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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는 속이 부글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손목시계를 본 그는 깜짝 놀라 후닥닥 일어났다. 맙소사 벌써 아홉시라니. 어제 술을 진탕 마신 게 실수였다. 방안을 둘러보니, 딴 사람들은 아직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열시가 넘어야 일어날 게 뻔했다. 그는 서둘러 머리를 감고 넥타이를 대충 매고 나서 여관을 나섰다.

학회가 열리는 건물에 도착하기까지는 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학교 근처에 방을 잡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전시실로 들어섰다. 초췌한 얼굴의 대학원생들이 열심히 포스터를 붙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자기 자리로 갔다.

대충 구도를 잡은 후 준비해온 종이들을 벽에 붙여나갔다. 커다랗게 뽑은 논문 제목을 먼저 붙이고, 서론, 재료 및 방법, 결과, 논의, 참고문헌 등을 배치하고 나자 정확히 아홉 시 반이었다. 그는 옆에 있는 김미영이라는 대학원생의 손을 빌려 넥타이를 제대로 매고 포스터 옆에 섰다.

막상 전시된 자신의 포스터를 보고 있자니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 일년 동안 뼈빠지게 실험한 내용이 이 몇장의 종이에 집약되어 있지 않은가. 일주일 동안 포스터를 만드느라고 밤낮없이 고생했던 일이 떠올랐다.

빨갛고 노란 선명한 색깔의 색상지를 준비하고, 온갖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가장 눈에 잘 띄는 멋진 그림을 그리고, 활자 크기와 체를 고르느라 고심하던 시간들. 초등학교 교실 뒷벽을 꾸미는 것 같던 단순한 일들. 하지만 이곳에 서서 딴 사람들의 엉성한 그림들과 자신의 것을 비교해 보니 정말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다급했던 시간이 지나가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전시실 안을 둘러보았다. 열시가 지났지만 포스터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밤새 술마시고 여관에서 자고 있을 게 확실했고, 일찍 온 사람들은 이층에서 열리는 발표회에 참석했을 것이다. 학회 첫날 오전은 대개 그렇게 지나가는 게 정상이었다.

미영도 지루했던지 밖으로 나갔다가 커피 두잔을 들고 왔다. 그들은 실험이 어떻고 학회 분위기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기 시작했다. 둘 다 석사 일학년이었고 학회 발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화기애애한 대화를 하고 있으려니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다.

그의 포스터 앞에 맨 처음 온 사람은 학회 이사를 맡고 있는 나이 지긋한 교수였다. 영수는 날카로운 질문이 나올까봐 긴장하면서, 예상해 놓았던 질문들을 떠올려 보았다. 교수는 영수의 포스터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뭔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영수의 표정도 밝아졌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목이 정말 멋있구만. 잘 지었어."

"네?"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옆 포스터로 갔다. 거기서도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멍청히 서있는 영수 앞에 타 대학의 대학원생 둘이 다가왔다. 학회에서 몇번 만나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영수의 실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므로 진지한 질문을 던질 게 틀림없었다. 지적인 인상의 여자가 말했다.

"이 그림 정말 아름답네요."

"그렇죠? 데이터가 진짜 깨끗하게 나왔거든요. 실험 방법을 보면 아시겠지만……."

"그게 아니라요. 이 그림 뭐로 그린 거예요? 맥킨토시로 한 것 같은데……."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인터넷에서 받은 프로그램이라고 말해주었다.

다른 질문들도 대부분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색깔이 눈에 확 들어오네요, 미적 감각이 있나 봐요? 난 고딕체를 좋아하는데 이걸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여기 참고 문헌에 마침표 하나가 빠진 것 같지 않아요? 잉크젯으로 뽑았습니까? 난 레이저 프린터가 더 좋던데. 이 문장에서는 주어를 복수로 해야 하지 않나요? 심지어 포스터를 좌측으로 1cm 옮겨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마침내 점심 시간이 돌아왔다. 영수는 자기 실험실 사람들과 해장국을 먹으면서 참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아니, 도대체 학회에 온 겁니까 환경미화 잘 해놨나 보러온 겁니까? 내 실험이 어떤 것인지,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그런 걸 묻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어요. 무슨 학회가 이래요?"

그러나 열을 내는 사람은 영수뿐이었다. 딴 사람들은 그가 떠들거나 말거나 열심히 해장국을 먹었다. 결국 그도 부루퉁한 얼굴로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영수가 조용해지자, 침이 튀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인 채 먹고 있던 석근이가 점잖게 물었다.

"그럼 넌 딴 사람들 실험에 대해 얼마나 아냐?"

영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일년을 했든 십년을 했든 네 실험에 대해 너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실험이란 그런 거니까. 그러니 딴 사람 실험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하지. 여기 온 사람 중에 너와 같거나 비슷한 실험을 하는 사람은 열명도 채 안될 거야. 제대로 질문을 할 사람은 그 사람들밖에 없을 거라고. 그렇다고 딴 사람들이 자기 실험과 상관없다고 네 앞을 그냥 지나치면 어떻겠냐? 좌석이 이백석이나 되는 강당에서 기껏 열명 앉혀 놓고 논문 발표를 한다고 하면?"

영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네게 던지는 엉뚱한 질문도 다 관심이 있어서 하는 거야. 학회란 사람을 만나는 장소 이기도 하니까. 만약 너와 전공이 전혀 다른 사람이 네 실험 결과를 꼬치꼬치 묻는다고 해봐라. 넌 기초 개념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야겠지. 그렇게 하고 싶냐?"

점심 후 영수는 느긋한 마음으로 포스터 옆에 섰다. 질문은 오전과 거의 비슷했다. 간 혹 실험 내용에 관한 질문도 있었지만, 그리 깊은 수준은 아니었다. 영수의 답변도 점차 가벼워졌다.

"이 실험의 목적이 뭡니까?"

박사 과정을 수료한 듯한 사람이 질문을 던졌을 때에도 영수는 가볍게 대답했다.

"서론에 쓰여 있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무성의하군요. 그렇다면 왜 여기 서있죠?"

영수는 아차 싶었다.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가 다시 말했다.

"서론에 나와 있는 질문을 뭐하러 하겠습니까?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질문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가 가고 나자 영수는 이마에 난 땀을 훔쳤다. 정말 창피한 순간이었다. 하필 아무 생각도 없을 때 그런 질문을 할 게 뭐람. 영수는 마음가짐을 다시 새롭게 했다.

그 뒤부터 시간은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지나갔다. 그는 가벼운 질문과 무거운 질문을 가려가면서 신중하게 답변을 했다. 그의 실험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도 몇명 다가왔다. 그는 그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밀리지 않으면서 나름대로의 주장을 전개하기도 했다.

네시가 넘자 학회도 거의 파장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포스터를 보러 오는 사람도 줄어들어서 포스터를 붙인 사람들끼리 잡담하는 시간이 되어 갔다. 영수도 짬이 생길 때마다 미영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역시 중요한 질문은 거의 나오지 않죠? 요즘은 너무 자기 것만 파고드는 경향이 있어요. 학문간의 연계성도 중요한 데 말이죠."

영수가 제법 아는 척을 하자 그녀도 동의했다.

"그래요. 제 실험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비슷한 걸 하는 사람이 있어야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어느 쪽을 더 파고들어야 하는지 토론도 할 수 있을텐데 말이에요."

이야기가 술술 잘 풀려나가고 있을 때 사람들이 몰려왔다. 오늘의 발표가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눈빛이 날카로운 사람이 영수에게 다가왔다. 영수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미국 어느 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사람이었다. 하는 일도 영수와 거의 같았다.

"이 부분은 비약이 있는 것 같은데? 반면 결과는 너무 깨끗하고."

그는 처음부터 매서운 질문을 했다. 다행히도 그건 영수가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답변이 나오자 곧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그는 포스터에 실린 내용을 조목조목 짚어가면서 따졌다. 그 중에는 영수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영수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실험 방향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마침내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새 시간이 흘렀는지, 여기저기서 포스터를 떼어내고 있었다. 영수는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말이 들려왔다. "정말 대단하네."

"감사합니다."

"자네 말고. 자네 지도교수 말이야. 언제 이런 실험을 다했지? 거기다가 자세히 설명할 수 있도록 제자까지 가르치고 말일세."

영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뿌듯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허무한 느낌만이 남았다. 그는 자신이 오늘 왜 여기 서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1997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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