞에 바로 접하고 있는 ‘뮤즈의 발코니’라는 두개의 정자를 지나 지하로 흘러 상부 정원의 중심인 팔각형 탑의 분수로 연결된다.
물의 흐름은 계속해서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작은 폭포로 이어진다. 이 ‘물 계단’은 주교 가문의 문장(紋章)인 가재를 형상화해 만들었다. 물은 가재의 머리에서 시작해 가재 몸통을 길게 늘여 놓은 것처럼 보이는 소용돌이 조각들 사이로 흘러간다.
물은 두개의 조그만 기둥(오벨리스크) 사이를 지나 ‘물의 신’ 조각으로 둘러쌓인 반원형의 연못으로 떨어진다. 이곳을 지나 양쪽 옆으로 갈라지는 ‘물 계단’이 다시 나타나는데, 흐르는 물이 한층한층 떨어지며 생기는 하얀 물거품과 바닥의 짙은 초록빛 이끼가 매우 인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못에 모인 물은 지하로 흘러 ‘물 테이블’로 불리는 커다란 돌탁자의 중앙부를 지난다. 이 중앙부에 와인이나 과일을 담가서 차게 만들고 주변의 돌탁자 위에는 음식을 마련해 연회를 즐긴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서부터 다시 지하로 흐르는 물은 ‘물 유희’의 절정을 이루는 ‘촛불 분수’로 이어진다. 위를 향해 낮게 솟아 오르는 분수의 물줄기가 마치 촛불의 불꽃처럼 보여 이름이 붙여졌다.
‘촛불 분수’ 상부는 정원 하부의 화단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부터 지하로 흐르는 물이 사각형의 연못에 이르면 ‘물 유희’는 끝난다. 이곳에 ‘흑인의 분수’가 있다.
오스트리아 헬브룬 궁전 유희로 가득찬 동굴 탐험
많은 인공동굴과 분수, 조각물 등으로 이루어진 이 정원은 1613-1619년에 걸쳐 조성됐다. 관람을 시작하는 곳은 ‘로마식 극장’이다. 반원형 계단식으로 구성돼 있는 이 야외 극장은 17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많은 조각물로 가득 차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극장 가운데 있는 ‘물 식탁’이다. 이 식탁의 중앙 부분은 연못처럼 깊고 길게 파여 있어, 이곳을 흐르는 찬 물에 와인이나 과일을 담가둔 뒤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이곳의 대주교가 무더운 여름날 손님들을 초청해 축제를 벌이면서 시원한 여름밤을 보내기 위해 이 식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축제가 점점 무르익고 흥이 나면 대주교는 한 기사에게 윙크로 신호를 보낸다. 기사는 손잡이를 잡아당겨 손님들이 앉아있는 의자 밑에서 손가락 굵기의 물줄기가 솟아오르게 한다. 물론 대주교의 의자는 물이 솟아오르지 않도록 장치돼 있다. 당시 궁전의 예절에 따르면 대주교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도 일어날 수 없었다고 하니, 손님들은 의자 밑에서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무한정 맞으면서 앉아있어야 했다고.
식탁 앞의 연못을 따라 오르페우스 동굴에 들어서면 중앙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의 신 넵튠(Neptune)의 동상이 눈에 띈다. 그런데 동상 발 밑에 쇠로 만들어진 사람 얼굴 마스크가 재미있다. 턱 밑에 물이 차면 수압에 의해 혀와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도록 만들어졌다. 당시 대주교의 익살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동굴 바로 오른쪽으로는 ‘노래하는 새의 동굴’이 있다. 깊은 숲 속의 동굴을 연상시키는 매우 낭만적인 곳이다. 안내자가 손잡이를 조작하면 갑자기 환상적인 새의 지저귐 소리가 들린다. 물의 압력을 받은 기계장치에서 나는 소리라고 한다.
동굴을 나와 관광객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은 인형극장이다. 이 극장은 중세 조그만 마을의 생활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인형들이 물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점. 각 인형에 연결된 무대 아래의 작동기가 물의 압력을 조절하는 기계에 연결돼 있어, 물의 흐름이 변할때마다 인형이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 인형들이 움직이면서 생기는 소음을 없애려는 듯 매력적으로 울려퍼지는 오르간소리가 들린다. 이 역시 수압에 의해 작동된다.
‘왕관의 동굴’에 이르면 분수 위로 조그만 왕관이 놓여 있다. 스위치를 조작해 물줄기의 높이를 조절하면 왕관이 마치 춤추듯 아래위로 움직인다. 동굴을 나올 때 양 옆에서 솟아오르는 물과 앞쪽에서 솟아오르는 물이 거의 모든 방문객들의 옷을 적시게 한다.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 잔잔한 수면을 이용한 거울효과
스페인의 복잡하고 시끄러운 그라나다 시내를 벗어난 언덕길을 따라 알함브라 궁전의 입구에 이르면 길 양쪽의 작은 도랑에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신선함을 전해준다. 아랍이 이 지역을 지배하던 13-15세기에 지어졌기 때문에 궁전의 형태는 아랍 양식을 따랐다. 물이 적은 지대에 살던 아랍인들에게 물은 매우 소중한 것이어서 물을 다루는 그들의 손길은 매우 정성스럽고 정교하다. 르네상스의 건축물과 비교하면 장식물을 위해 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 자체를 위해 장식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가능한 장식이 없이 물의 자연적인 특징만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알함브라 궁전에는 두가지 형태의 연못이 있다. 첫째 직사각형 모양의 장식이 없는 물통 형태다. 연못을 구성하는 모든 평면마다 가로와 세로의 비가 1:5로 구성돼 있어 단순하면서도 조화로운 느낌을 준다. 아랍인의 성서 ‘코란’에서 “물은 신성하고 귀중한 액체”라고 표현돼 있다. 그래서 연못의 크기와 깊이는 부의 상징을 의미한다.
이 연못의 가장 큰 특징은 잔잔한 수면을 이용한 거울 효과. 주위의 건물과 나무가 반사돼 보여지는 모습은 알함브라 궁전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든다. 연못에 들어오는 물은 이 거울 효과를 방해하지 않도록 거의 움직임 없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또다른 연못은 장식을 갖춘 긴 직선 형태의 수로다. 궁전 한쪽에 위치한 여름 별궁이 그 예다. 몇개로 나눠진 긴 수로 형태의 연못과 원형의 분수가 기하학적으로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푸른 하늘이 물위에 비춰짐과 동시에 주위의 많은 꽃들이 함께 거울 효과를 이루어 마치 현란한 색으로 꾸며진 동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또다른 형태로 물의 움직임을 연출하는 것은 수로다. 대표적인 예가 사자 동상 위에 받쳐진 분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방향으로 뻗은 십자수로(十字水路). 각 방향에서 원형의 배수구를 통해 흘러나온 물이 중심에 모여 분수로 뿜어지는 형상이다.계단 양옆에 설치된 수로도 관람객들을 즐겁게 한다. 계단의 경사를 이용해 물이 떨어지거나 졸졸 흐를 때 다양한 종류의 물의 화음을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