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실크로드의 숨결-우즈베키스탄

 

레기스탄 광장^모래의 광장이라는 뜻. 광장의 북쪽을 흘러가는 운하 주변이 모래땅이라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사마르칸트의 중심지.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티리야 카리 메드레세, 오른쪽이 지르 도르 메드레 세, 왼쪽이 울루그베크메드레세이다.


실크로드의 중심 - 사마르칸트

제라프샨 강 유역에 자리한 푸른 6도시 ‘사마르칸트’. 일찍이 유라시아 문화의 용광로였던 이곳은 중앙아시아의 심장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지금은 잡초만 무성한 아프라샤프 언덕에 사마르칸트가 터전을 잡았던 것은 약 2천5백년전의 일이다. 그후 8세기 아랍의 침략에 이어 13세기 칭키스칸이 칩입하면서 사마르칸트는 멸망하고 만다. 그러나 14세기 초원의 왕자 ‘티무르’가 나타나 사마르칸트를 부흥시킨다. 그는 죽을 때까지 35년간을 끊임없는 원정으로 일관했는데,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은 소아시아, 남쪽은 인도 북부, 북쪽은 남러시아 초원지대까지 이르는 대 티무르 제국을 건설했다.

티무르의 시대는 중앙아시아인이 세계를 제패한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가 죽은지 6백년이 지난 지금 “칭기스칸은 파괴했지만 티무르는 건설했다”는 전설과 함께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의 영웅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칭기스칸의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꿈꾸었던 티무르는 자신의 제국에 어울리는 도시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런 뜻에서 만들어진 도시가 바로 사마르칸트이다. 그는 원정지역의 건축가나 예술가를 데리고 와서 사마르칸트 건설에 참여시켰다. 당시 사마르칸트는 인구가 40만명에 가까운 대도시였다.

지금도 그때의 영화를 얘기해 주는 건축물들이 장엄하게 서역하늘을 빛내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중앙아시아 최대의 모스크인 ‘비비 하님 모스크’가 있다. 비비 하님은 티무르의 8명 아내 중 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의 이름이다. 비비 하님을 위해 짓도록 했다는 이 모스크는 티무르 사후 3년째 완성됐기 때문에 정작 티무르 자신은 이 장엄한 예술품을 보지 못했다. 실크로드의 중심지 사마르칸트는 티무르에 의해 휼륭하게 재건됐다.

한편 그의 손자인 울루그베크는 학문을 고양시키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 천문대와 메드레세 등을 건립했다. 열병식이 행해지곤 했던 레기스탄 광장에는 세개의 메드레세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울루그베크 메드레세이다. 메드레세는 이슬람 신학의 강당으로 건축됐고, 후에는 천문학, 수학, 철학 등의 연구소로 이용됐다. 티무르 제국 문화의 원천이었던 곳이다. 현재도 레기스탄 광장에서 행해지는 ‘빛과 소리의 제전’은 티무르 제국의 사라진 영화를 멋지게 재현한다.
 

샤히 진다 묘^아프라사프 언덕 기슭에 있는 이슬람 교도들의 묘지. 샤히 진다란 '살아있는 왕'이라는 뜻. 이곳에는 티무르일가와 울루그 베크의 은사, 자녀 등이 매장돼 있다.


이슬람의 메카 - 부하라

사막에도 등대가 있다. 몇날 며칠 사막을 헤매던 대상들의 불빛이 돼 주던 칼란 미나레트. 칼란이란 페르시아어로 ‘크다’는 뜻이고 미나레트는 ‘첨탑’이라는 말이다. 지금도 탑위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씩, 이슬람의 코란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산스크리트어 ‘뷔하나’(사원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도시 부하라는 사마르칸트에서 서쪽으로 비행기를 타고 1시간정도 거리에 있다. 부하라는 예로부터 중앙아시아 이슬람교도들의 메카였다. 현재 옛 소련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슬람 신학교가 바로 이곳에 있다. 칼란 미나레트에서 내려다 본 부하라 시가지는 흙빛뿐인 도시였지만 아직도 고대 실크로드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다.

부하라의 바자르(노천시장)에는 평일에는 2만명, 휴일에는 10만명이 모여드는데,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상업과 수공업이 번성했던 부하라는 동서 대상무역의 중심지였다. 유럽의 보석품, 중국의 차와 비단, 인도의 설탕이 이곳에서 거래됐다.

우즈베크족들은 캄줄이라는 전통의상을 입는다. 캄줄은 화려한 금자수가 놓여져 예식용 의복으로 많이 팔린다. 실크로드 최고의 거래품목이었던 중앙아시아산 양탄자는 1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곳의 특산물로 인기를 얻고 있다. 희망봉을 거치는 해상 실크로드가 개척되자 무역상들은 사막의 실크로드를 버리고 바닷길을 택했다. 부하라의 바자르도 근대로 들어오면서 집단농장 콜호즈에서 생산된 농산물들의 직거래장으로 변모했다.

부하라시 외각에는 ‘시토라 이 마히 호사 궁전’이 있다. 부하라 마지막 왕이 살았던 여름 궁전으로 3백여명의 후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아시스가 위치한 좋은 길목에 자리잡은 도시의 궁전인 만큼, 이 곳에는 각국에서 상업거래를 위해 온 사신들의 선물로 가득하다. 유럽, 러시아, 중동, 심지어는 중국과 일본의 명품들도 모여들었다.

시와 노래를 사랑했던 민족, 우즈베크 사람들은 '세상만물이 번영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든다'는 그들의 뜻을 '다이라'라는 무용으로 표현하고 있다. 옛 소련에 합병된 이후 70년간 비록 생활면에서 러시아화한 부분이 많지만 이들은 아직도 중앙아시아 민족의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결혼식^서구화가 많이 진행됐지만 그래도 아직 고대 중앙아시아의 전통이 생활 곳곳에 살아남아 있다. 전통의상을 입고 결혼식을 치르고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7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김광근

🎓️ 진로 추천

  • 역사·고고학
  • 문화인류학
  • 미술사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