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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운명인가 선택인가

특이한 뇌구조와 게이유전자 밝혀져

요나단, 소크라테스, 사포, 룽 양춘, 성 아우구스티누스, 칼 울리히, 미셸 푸코, 친구사이. 이들을 하나로 묶는 단어는 동성애이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민족 최초의 왕인 사울의 아들이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요나단은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과 사랑하게 된다.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적대적이지만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는 유일하게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소년들의 연인

소크라테스는 여느 고대 그리스인처럼 남색을 지지했다. 오늘날 남색이란 말은 계간 또는 비역이라고 일컫는 남자끼리의 성행위를 뜻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게는 성인과 사춘기를 지난 소년 사이의 성교를 의미했다. 교육을 마친 미소년이 나이든 남자에게 인계되면, 그 남자는 소년의 도덕적 완성을 위해 사랑으로 그를 돌보는 것이 남색관계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소년들의 연인이었을 뿐 아니라 동성애에 도덕적 권위를 부여한 논리를 개발했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게이(남성 동성애자)로 손꼽힌다.

고대 그리스의 여류시인인 사포는 소녀들을 사랑했다. 그녀의 고향인 레스보스 섬에서 유래된 말이 레스비언(여성 동성애자)이다.

중국에서 남자의 동성애는 룽양 또는 단수(斷袖)로 알려졌다. 룽양이란 말은 기원전 4세기 룽 양춘이란 사람이 동성애를 좋아한 데서 유래되었으며, 단수는 한나라 때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황제가 그의 팔을 벤 채 잠든 남자 연인을 깨우지 않으려고 자기 옷의 소매를 잘랐다는 것이다.

여자의 동성애는 어느 정도 유보적이긴 했지만 인정되었다. 단지 나무나 상아로 만든 모조남근의 과용이 문제가 될 따름이었다. 옛날 중국 여자들은 모조남근의 양쪽 끝을 두 여자의 질 속에 삽입한 다음에 명주 끈으로 허리를 동여매고 뒹구는 방법으로 동성애를 즐겼다.

교부철학을 완성한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한때 동성애에 빠졌으나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는 종족보존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모든 성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의 견해는 가톨릭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쳐 훗날 성직자의 독신제도가 확릭되었다.

독일 변호사인 울리히(1825-95)는 1867년 동성애는 선천적인 성향이므로 조물주로부터 받은 본능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색법의 폐지를 요구했으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동성애자의 인권운동을 처음으로 전개한 게이이자 동성애자임을 당당하게 밝힌 최초의 인물로 기록된다.

프랑스 철학자인 푸코(1926-84)는 에이즈로 병사한 세계 최초의 저명인사이다. 게이는 한때 에이즈 확산의 주범으로 지탄받았으나 그들에게서 먼저 발견되고 사회문제가 되었을 뿐 그들이 발병시킨 것은 아니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모두 에이즈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친구사이'는 1993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동성애자 모임인 초동회가 게이와 레스비언으로 분리될 때 조직된 최초의 게이 단체이다. 레스비언은 '끼리끼리'를 만들었다. 이들은 1995년 6월 대학의 동성애 동아리인 서울대의 '마음 001', 연세대의 '컴투게더'와 함께 동성애자들의 인권운동을 펼쳐나갈 협의체를 발족시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 밖에도 큰 족적을 남긴 동성애자들은 한둘이 아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추앙하는 문화적 영웅들의 다수가 게이들이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프란시스 베이컨, 오스카 와일드, 랭보, 마르셀 프루스트, 차이코프스키, 비트겐슈타인, 니진스키….

범죄자 아니면 정신병자로 몰려

동성애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경멸과 금지의 대상이었으나 성 풍습에 따라 용인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자의 동성애가 인정되지 않았지만 남색을 포함한 남자의 동성애는 찬미되었다. 게이들은 항문성교나 대퇴부 성교를 했다. 같은 연령층의 남자들은 항문성교를 즐겼지만 남색의 경우에는 성인과 소년이 마주서서 소년의 사타구니에 성기를 끼우고 사정하는 방식으로 넓적다리 성교를 했다.

로마에서는 황제들이 대부분 성적으로 난잡한 생활을 했지만 그리스에서처럼 남색에 대한 찬미는 없었다. 가톨릭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 동성애는 교회법에 의해 죄악으로 간주되었다.

동성애는 수음이나 피임처럼 조물주가 허용한 성교의 본래 목적인 종족보존과는 무관한 탐욕적인 성행위이기 때문에 성경의 계율을 어긴 범죄로 본 것이다. 가령 4세기에는 동성애자에게 세례를 해주지 않았으며, 7세기에는 게이의 네가지 성적 기교에 대해서 상호수음은 20-40일, 대퇴부 성교는 2년, 음경에의 구강성교인 펠라티오는 4년, 그리고 항문성교는 7년의 참회를 선고했다. 그러나 성직자에 대한 독신생활의 강요로 그들사이에 동성애가 일반화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경직시킨 일을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위대한 철학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74)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동성애가 하느님뿐만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도 부자연스러운 죄악임을 강조했다. 그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14세기부터 동성애자들은 서방의 교회와 국가 어디에서도 피난처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16세기 초 영국의 헨리 8세는 남색을 사형의 중죄로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동성애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범죄로까지 낙인이 찍힌 것이다. 한때 영국에서는 살인보다 남색으로 처형된 사람이 더 많았다.

성과학의 여명기인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사정이 극적으로 달라졌다. 동성애를 범죄적인 성향 대신에 정신질환의 증세로 보게 된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성적 일탈행위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를 통해, 동성애를 유아 시절의 성적 환상에서 비롯된 병리학적 상태라고 주장했다. 3-6살 사이에 경험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아이는 성인이 되어 동성을 성적 대상으로 선택하는 성욕도착자가 된다는 것이다.

동성애가 치료될 수 있고 반드시 치료되어야 하는 질병으로 간주됨에 따라 수많은 게이들이 정신분석, 거세, 호르몬 요법, 전기충격 치료, 뇌 수술 따위의 연구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의술이라는 미명 하에 동성애자들에게 신체적 및 정신적 피해를 입힌 행위는 범죄에 버금가는 인권침해라는 지적이 없지 않다.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 14세기 이후 서방의 교회와 국가에서 동성애자들이 발붙일 곳이 없을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 요구

20세기에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성풍습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나라에 따라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우선 독재국가들은 동성애에 대해 가혹했다. 독일 나치스는 동성애자들을 집단수용소에서 학살했다. 공산주의 정권에서는 동성애를 퇴치하는 일이 공산당 정책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소련은 스탈린 시대에 동성애를 중형으로 처벌했으며 쿠바에서 카스트로는 1960년대부터 극단적인 박해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영어권 국가에서는 동성애를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 알프레드 킨제이(1894-1956)가 1948년과 1953년 두차례 발표한 '킨제이 보고서'를 계기로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편견이 완화되었다.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오로지 게이로 평생을 일관한 남성은 4%, 오르가슴을 수반한 동성애의 경험을 적어도 한차례 가진 적이 있는 남성은 37%이었다. 여자의 경우는 다소 비율이 낮았는데, 1-3%가 오로지 레스비언으로 일관했으며 13%가 동성과의 성행위에서 적어도 한번 오르가슴을 맛본 것으로 나타났다. '킨제이 보고서'의 정확성을 놓고 논란이 많았지만 미국은 동성애에 대해 유달리 적대의식이 강한 나라였기 때문에 높은 비율의 동성애 선호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1969년 6월에는 스톤월(Stonewall) 폭동사건이 터져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스톤월은 뉴욕 중심가에 소재한 게이 전용 술집인데, 경찰이 단속하는 과정에서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일반시민들이 레스비언을 연행하는 경찰을 돌멩이로 공격하면서 시작된 폭동은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다음날 다시 불붙은 전투에는 2천명을 넘는 동성애자들이 가담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동성애자들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스톤월 폭동은 울리히가 점화한 게이 해방운동이 1백여년 만에 만개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하나의 전설이 된 이 사건을 계기로 동성애자의 존재는 언론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의 관심사로 자리 잡았으며 동성애자들은 인권 회복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74년12월 미국 정신병학회는 공식적으로 동성애를 정신질환의 목록에서 삭제했다. 가톨릭 이후 서방문화에서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부당하게 유린해온 쇠사슬이 끊기는 순간이었다.

정신병의 굴레에서 벗어난 동성애자들은 본격적인 커밍 아웃(coming out)을 시작했다. 커밍 아웃은 글자 그대로 밀실 밖으로 나와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떳떳이 밝히는 행위를 뜻한다. 그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취업, 결혼, 군복무에서 이성애자와 동등한 법률적 권한을 요구하고 나섰다. 1975년 미국 연방정부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취업 거부를 하지 못하게 했다. 결혼의 경우, 가까운 장래에 적어도 몇개 주에서는 이성애 부부와 똑같은 권리를 동성애 부부에게 부여하는 법률이 제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의 군복무 금지를 해제하는 문제는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1994년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동성애자들의 시위. 자신들을 에이즈 확산의 주범으로 모는 일에 항의하는 모습이다.


게이 될 운명 타고 나는가

동성애의 원인에 관해서는 극단적인 두 견해가 대립하고 있는데, 하나는 동성애 성향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동성애를 성장과정의 결과로 본다. 한마디로 전자는 동성애를 선천적인 운명으로, 후자는 후천적인 선택으로 간주한다.

동성애를 종교적 차원의 죄악, 극형으로 다스려야 되는 범죄 또는 치료 가능한 질환으로 여기는 입장은 물론 후자에 속한다. 후자의 견해를 가진 쪽에서는 동성애를 성적으로 문란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선택으로 보기 때문에 경멸하고 박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를 개인의 선택으로 보는 견해는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1990년대부터 동성애의 생물학적 근거를 밝히려는 연구가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는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뇌에서 발견되는 구조적 차이를 관찰하는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유전적 요인이 동성애에 영향을 미치는 증거를 찾아내는 연구이다.

1991년 8월 영국 태생의 신경과학자인 사이먼 리베이 박사는 게이와 이성애 남자의 뇌 구조에 차이가 있음을 처음으로 밝혀내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에이즈로 죽은 19명의 게이를 포함해서 이성애 남자 16명, 여자 6명 등 41명의 뇌를 검시했는데, 시상 하부의 간핵(INAH) 네개 중에서 세번째 것의 크기에 차이가 현저함이 밝혀진 것이다. 호두 크기만한 시상하부는 성욕을 제어하는 영역이다. 제3간핵은 이성애자의 것이 게이보다 두배 가량 컸으며 게이와 여자는 그 크기가 같았다.

같은 해 12월 심리학자인 마이클 베일리와 정신병학자인 리처드 필라드는 일란성 쌍둥이의 한쪽이 게이라면 다른쪽도 게이가 될 확률이 높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동일한 유전자 전부를 공유한 일란성 쌍둥이는 57%가 둘다 게이인 반면에 유전자의 절반을 공유한 이란성 쌍둥이는 24%가 둘다 게이로 나타난 것이다. 한쪽이 게이일 경우에 일란성 쌍둥이가 이란성 쌍둥이보다 게이가 될 확률이 두배 이상 높은 셈이다.

이어서 1992년 여름 여자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일란성 쌍둥이의 한쪽이 레스비언일 때 다른쪽이 레스비언이 될 확률은 50%, 이란성 쌍둥이는 16%로서 일란성 쌍둥이가 몯두 레스비언이 될 가능성은 이란성 쌍둥이보다 3배 이상이었다. 이들이 실시한 두차례의 쌍둥이 연구는 태어날 때 유전적으로 결정된 상태가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일부 동성애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설득력있게 보여준 통계치로 평가되었다.

1993년 분자생물학자인 딘 해머는 성염색체에서 게이 형제들이 공유한 유전자의 위치를 발견하고 게이 1호(GAY-1)라고 명명했다. 게이 유전자의 존재는 제3간핵의 차이 못지 않게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학계는 물론이고 저널리즘의 최대 화제가 되었다. 해머는 리메이처럼 게이이다.
 

게이들의 결혼식. 이들에게 이성애 부부와 똑같은 권리를 부여하자는 움직임이일고 있다.


친절한 게이 삼촌

해머의 게이 유전자 발견은 그의 방법론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고, 해머 자신조차 게이 유전자를 발견했던 당시의 연구를 완벽하게 되풀이하지 못해 빈축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성애가 유전적 요인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이론은 논쟁의 여지없이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성애 유전자의 존재는 또다른 의문을 제기한다. 자연선택은 종의 번식에 이익이 되는 형질을 선호한다. 따라서 번식과 무관한 동성애 유전자는 자연선택될 리 없다. 요컨대 동성애 유전자는 진화론에서 볼 때 파라독스가 아닐 수 없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동성애 유전자의 존재를 '친절한 게이 삼촌'(kind gay uncle)가설로 설명한다. 이 가설은 자연선택이 개체보다는 혈연들의 차별적인 생존을 위해 작용한다고 주장하는 혈연선택이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남자의 동성애는 자신의 가족을 만드는 것보다는 형제의 자녀 양육을 돕는 쪽이 더욱 적합한 남자들이 취하는 최선의 진화 전략이다. 직접 여자와 유대관계를 맺어 자신의 자식을 낳는 것보다는 자신과 상당량의 유전 물질을 공유한 가까운 친척이 아이를 더 많이 갖도록 지원하고 그 아이들이 생식기능한 연령까지 성장하도록 도와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확산시키는 방법을 최선의 전략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게이를 자식이 없기 때문에 조카에게 헌신적인 삼촌에 비유하는 까닭이다. 요컨대 동서애는 개체의 직접적인 번식을 삼가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혈연의 생존과 번식에 기여하게 되므로 자연선택되어 그 유전자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나라 동성애자들의 짝짓기 무대로 소문난 서울 탑골공원 뒷편의 낙원동에 나가서 게이를 붙들고 친절한 삼촌 노릇을 잘 하고 있는지 한번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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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인식 과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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