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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SF애니메이션

핵전쟁의 폐허속에 움튼 절망과 희망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기회가 되었다. 1백71편이나 되는 세계 각국의 영화 중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인 오오토모 카츠히로의 ‘메모리스’(Memories, 1995)와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1995)는 수많은 영화광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1970-80년대, 우리가 어린 시절 TV에서 보고 자란 만화영화들이 대개 일본만화들이었고, 지금 열광하고 있는 ‘드래곤 볼’이나 ‘슬램덩크’ 역시 일본 만화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나마 일본만화에 대한 동경과 향수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엄마 찾아 삼만리' 나 '미래 소년 코난', '마징가Z' 를 보며 동심을 키웠던 우리들에게 '이웃집 토토로' 나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가 얼마나 친숙하게 느껴졌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암암리에 일본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복사해서 돌려 보거나, 어설픈 편집과 더빙으로 덧칠된 작품들을 열심히 시청하는지도 모른다.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핵폭탄의 피해를 입은 유일한 나라로서, 그리고 지금은 미래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경제 대국으로서 갖게 된 독자적인 경험으로 인해 ‘SF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 동안 비정상적으로 유통되고 은밀하게 즐겨왔던 재패니메이션에 대해 이제는 우리들의 시각을 다시 하고, ‘진지한 만화보기’를 시작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한다. 여기 소개되는 몇 편의 일본 SF 애니메이션 속에는 우리가 다른 문화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일본인들의 독특한 세계관과 미래관이 담겨 있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일본 SF 애니메이션 속에서 고민하고 추구했던 ‘미래에 대한 전망’들이기도 하다.

과학의 위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폐허의 절망을 처절하게 경험했던 일본인. 전쟁의 폐허 속에서 문명을 다시 일으키고, 이제는 현대 사회의 폐단을 누구보다 절박하게 느끼고 있는 일본인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 그것은 비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저 편의 일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래소년 코난


또다른 애니메이션의 세계

일본 애니메이션의 아버지, 데츠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1963)은 일본 최초의 본격 SF 애니메이션이다. 데츠카 오사무는 만화가들은 물론, 일본 사람들 모두가 아버지처럼 떠받드는 인물인데, 전쟁의 폐허와 패전의 침울한 사회분위기에서 일본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아톰’은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히트한 작품이다. 정직한 마음과 일곱가지 초능력을 지닌 아톰은 항상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슬퍼하지만, 그럴수록 정의와 선을 위해 싸운다는 설정에서 ‘전쟁이 아닌 휴머니티를 통한 세계화’라는 일본의 자기반성과 또 다른 형태의 우월주의를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의 일본 만화영화를 있게 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첫 연출작 TV 시리즈 ‘미래소년 코난’(1978년, 26개의 에피소드)에는 그가 줄곧 추구해온 희망적인 미래관이 잘 나타나 있다. ‘미래소년 코난’은 초자력 병기에 의해 멸망한 인류 중에서 소수의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그린 알렉산더 게이의 SF소설 ‘남겨진 사람들’을 새롭게 각색한 작품이다. 옛 문명을 간직하고 있는 인더스트리아(Industria)와 그에 대항하는 코난과 라나의 모험을 그린 ‘미래소년 코난’은 희망의 공동체인 하이하바를 제시하면서 문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는 거대 산업 문명이 붕괴된 후 가까스로 살아남은 부족이 유독가스를 뿜어대는 괴물과 맞서 싸우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작품은 환경 문제같은 심각한 미래사회의 병리현상을 다루고는 있지만, 따뜻한 시선만은 잃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말로 경계해야 할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는 마지막 반전의 메시지가 더욱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재패니메이션들은 핵전쟁과 같은 문명의 위기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문명 건설을 소재로 다루면서, 어떻게 올바른 문명을 다시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전후에 다시 일어서야만 했던 일본인들의 고민이기도 했으리라.

문명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심오한 주제가 담겨 있는, 그래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SF 애니메이션은 단연 ‘왕립 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안노 히데아키 감독, 1987)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비견될 만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애니메이션은 유인 인공위성의 발사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통해 ‘인류의 문명’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담고 있다.

무대는 지구가 아닌 다른 시간대의 다른 우주에 속해 있는 행성. ‘오네아미스’란 공화국과 제국으로 나누어진 양진영에서 제국측 국명이다. 주인공들은 오네아미스의 국민들이다. 여기서 ‘왕립 우주군’은 냉전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목적으로 이용되던 나사(NASA)같은 조직이다. 그러나 우주 진출을 위해 설립된지 20년 동안 단지 몇 대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을 뿐, 계속되는 유인 우주선 발사의 실패로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과 함께 잊혀져 가는 조직이다. 주인공인 21살의 시로츠그는 공군이 되고 싶었지만 성적이 나빠서 할 수 없이 우주군에 지원한 뒤 무위도식하고 있다. 여주인공 리이쿠니는 종교에 편집증적으로 몰두하는 가난한 여성으로, 정신적 충격으로 퇴행현상을 보이는 마나라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산다. 우주군의 장군은 전쟁에 휘말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군인이 되어 버린 신념 없는 인물이고, 시로츠그의 동료들도 모두 냉소적인 낙오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시로츠그는 현실에 저항하는 리이쿠니에 끌리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변해간다. 어린 시절부터 날고 싶다는 꿈을 간직해 온 시로츠그에게 유인 우주선 계획은 꿈의 실현이며, 결국 그는 자신의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줄거리다.

‘왕립 우주군’은 신으로부터 불을 탈취함으로써 저주를 받은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맞물려 있다. 이 만화영화에서 ‘유인 우주선’은 곧 현대적 의미의 ‘불‘이며, 신의 저주는 제국과 공화국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불이 인간 불행의 씨앗이 되었던 것처럼 오네아미스의 고위 정치인들과 공화국 측 정부는 우주선을 이용하여 전쟁을 일으키고자 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정치가들의 권력욕을 위해 철저히 희생당하는 인간의 가치를 묻고, ‘인류의 문명이 전쟁을 낳는 것인가, 전쟁이 문명을 낳은 것인가’라는 딜레마를 던진다. 그것은 오네아미스의 문제이면서 곧 우리의 문제다.

영화는 마나의 되찾은 미소와 시로츠그의 기도로 끝을 맺는다. ‘불‘이 인류에게 죄악의 원인이면서 또한 문명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유인 우주선’은 전쟁의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인류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기도 한 것이다. 시로츠그의 기도 역시 신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지상의 인류를 향한 기도라 할 수 있다.

왕립 우주군은 비로소 자신들만의 신념과 의지로 인류의 희망을 짊어지고 우주로 웅비하는 진정한 오네아미스의 날개가 된 것이다. 불을 제대로 사용해서 인류의 날개를 달자는 ‘왕립 우주군’의 메시지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불‘의 의미를 되새기지 못해 인류사에 오점을 남긴 장본인들의 만화였기에 더욱 그랬던 것은 아닐까?

이번 부산 국제영화제 참가작인 ‘메모리스’는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과 함께 2대 SF애니메이션으로 꼽히는 ‘아키라’를 연출한 오오토모 가츠히로의 작품이다. 3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의 이 애니메이션 역시 하나같이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왕립우주군-오네아미스의 날개' 의 여러장면들. 만화판 '스페이스오딧세이' 라는 평을 받을 만큼 인류의 문명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담고 있다.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이

제1화 ‘그녀의 추억’(Magnetic Rose)은 ‘로렐라이 언덕’의 전설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우주 쓰레기를 청소하는 우주선에 어느 날, 푸치니의 ‘나비부인’에 나오는 아리아가 울려 퍼지며 우주선은 이상한 마력에 휩싸이게 된다. 그들이 도달한 곳은 만질 수도 없는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오페라 하우스와 오페라 여가수의 대저택. 알고 보니 그 곳은 한때 뭇남성들을 사로잡았으나 자신을 배반한 단 한명의 연인을 용서하지 못해, 오페라의 아리아와 홀로그램으로 우주선들을 유인해서 난파선을 만들면서 몇 백년이나 살아온 프리마돈나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 추억 속에 자신을 가두고, 사람들을 ‘저마다의 추억’으로 홀리며 살아가는 여인의 최후를 통해 관념의 바다에 갇혀 자멸한 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 2화 ‘최취병기’(Stink Bomb)는 과학자와 정치가, 군인들의 무자비한 결탁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될 수 있는가를 넘치는 유머로 풍자한 애니메이션이다. 제약회사의 연구소에 근무하는 다나카는 어느 날 비밀리에 개발중인 약품을 감기약으로 착각하고 복용한다. 그 약품의 정체는 군의 의뢰로 비밀리에 개발되고 있던 세균병기로, 이 약품을 복용한 자가 내뿜는 숨을 맡으면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즉사하게 되는 치명적인 생화학 무기였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인간 병기 다나카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쓰러지는데도 바보스러우리만치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대도시 도쿄로 향한다. 한편 다나카의 도쿄 진입을 막기 위해 자위대는 작전을 펼치지만 멋모르고 돌진하는 다나카를 막을 수가 없다. 약품을 노리는 미국군의 특수부대까지 얽히게 되는데,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마지막 반전이다. (과연 어떻게 끝날까?)

대량 살상이 가능한 생화학무기 개발이라는 문제를 위트 있고 날카롭게 묘사한 이 작품은 옴 진리교의 지하철 살인사건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마지막 에피소드 ‘대포의 거리’(Canon Fodder)는 독특한 스타일과 색채감각으로 일본의 내면을 재현한다. 영화는 단지 전쟁을 수행중인 어느 미래의 이동도시에서 전쟁을 위해 살아가는 소년의 하루다. 매일매일 적의 도시를 향한 포격이 반복되고, 학교는 학생들을 훌륭한 포격수로 양성하기 위해 교육하고, 여자들은 포탄제조공장에서 쉴새없이 작업해야 하고, TV와 라디오는 매일같이 포격의 성과와 전쟁상황을 방송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도시에서 훌륭한 포탄사수를 꿈꾸며 살아가는 소년의 하루가 담담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전쟁이 일상이 되어 버린, 그래서 왜 전쟁을 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는 소년의 섬뜩하리만치 멍한 눈동자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 우리는 전쟁의 후유증을 읽는다. 진지하고 장엄한 작품에서 가벼운 코메디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만화에는 핵폭탄의 경험으로 인한 상처가 얼룩져 있고, 지진의 피해망상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어느 나라든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기야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에게 있어 희망찬 미래는 더욱 절실한 것이리라. 현실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장르인 애니메이션에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일본의 현실과 그들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

일본(Japan)과 만화영화(Animation)를 합성시켜, 일본에서 만들어진 만화영화(만화책, TV용 시리즈 만화영화, 비디오용 만화영화, 극장용 만화영화)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특징이 권선징악과 해피 앤딩, 아기자기한 드라마, 전형적이며 단순한 캐릭터, 음악과 그림의 조화, 교훈적인 주제라고 한다면, 재패니메이션의 특징은 무한한 상상력, 개성적인 캐릭터, 정교한 디자인, 사실적인 묘사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애니메이션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보여왔던 일본의 SF 애니메이션은 만화를 단지 '아이들을 위한 움직이는 그림동화' 정도로 여겼던 디즈니와는 달리, 다양한 작화 양식과 중첩적인 서사 구조 속에 도전적이며 진지한 주제들을 담고 있어 어른들도 열광하고 있다.

● 제 1화 그녀의 추억(Magnetic Rose)


제 1화 그녀의 추억(Magnetic Rose)


화려했던 오페라 가수가 애인에게 배반당한 뒤, 장미꽃 모양의 행성에서 지나가는 우주선을 유인한다. 그녀의 무기는 우주선원들의 기억. 선원들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이키며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몇백년전에 죽은 사람.

● 제 2화 최취병기(Stink Bomb)


제 2화 최취병기(Stink Bomb)


주인공 다나카는 심한 감기에 걸려 주위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자 상사의 방에 가서 '샘플' 이라 써있는 약을 감기약으로 알고 먹는다. 그런데 그 약은 다나카의 호흡을 독가스로 만든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죽는지 모르는 다나카는 연구결과를 들고 도쿄로 향한다. 다나카를 막기 위해 드디어는 미국특공대가 투입되는데, 마지막에 다나카는 미군 복장으로 사령부에 나타난다.

●제 3화 대포의 거리(Canon Fodder)
 

제 3화 대포의 거리(Canon Fodder)


전쟁 중인 미래의 어느 도시. 도시 전체가 대포로 이뤄졌다. 사람들은 모두 철모를 쓰고 생활하고, 모든 일상 생활이 전쟁을 위한 것이다. 소년은 대포를 쏘는 포수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훌륭한 군인이 되길 꿈꾸며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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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정재승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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