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부터 6월초까지 전북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앞바다에서 12세기경 고려청자 2천3백여점이 대량 인양됐다. 우연히 한 어부의 눈에 뜨여 그 존재가 확인된 비안도 앞바다의 고려청자. 비안도 앞바다는 말 그대로 청자의 보고(寶庫)였다.
2002년 4월 25일, 고려청자 확인 사실이 언론을 통해 처음 세간에 알려지자 전문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까지 확인된 청자는 4백50여점.
조사와 인양을 맡았던 문화재청은 “이들 청자는 인근 전북 부안군에서 제작돼 줄포항을 출발해 고려 수도인 개경으로 운송되던 중 비안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그리곤 “앞으로도 상당량의 청자가 확인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언론과 세간의 관심은 빠른 속도로 증폭됐다. 어떤 고려청자이고 그 가치는 어느 정도인지, 또다른 보물들은 없는지, 혹 보물선이라도 가라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등.
소라 대신 찾아온 고려청자
국내외 고고학사에 길이 남는 발굴은 우연에 의한 경우가 많다. 충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도 그렇고 중국의 진시황릉이나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발견도 우연이었다. 공주 무령왕릉은 1971년 여름 장마에 대비해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고분의 천정 벽돌이 인부의 삽 끝에 걸려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진시황릉은 1974년 봄 중국 섬서성 서안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발견됐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도 마찬가지. 1879년 여름, 한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어린 딸과 함께 스페인 알타미라의 한 동굴을 탐험하던 중 동굴 속 구덩이에 빠진 딸을 구하기 위해 밧줄을 타고 구덩이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벽화를 발견했던 것이다.
이번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앞바다 해저 유물 발견 역시 우연이었다. 4월 6일 오전 11시경, 전북 부안군 변산면에 사는 어부 조동선씨는 자연산 소라를 채취하기 위해 후배 2명과 함께 9t짜리 소형 저인망어선을 타고 비안도 앞바다로 나갔다. 조씨는 잠수복을 입고 수심 20m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 뻘 여기저기를 뒤지고 있었다. 잠수 경력 20년의 조씨였지만 이날 어로 작업은 올들어 처음이었다. 그러나 30여분이 지나도 소라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운이 없나보다 하고 돌아갈 생각을 하던 그의 눈앞에 무언가 푸른빛이 번득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릇들이었다. 폭 4-5m, 길이 30여m의 뻘 표면에 그릇들이 죽 드러나 있는 것 아닌가. 원하던 소라는 보이지 않고 그릇만 보이다니, 조씨에겐 그리 반가울 게 못됐다. 순간 인근 부안 지역에 고려시대 가마터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려청자?’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쳐갔다. 조씨는 1시간 동안 개펄에 드러난 그릇들을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건져 올린 청자는 2백43점에 달했다.
며칠 뒤 조씨는 고려청자 일부를 들고 원광대 박물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그 그릇들이 12세기경의 고려청자라는 사실과 함께 이를 문화재청에 신고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곤 곧바로 문화재청에 이같은 사실을 신고했다.
방조제 건설의 부산물
신고를 받은 문화재청은 4월 중순 문화재청 산하기관인 전남 목포의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의 학예직을 중심으로 수중탐사팀을 조직해 긴급 탐사를 실시했다.
수중탐사팀은 긴급 탐사과정에서 해저지층탐사기, 수중음파탐지기 등 첨단장비를 동원해 청자의 존재 여부를 조사했다. 해저지층탐사기는 해저에 음파를 발신해 지층 또는 해저에 묻혀 있는 물체로부터 반사되는 음파를 수신하는 장비다. 이 음파는 부딪히는 사물에 따라 반사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대략 퇴적층인지 암반인지, 난파선이 목재인지 금속인지 등을 판단할 수 있다. 반사 지점을 체크해 그 곳을 집중 조사하게 되는 것이다.
수중음파탐지기는 음파를 사용해 해저면과 그곳 침전물의 대략적인 윤곽을 그래프로 표시함으로써 전체적인 모양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장비다. 해저지층탐사기가 주로 해저 지층 속을 조사하는 것이라면 수중음파탐지기는 주로 해저 표면에 노출된 것들을 판단하는 기기다. 해양유물전시관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청자가 비안도 동쪽 1km 지점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7m, 동서로 30여m에 걸쳐 분포돼 있음을 확인했다.
현장 위치를 확인한 문화재청은 수중 인양에 앞서 군산해양경찰에 의뢰해 이곳 주변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혹 도굴꾼들이 잠입해 몰래 바다 속 청자를 훔쳐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간 진행됐던 전남 신안 앞바다 해저 유물조사 때 이같은 사태가 발생한 적이 있다. 1976년초에도 한 어부가 어로작업 도중 중국 도자기와 고려청자를 건져 올렸다. 그는 신안군청에 이를 신고했지만 군청에서는 “바다에서 무슨 청자가”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 삽시간에 고려청자가 나왔다는 소문이 퍼졌고, 서울에서 전문 도굴꾼들이 잠입해 유물들을 빼돌린 것이다.
비안도 앞바다 현장 경비를 강화한 수중탐사팀들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유물을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수중 인양은 과거 수중조사 경험이 있는 해양유물전시관 학예직들이 맡았다. 당시 긴급 탐사에서 건져 올린 청자는 뻘층 표면으로 노출된 것들이다. 바닥이 뻘이라고는 하지만 호미가 부러질 정도로 단단해 뻘층을 파내고 청자를 인양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따라서 해양유물전시관측은 일단 해저 표면에 노출된 것만 수습했다.
그렇게 2백11점의 고려청자를 추가 인양했다. 조씨가 처음 발견한 2백43점까지 합하면 그때까지 총 4백54점을 인양한 것이다. 문화재청과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4월 25일 이를 언론에 공개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수습된 고려청자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퇴적층으로 덮여 있었다가 최근 인근의 새만금 방조제 건설로 인해 물살이 빨라져 해저의 퇴적층이 4-5m 깊이로 깎여나가면서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추후 본격조사를 통해 해저 뻘층 밑에 묻혀있는 청자까지 인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발굴인가 인양인가
문화재청의 본격조사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번 작업이 발굴인가 인양인가에 관해 말해야겠다. 군산 앞바다에서의 고려청자 인양 사실이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4월 25일 이후, 많은 언론이나 사람들은 고려청자 수중 발굴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번 조사작업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발굴일 수는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인양이지 발굴이 아니다. 발굴로서의 요건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고학에서의 발굴은 단순히 땅 속에 묻혀있는 것을 찾아내는 차원을 넘어선다. 지상에서의 발굴을 보면, 유물이 발견된 지역과 주변지역의 배치 구조, 유물 각각의 위치 등을 일일이 실측해 도면으로 남긴다. 또한 발굴은 단순히 유물을 찾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유적을 보존하고 언제라도 그것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도록 유지해야 한다. 이 모든 요건을 충족할 때 발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청자 인양은 이와 다르다. 유물이 위치한 구역을 조사하기는 했지만, 고려청자 각각의 위치를 일일이 확인해 도면에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조사지역은 해저라는 특성상 다시 복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띠라서 이번 조사는 발굴이라고 하기엔 기본적인 발굴 요건에 미흡한 점이 많다. 냉정하게 말하면 바다 속에서 청자 하나 하나를 깨지지 않게 건져 올린 것이기에, 결국 인양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신안 앞바다 해저 유물 조사의 경우, 그것은 단순 인양이 아니라 발굴이다. 당시 조사에선 도자기나 화폐 등 개별 유물을 건져 올렸을 뿐만 아니라 뻘 속에 묻혀있던 유물선까지 건져 올렸다. 배를 인양하면서 뻘 속에 묻혀있는 배의 위치와 각도 등을 도면으로 작성했고, 바다 속에 남아있는 배의 부분과 각종 부재를 바탕으로 배의 원형을 추론해 복원도를 만들기도 했다. 이 경우는 단순히 청자를 건져올린 이번 비안도 해저 유물 인양과는 분명 다르다.
해군 동원된 청자발굴 전투
일단 긴급 탐사로 한숨을 돌린 문화재청은 이곳에 고려청자가 상당량 매장돼 있을 것으로 보고 5월 15일부터 6월 3일까지 20일간 추가 본격조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문화재청은 전문 다이버 요원이 필요하다고 보고, 해군 해난구조대(SSU)의 지원을 받아 문화재청 해군 공동조사단을 구성했다. 이로써 해난구조대 소속 수중 전문다이버요원 20여명이 가세하게 됐다.
문화재청과 해난구조대는 청자가 발견된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해역인 전북 부안군쪽 바닷가의 민가를 빌려 베이스캠프를 차렸다(비안도 앞바다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군산이지만 거리상으로는 부안과 훨씬 가깝다). 지원 나온 해군 해난구조대의 구조함 3천t급 평택호는 청자 매장 지역에서 1km 정도 떨어진 비안도 남쪽 인근 해상에 닻을 내렸다. 평택호는 일종의 현장본부인 셈이다. 조사단원들은 평택호에 대기하고 있다가 조사시간에 되면 보트를 타고 나가 유물을 인양해 돌아오게 된다.
조사기간 중 5월 15일부터 17일까지 처음 3일은 본격조사를 위한 준비 작업기간이었다. 이 기간 내내 비가 내려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바람은 거세고 앞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준비작업은 수심 15-20m 바다 밑을 바둑판처럼 구획하고 수중음파탐지기, 해저지층탐사기, 수중카메라 등으로 청자와 기타 유물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조사단은 기본조사를 통해 약 30×12m의 범위에 유물이 분포돼 있음을 확인했다. 이 조사 해역에 중심 부표(浮漂, Mark Buoy)를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2×2m 폭으로 만들어진 그리드(Grid, 격자)를 설정했다. 바다 속에 들어갔을 때 그리드 하나하나 별로 청자를 인양하기 위한 구획틀인 셈이다.
그러나 해저유물 인양은 어려움이 많다. 우선 가장 큰 어려움은 인양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돼있다는 점. 유물 인양은 만조와 간조가 멈춘 정조시간(停潮時間)에만 가능하다. 조수의 흐름이 정지되면 바다 속이 비교적 평온해진다. 이 때가 아니고는 유물을 건져 올리는 일이 불가능하다.
이같은 정조 시간은 하루 두차례, 매번 30분에서 1시간 정도. 그것도 날씨가 좋아야 한다. 날씨가 괜찮은 날이라고 해도 하루 두차례 합해 1시간 30분 이상을 넘길 수가 없다. 하지만 기상에 따라 작업이 불가능한 날도 부지기수다. 거의 절반은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바다의 날씨는 이처럼 무섭고 변화무쌍하다. 신안 앞바다 해저 유물 발굴 때는 바다 날씨로 인해 사고가 나기도 했다. 썰물 때 대형 닻을 연결한 기둥이 갑자기 기울면서 지름 8cm의 철제 와이어가 갑판을 덮쳐 한 해군 병사의 엉덩이 살이 뭉텅 떨어져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진공청소기로 뻘층 걷어내
날씨뿐만 아니라 수중 바다 속의 시계(視界)가 불량한 점도 인양 작업의 어려움이다. 서해는 물이 그리 맑지 못해 바다 속에 들어가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비안도 앞바다의 수중 시계는 0.5-1m에 불과하다. 작업할 때 시계는 거의 0m에 가깝다.
해저 뻘층에 묻혀있는 청자를 꺼내는 것도 고난도의 작업이다. 4월 긴급탐사가 주로 해저 표면에 노출된 것을 건져 올리는 것이었다면, 이번 본격조사는 뻘층 아래에 묻혀있는 것까지 인양하는 작업이어서 더 힘들고 더 조심스러운 작업이었다.
실제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 유물이 묻혀있는 뻘은 호미질도 어려울 만큼 단단하다. 따라서 강한 바람을 쏴 개펄을 파헤친 뒤 다이버가 인양한다. 이 때 압축공기관이라는 특수장비를 사용한다. 일종의 수중 진공청소기다. 뻘층 탐사를 위해 탐지봉을 이용하기도 한다. 탐지봉으로 해저 지층 50cm까지 훑으며 유물을 찾아내고 인양한다. 탐지봉이라고 해서 그리 특수한 것은 아니다. 긴 쇠꼬챙이로, 바다 속 뻘층을 찔러가면서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감지하는 도구다. 도자기가 있으면 단단한 물질이 부딪히는 느낌이 전해올 것이다. 그리고 선박의 나무 잔해가 있다면 나무 찌르는 감이 전해올 것이다. 그렇게 해서 뻘층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전문 고고학자들은 이 탐지봉을 육상 발굴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탐지봉을 애호하는 사람들은 도굴꾼이다. 도굴꾼들은 이 탐지봉으로 무덤 등 귀한 유물이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쿡쿡 찔러가면서 땅 속에서 전해오는 느낌으로 무엇이 숨겨있는지 감을 잡곤 한다.
실제 청자 인양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예직의 지휘 아래 해난구조대 소속 전문다이버요원들이 수중에서 유물을 건져 올리는 식으로 진행됐다. 해군 다이버들은 평택함에서 장비를 모두 차린 뒤 정조 시간을 이용해 2인 1조의 두개조씩 보트를 타고 현장에 접근해 인양 작업을 했다. 이들은 사각형의 그물망을 들고 들어가 거기에 청자를 담은 뒤 들어 올렸다. 한 번 현장에서 인양작업을 벌이면 한조당 서너차례 그물망에 청자를 담아 냈다. 본격조사에서 인양한 청자는 약 1천8백여점에 달한다.
인양된 청자는 평택함에서 정리 분류과정을 거친 뒤 곧바로 해양유물전시관으로 옮겨져 탈염(소금기 빼기) 등 긴급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현재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여기서 탈염 등의 보존처리라고 했지만, 사실 도자기의 경우 별다른 보존처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자기는 깨지는 것과 같은 훼손이 없다면 그 속성상 반영구적으로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약이 방수효과를 지니고 있어 물이 새들어 간다거나 하는 우려가 없다.
다만 오랫동안 바다의 짠물 속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깨끗한 물로 세척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이 일종의 탈염 보존처리라고 할 수 있다. 서화류, 석조물, 목조물, 금속공예물 문화재와 달리 도자기는 깨지는 것만 조심하면 보존에 별 어려움이 없는 문화재다.
비안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고려청자는 2천3백여점. 인양된 고려청자는 접시, 대접, 잔 등이 주종이었다. 이 청자는 인근 부안군 유천리 고려청자 가마터에서 발굴된 12세기 청자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12세기 청자로 추정된다. 부안의 줄포항을 떠나 고려 수도인 개경의 관청이나 귀족용으로 공급하기 위해 운반되던 중 배가 침몰해 바다에 가라앉았던 것이다.
문화재는 돈이 아니라 선비들의 정신
이번에 인양된 청자 2천3백여점은 바다에서 확인된 고려청자로는 완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3만여점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양이다. 그러나 이번 청자는 전체 고려청자 속에서 보면 그 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중급에 해당한다. 그리고 청자의 모양도 접시, 대접류에 국한되고 주전자나 항아리 같은 모양의 청자나 상감청자는 발견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사실 언론이 흥분해서 보도한 것과 달리 청자 그 자체로서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은 것이다.
조동선씨가 처음 건져올린 2백여점의 청자를 놓고 청자를 잘 모르는 비전문가들이나 일부 언론이 수십억원대 문화재 운운한 것은 넌센스였다. 이것은 고려청자를 선인들의 예술혼이 담긴 소중한 문화재로 보기보다 청자를 일확천금의 수단으로만 생각해온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번에 인양된 청자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청자 양각 연꽃잎무늬 원통형 잔’이다. 이 원통형 잔에는 입지름 7cm 내외, 높이 8cm 내외의 작은 것들과 입지름 10-12cm 내외, 높이 10cm 내외의 큰 것이 있다. 특히 입지름과 높이가 10cm 내외인 이 큰잔은 찻잔이 아니라 탕잔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이 잔은 전북 부안 유천리 가마터에서만 나왔을 뿐 발견된 예가 드문데다 고려인들이 인삼탕을 즐겨 먹었다는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을 입증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선 아쉽게도 선박의 잔해는 확인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선박의 잔해는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선박을 확인한다는 것은 어렵다. 뻘층을 폭넓게 걷어낸 다음 그 후에 다시 확인하는 작업을 거쳐야하는데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배를 찾아내기까지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또 배가 발견되면 발굴 작업은 더욱 길어지게 된다. 나무로 된 배를 발굴해 인양하는 일은 청자를 건져 올리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렵고 신중한 작업이다. 선박이 발견된 신안 앞바다 해저 유물 발굴의 경우, 9년이란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배 때문이었다.
그 동안 국내의 대표적 수중 문화재 인양조사 및 발굴은 1976-1984년 전남 신안 앞바다 해저 유물 발굴, 1984년 전남 완도 앞바다 고려청자 인양, 1987년 충남 보령 죽도 앞바다 고려청자 인양, 1992년 전남 진도 앞바다 고려 통나무배 발굴, 1995년 전남 무안 도리포 앞바다 고려청자 인양, 1995년 전남 목포 달리도 앞바다 고려 한선(韓船) 발굴 등을 들 수 있다. 이번 군산 비안도 앞바다 고려청자 인양으로 한국 수중 문화재 조사 및 발굴 역사에 또 한장의 하나의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이번 청자 인양을 계기로 수중 문화재 발굴조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관련 전문가들이 늘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고려청자 인양을 마치 금괴 가득한 보물선 찾기 따위로 보는 세간의 풍조, 문화재를 돈으로만 보려는 천박한 세태도 바뀌었으면 하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