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프로세서(CPU)는 컴퓨터의 성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부품이다. 그런데 최근 엄청난 속도를 지닌 마이크로프로세서들이 속속 출현하면서, 컴퓨터의 기능도 놀라울 만큼 다양해지고 있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초고속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살펴보면서 각각의 제품들의 특징들을 알아보자.
"너 이번에 컴퓨터 샀다며? 그래 어떤 걸로 샀니?"
“응, 최근에 새로 나온 건데 펜티엄III 500메가야.”
흔히 컴퓨터를 구분하는 첫번째 기준은 CPU라고 불리는 마이크로프로세서(컴퓨터 프로세서)다. 컴퓨터를 살 때 삼보, 삼성, LG 등과 같은 메이커 이름을 말하지 않고 어떤 프로세서를 장착했는지를 묻는 것은 컴퓨터 프로세서가 성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부품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프로세서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발달해왔다. 10년 전에 비해 그 속도는 25배 이상 빨라져, 컴퓨터의 기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만일 자동차가 컴퓨터 프로세서만큼 발달했다면 접었다 폈다 하는 것은 물론,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등장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컴퓨터 프로세서는 사실 인텔이라는 회사의 제품이다. XT로 알려진 8086으로부터 286, 386, 486에 이르기까지 인텔은 컴퓨터 프로세서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덕택에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486 이후에 나온 프로세서를 586이니 686이니 하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을 가진 프로세서는 없다. 인텔은 경쟁업체들마저 486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자 다른 회사제품과 구분하기 위해 엄청난 홍보비용을 들여 486 이후에 등장한 프로세서에 ‘펜티엄’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이후 인텔은 프로세서마다 새로운 이름을 붙였는데 셀러론이나 제온, 펜티엄II, 펜티엄III 등이 그것이다.
더욱이 인텔은 강력한 시장점유율을 무기로 ‘인텔 인사이드’라는 캠페인을 펼쳐 마치 인텔 제품을 쓰지 않는 것은 ‘가짜 컴퓨터’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여기서 ‘인사이드’란 인텔 프로세서가 내장됐다는 뜻. 이는 대성공이었다. 때문에 인텔은 독점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무섭게 쫓아오는 후발업체들을 유유히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텔이 그렇게 여유를 부릴 처지는 못된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인텔과 경쟁하는 곳은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경쟁업체는 AMD.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지난 2월 이 회사의 K6라는 프로세서가 장착된 PC가 인텔의 펜티엄이 장착된 PC보다 3.9%나 더 많이 팔려 판매량 부문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AMD의 프로세서는 성능면에서 인텔에 버금가지만 가격이 더 싸기 때문에, 1천달러 미만의 PC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AMD 외에 인텔의 대표적인 경쟁업체로는 경영난 때문에 지금은 내셔널 세미컨덕터라는 반도체회사에 통합된 사이릭스(Cyrix)와, 전자출판과 그래픽 시장을 주름잡는 매킨토시에 사용되는 파워PC 프로세서를 만든 모토롤러가 있다. 이들은 인텔에 맞서 꾸준히 신제품을 내 놓고, 저렴한 가격의 PC를 원하는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사실 프로세서 시장에서는 종종 ‘전쟁’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치열한 판매전이 펼쳐져 왔다. 시장점유율이 높고 경험이 많은 인텔이 앞서 신제품을 내놓으면 AMD나 사이릭스 같은 회사들이 곧이어 더 싼 가격의 경쟁제품을 발표한다. 그러면 인텔은 다시 가격인하를 단행하는 동시에 새로운 프로세서에 대한 개발계획을 밝혀 소비자들이 경쟁사 제품을 구입하지 못하도록 한다.
덕택에 소비자들은 신제품이 발표된 후 조금만 기다리면 훨씬 저렴해진 가격으로 제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실제로 지난 2월 말 발표된 펜티엄III 450MHz의 가격은 80만원대였으나, 4월 15일 현재 용산상가의 평균 유통가격은 60만원대로 떨어졌다.
이러한 인텔의 판매전략에 맞서 경쟁업체들이 살아남으려면 신제품 개발주기를 앞당겨 인텔과 동시에 새로운 제품을 발표하면서 더 싼 가격으로 판매하는 수밖에 없다. 사이릭스는 이를 이기지 못해 다른 회사로 넘어갔지만, AMD는 인텔과의 격차를 꾸준히 줄여 지금은 저가형 PC부문에서 판매 1위를 달성했다(물론 미국 얘기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소비자는 저렴한 프로세서를 구입할 수 있지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워낙 새로운 제품들이 빨리빨리 나오다 보니 구입한지 얼마되지 않아 금방 고물이 되고, 그나마 새 제품들은 이전 제품과 다른 방식을 채택한 탓에 업그레이드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제품 수명이 너무 짧아 신제품을 빨리 사는 사람이 손해보는 이상한 세상이 된 것이다.
더욱이 업체들은 새 제품을 발표하면 으레 이전에 나온 제품은 마치 못쓸 제품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소비자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프로세서를 잘 모르면 업체광고에 현혹되거나 매장 판매원의 말에 설득당하기 쉽다. 또 굳이 필요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싼 제품을 사거나, 자신의 용도에 걸맞지 않는 제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아무리 컴퓨터를 몰라도 프로세서는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텔의 펜티엄 Ⅲ
지난 2월 28일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펜티엄III프로세서는 3차원 그래픽 기능과 인터넷 기능을 강화한 인텔의 최신 작품이다. 4월 중순 현재 국내에는 450MHz(60만원대), 500MHz(90만원대)의 두 제품이 주로 유통되고 있다.
펜티엄III는 발표 전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제품마다 고유번호를 부여해 사용자를 식별할 수 있게 한 기능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전자상거래 사이트에 접속하면 그 사이트에서는 접속된 컴퓨터와 이를 사용하는 사람의 신상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자의 고유번호를 요구하는데, 펜티엄III가 이를 보내주는 기능을 갖춘 것이다.
인텔은 이러한 기능을 내장해 전자상거래 등에서 발생하는 아이디 도용 등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이 기능은 미국 등을 중심으로 사생활 침해라는 반발을 샀다. 결국 인텔은 이러한 기능을 일반 소비자들이 직접 켜고 끌 수 있도록 만든 후 신제품을 출시해야 했다. 그래서 처음 출시될 때는 이 기능은 꺼져 있다.
개발 당시 캣마이(Katmai)라는 코드명으로 불렸던 펜티엄III는 속도가 조금 높아진 것 외에 펜티엄II와 별다른 것이 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인텔은 인터넷과 멀티미디어에 적합한 새로운 명령어들이 추가됐기 때문에 펜티엄II에 비해 최고 74% 이상 성능이 향상됐다고 주장했다.
펜티엄III의 가장 큰 특징은 오디오, 비디오 등 멀티미디어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명령어들이 추가되고 데이터 입출력 속도를 전반적으로 향상시킨 것. SIMD(Single Instruction Multiple Data)는 인터넷 회선속도에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그래픽 파일과 소리 파일의 재생능력을 높이는 기능이다. 게임이나 화상회의처럼 멀티미디어 데이터를 많이 처리하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때 펜티엄III는 이전 제품에 비해 확실히 향상된 성능을 보여준다.
SIMD에는 70개의 새로운 명령어가 포함돼 있다. 예전에 인텔은 펜티엄 프로세서 이후에 MMX(Multi Media Extension)라는 프로세서를 발표했는데, 이는 멀티미디어 데이터를 처리하는 보조 명령어들을 담고 있었다. SIMD는 MMX의 확장판인 셈이다.
문제는 SIMD를 지원하는 소프트웨어가 실행될 때만 비로소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같은 클럭(흔히 Hz로 표현되는 컴퓨터 내부시계)의 펜티엄II와 펜티엄III를 비교하면 SIMD를 지원하지 않는 소프트웨어를 실행시킬 경우 성능은 동일하다. 아직까지는 펜티엄III를 지원하는 소프트웨어가 적으므로 펜티엄III를 구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펜티엄III의 또다른 특징은 메모리 스트리밍 기술이다. 일반적으로 컴퓨터에서 데이터를 처리할 때 어떤 명령어가 입력되면 메모리로 데이터를 불러들인 후 프로세서에 전달된 명령어로 데이터를 처리한 다음 다시 하드디스크로 돌려보낸다. 이 과정에서 프로세서의 처리속도가 메모리에서 데이터를 가져오는 속도보다 빨라 일종의 병목현상과 지연현상이 발생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캐시’라는 임시 메모리를 사용하는데 메모리 스트리밍 기술은 캐시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기술로 그 성능을 10% 정도 향상시켰다.
이외에도 MPEG2라는 압축된 동영상을 재생할 수 있는 명령어가 추가돼, 차세대 동영상 포맷으로 각광받는 DVD를 소프트웨어만으로 재생할 수 있고 음성인식 같은 분야도 더욱 활성화시킬 전망이다. DVD는 뛰어난 화질, 최대 8개국 음성과 32개국어의 자막을 동시 내장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재생장치의 가격이 비싸 제대로 활성화되지 못했는데 펜티엄III가 대중화되면 자연스레 활성화될 전망이다.
AMD의 K6-3와 K7
AMD는 인텔의 가장 강력한 도전자다. 486 시절부터 인텔의 뒤를 이어 치열하게 저가 호환제품을 생산해왔다. 최근에는 펜티엄의 강력한 경쟁제품인 K6가 큰 인기를 끌어 지난 2월 1천달러 미만의 PC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현재 AMD의 주력제품은 K6의 기능을 향상시킨 K6-2이고, 최근 펜티엄III에 맞서 K6-3를 발표하고 인텔 추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인텔은 펜티엄II부터 기존에 사용하던 PGA(Pin Grid Array)방식의 소켓을 포기하고 슬롯방식을 채택했는데, AMD는 여전히 소켓방식을 고수해 인텔 사용자들이 프로세서만 바꿔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장점유율을 높였다. 또한 소켓의 활용방법을 개선해 소켓방식이 슬롯방식보다 처리속도가 느리다는 단점도 해결했다.
AMD는 인텔의 MMX나 SIMD에 맞서 3DNow!라는 기술을 제공한다. 이것은 기존의 MMX 명령어에 21개의 3D처리 명령어를 추가한 것이다. 물론 SIMD와 마찬가지로 소프트웨어가 3DNow! 기술을 지원할 때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AMD는 400MHz의 K6-3가 펜티엄III 450MHz보다 성능이 우수하다고 주장해 가격대 성능비를 자랑한다. 발표 당시의 제품가격은 400MHz는 2백84달러, 450MHz는 4백76달러. 그러나 아직 국내에서는 유통되지 않는다.
규격상으로 보면 K6-3가 펜티엄III의 경쟁제품이지만, 사람들은 지난해 가을 컴덱스쇼에서 발표된 K7에 더 관심을 보인다. 기본속도는 500MHz로, AMD의 계획에 따르면 2000년 중으로 1GHz짜리 제품이 발표될 전망이다. 펜티엄III가 5개의 명령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데 비해 9개의 명령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어 같은 속도에서도 효율이 그만큼 우수하다.
문제는 K7 역시 슬롯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기존의 인텔의 슬롯방식과는 다르다는 것. 결국 K7 전용 마더보드가 얼마나 나오느냐에 따라 보급률이 좌우될 전망이다. K7은 올해 중반부터 본격 생산될 예정이며 고속제품의 경우 하반기 이후에나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사이릭스의 Mxi와 M3
사이릭스는 AMD보다 더 저렴한 가격의 프로세서로 저가시장을 노리는 업체. 회사가 내셔널 세미컨덕터로 인수되면서 잠시 개발이 주춤해 AMD처럼 활발하게 경쟁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나, 233-300MHz 속도의 M2에 이어 M3 시리즈를 기획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사이릭스의 저가전략은 M2에서 드러나듯이, 233MHz M2의 용산유통가격은 5만원, 300MHz는 5만3천원 정도로 같은 급의 인텔제품보다 30%나 저렴하다.
사이릭스 제품의 단점은 일반 응용프로그램에서는 인텔이나 AMD와 별 차이가 없지만 멀티미디어 프로그램에서의 처리속도가 크게 떨어진다는 점. MMX나 3DNow! 같은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사이릭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카이언 코어라는 기술을 개발했고 이를 내장한 신제품을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다. 99년 5월에 선보일 Mxi가 이를 내장한 첫번째 제품. 처리속도는 대략 300-400MHz 수준이며 소켓7을 지원해 현재의 소켓7 사용자를 집중 공략할 계획이다.
사이릭스도 AMD와 마찬가지로 주목받는 제품은 앞서 언급한 K7과 동급인 M3 프로세서다. M3는 아직 확정된 명칭은 아니며, 잘라페노라는 코드명으로 불리고 있다. 99년 4분기에 발표될 예정인 이 제품은 최대 600MHz 속도로 동작할 전망인데, 8개의 명령어를 한번에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펜티엄 Ⅲ는 가을 이후에나
어쨌거나 인텔은 현재까지의 여세를 몰아 여전히 프로세서시장에서 우위를 보일 것이다. 현재 펜티엄III의 가격은 60만원 이상으로 아직은 구입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다. 인텔은 올 가을쯤 펜티엄II를 단종시키고 펜티엄III의 판매에 주력할 예정이어서 2000년부터는 본격적인 펜티엄III의 대중화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또한 펜티엄III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SIMD 기술을 채택한 소프트웨어들이 올 여름 이후부터 등장할 전망이다. 펜티엄III를 구입하려면 가을 이후로 미루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펜티엄III의 본격적인 경쟁제품인 K6-3, K7, M3 등이 올해 말에 선보일 예정이고, 인텔은 경쟁제품이 출하됨과 동시에 가격을 크게 내리는 관례를 보면 가격적인 면에서도 당장 제품을 구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속도는 어떨까? 현재 가장 많이 팔리는 프로세서는 300-400MHz 대의 제품들. 그러나 가을 이후에는 최고 600MHz에 이르는 고속제품들이 선보일 것이다. 현재 인텔은 펜티엄III의 뒤를 이어 최대 800MHz의 속도를 낼 코퍼마인이라는 프로세서를 개발 중이다. 이 제품은 99년 후반에 모습을 드러낼 전망이다. 600MHz의 사이릭스의 M3와 K7 1GHz도 샘플이 출하될 것으로 보여 2000년부터는 600MHz 이상의 프로세서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1999년 중반 이후로 접어들면 PC 업그레이드 열풍이 불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2000을 포함해 오피스2000 등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대거 출시할 것이고, 이러한 소프트웨어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현재 주력을 이루고 있는 200MHz 이하의 PC들은 어떤 형태로든 업그레이드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