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 그렇기 때문에 유전자의 비밀을 샅샅이 알게 되면 인간을 비롯한 생물체의 모든 생명현상을 파악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거의 모든 질병을 예방·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유전(자)적 결정론에 대해 고민해 보자.
인류는 신석기시대를 연 농업혁명과 근대 초의 산업혁명에 이어 세번째의 혁명을 맞고 있다고 한다. 이 세번째 혁명이 한편으로는 정보화혁명일 수 있고, 또 다른 면으로는 유전공학혁명일 수 있다.
최근 몇해 동안은 정보화사회에 대한 논의에 눌려서인지 유전자조작 등 유전공학에 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뜸한 편이지만, 유전공학 쪽이 장기적으로 봐서 인류사회와 전 지구에 미칠 영향이 더 클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유전공학혁명이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체의 존재 질서에 심대하면서도 거의 영구적인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869년 미셔가 발견한 디옥시리보핵산(DNA)이 유전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1940년대였다. 그리고 잠시 뒤인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힘에 따라 유전공학은 급속한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됐다. 그 뒤 자기복제와 단백질합성이라는 유전정보의 발현과정이 알려지고, 또 유전자재조합기술, 세포융합기술, 핵치환기술이 개발되고 정교해짐에 따라 유전공학은 생명과학의 꽃으로 각광을 받게 됐다.
1990년대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게놈프로젝트가 목표대로 인간의 모든 유전자 구조를 밝히게 되는 날 인류는 신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힘을 이용해 암을 비롯한 모든 질병을 근본적으로 예방·치료할 수 있게 되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반면에 그러한 힘을 기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전망, 인간이 그 신적(神的) 능력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견해도 대두하고 있다. 그러나 유전공학의 미래가 어떻든 간에 유전공학은 이미 항생물질, 인터페론 등의 의약품과 성장호르몬, 인슐린 같은 호르몬의 대량생산, 또 품종개량 같은 농학이나 육종학에 깊숙히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유전공학 연구가 저절로 인간에게 장미빛 미래를 가져다 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전공학은 그 괴력(怪力)을 기술적·도덕적으로 적절하게 관리해야만 하는, 매우 부담스러운 과제를 인류에게 짊어지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전공학 연구를 무조건 금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유전공학 연구는 의학과 농학 등 많은 분야에서 인류에게 상당한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밀려오는 제 3의 혁명
최근 들어 '정신분열증 유전자' '자살유발 유전자' '동성애 유전자' '치매유발 유전자' 등이 거론되면서 '이상이 있는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대체하는 유전자 전이기술' '병든 유전자를 찾아내 이를 제거하고 교정해 주는 유전자 치료법'에 관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이 있거나 병든 유전자와 정상 유전자의 판별 기준은 무엇일까? ‘이상’과 ‘정상’, ‘병든 상태’와 ‘건강한 상태’에 관한 논의는 과학과 의학, 그리고 철학의 역사를 통해 줄곧 언급돼 왔지만,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결코 해결되고 있지 못한 문제이다.
‘이상’과 ‘정상’, ‘병든 상태’와 ‘건강한 상태’라는 것이 사회적 제 관계나 인간(집단)의 인식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성립될 수 있다면, 또는 사회적 제 관계나 인간의 인식에서 자유로운 ‘순수한’ 과학기술의 힘으로 판별 가능한 것이라면 그러한 기술과 치료법이 존재 근거를 당당히 확보하게 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유전자 수준의 ‘이상’과 ‘정상’, ‘병든 상태’와 ‘건강한 상태’ 역시 객관적 실체라기보다는 사회적 제 관계와 인간의 인식 등 가치에 따른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개체 전체에 대한 것과 똑같은 생각이 유전자 차원에서도 여전히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유전공학과 분자생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그 스스로가 판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오늘날의 유전학적 결정론 논의의 주춧돌을 형성하고 있는 유전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생명현상의 ‘본질’이며 알파요 오메가인가, 아니면 생물현상과 관련되는 물질적 기초이고 재료일 따름인가?
이와 관련해서는 환원주의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환원론이 곧 결정론은 아니지만 결정론이 도출되는 ‘방법론’(혹은 인식론)으로서, 더 나아가 ‘존재론’으로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체들의 집단은 개체로, 그것은 다시 조직계통으로, 다시 세포로, 다시 세포를 구성하는 생물분자를 제조하는 설계도로서의 유전자로 환원될 수 있는가? 즉 ‘하위 단위’에 대한 이해가 ‘상위 단위’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온전히 해명할 수 있는가? 아니면 상위 단위는 하위 단위로 구성되고 그것의 제약을 받지만 상위 단위는 나름대로의 특성과 논리를 갖는 것인가?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물분자는 두 개의 수소원자와 한 개의 산소원자로 구성돼 있다’라는 진술이 ‘물분자의 특성은 두 개의 수소원자와 한 개의 산소원자가 나타내는 특성의 합이다’ 혹은 ‘수소원자와 산소원자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물분자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검은 피부 유전자’≠‘검은 피부’
'정신분열증과 관련되는 유전자가 5번 염색체에 있다'라는 진술(A)이 곧바로 '그 유전자의 발현이 정신병이다'라는 사실 (B)로 치환될 수 있는가? 또는 '동성애와 관련되는 유전자가 있다'라는 진술(A)이 '그 유전자의 발현이 곧 동성애이다'라는 사실 (B)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한 관련 유전자의 존재 여부도 확실하지 않지만, 설사 있다 하더라도, 현 단계에서 진술(A)을 사실(B)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만저만한 비약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만 이데올로기적으로 가능한 선택일 따름이다. 인종에 따르는 피부색깔과 같이 일견 단순해 보이는 현상에서도 ‘흰 피부 유전자 = 흰 피부’, ‘검은 피부 유전자 = 검은 피부’의 등식이 부인된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가장 간단한 혈액형의 경우에도 유전정보가 그대로 발현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행동’이라는 복합적 현상의 특성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많은 단계와 과정을 뛰어넘어 유전자와 행동을 직접 결부지으려는 것은 대단한 도박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전자 결정론과 관련해 문화의 기원과 전승에 대한 문제를 거론해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서의 문화는 생물들의 생존 양태로서의 일반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만이 가지고 있으며 의식이 개입한다고 흔히 여겨지는 인간의 문화이다.
문화가 생물학적·유전적으로 결정되고 기원하는 것이라면 그 전승은 유전자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반대로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문화의 기원과 전승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필자로서는 유전자에 의한 문화 기원과 전승의 증거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두 번째 질문, 즉 그 밖의 어디에서 인간 문화의 기원과 전승 메커니즘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20세기 들어 유전공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생명의 비밀을 많이 밝혔고, 그 지식은 의학분야에 실제로 활용되면서 인류의 건강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양상과 오늘날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건대 적어도 당분간 유전공학의 발전이 지속되리라고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전공학이 인류의 진정한 힘으로 작용하려면 앞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우선적으로 해명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도 인간복제 등 유전공학의 무한한 활용에는 여전히 윤리·도덕적인 측면이 남게 될 것이다.
환원론이란?
어떤 실체의 성질을 설명하는 것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의 성질로 표현가능하다는 주장. 예를 들어 사람의 유전자의 구조를 알면 인간의 성격과 질병을 모두 설명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추, 젓갈, 고춧가루의 맛과 향기를 다 안다고 해서 그것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지는 배추김치의 오묘한 맛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환원론의 맹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