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잊어버리는 증상이 왜 나타날까. 기억 장애의 원인과 증세는 무척 다양하고 복잡하게 표현된다.
30-40대의 젊은 주부들이 집에서 자꾸 깜빡 깜빡 잊어버려 고민이 된다고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들은 혹시 자기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을까 또는 기억 기능에 커다란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려한다. 그러나 이들의 걱정은 대부분 기우에 불과하다. 주부들이 겪는 건망증은 주로 가벼운 심인성인 경우지 뇌에 심각한 이상이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주부들은 많은 집안일을 생각하다가 또는 기분이 조금 우울해질 때 잠시 이전에 하던 일을 잘 잊어버리는데, 이런 증상은 금방 회복된다.
하지만 기억 기능에 심각한 장애가 있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치매, 섬망, 외상 후 머리손상에 의한 기억상실, 그리고 알코올이나 약물에 의한 기억상실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증상들은 병이 아닌 증세와 구별되기 어려워 전문가의 판단을 필요로 한다. 여
기서는 기억 기능에 비교적 심각한 장애가 오는 경우들을 살펴보자.
치매 원인만 70여가지
80대 노인 20% 걸려, 우리나라는 알코올성 치매가 주류
고등학교 과학선생으로 일하던 61세의 한 남성은 자신이 즐기던 자전거타기를 이유 없이 기피하더니 평소 다니던 길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기억해야 할 사항을 일일이 메모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져 결국 그는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그후 집에서 잡동사니들을 이 방 저 방으로 가지고 다니다 숨겨놓으며 시간을 보냈으며, 세수하거나 옷을 입는 일에도 도움을 받아야 했다. 치매 증상을 보인 대표적인 사례다.
치매는 정상적으로 성숙한 뇌가 후천적으로 외상이나 질병에 의해 손상 또는 파괴된 현상을 말한다. 이때 기억, 지능, 학습, 언어 등의 정신기능이 전반적으로 서서히 감퇴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보인다. 치매의 영어 표현인 ‘dementia’는 라틴어 ‘dement’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정상적인 마음에서 이탈’ ‘정신이 없어진 상태’라는 의미를 가진다. 무척 포괄적인 개념인 셈이다.
치매는 주로 노년기에 많이 생긴다. 한 통계에 따르면 65-80세 노인의 약 5-7%, 80세 이상 노인의 약 20%가 치매에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노인층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노인성 치매에 걸린 사람도 급증하는 추세다. 그래서 치매는 환자 자신은 물론 가정과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인식되고 있다.
치매의 원인이나 증상, 그리고 임상적 경과는 매우 다양해서 치매를 분류할 때 신경병리학적 소견에 의한 분류, 원인에 따른 분류, 병의 진행에 따른 분류 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치매의 원인은 무려 70여가지나 된다. 주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치매로는 뇌세포가 죽어가는 알츠하이머형 치매, 뇌 혈관이 막히거나(뇌경색) 터져버리는(뇌출혈) 일이 누적돼 걸리는 혈관성 치매, 알코올성 치매, 외상성 치매 등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알코올성 치매 환자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이 관찰된다. 오랜 기간 동안 다량의 알코올을 섭취하면 아주 심하지는 않지만 전반적인 인지기능의 장애가 나타난다. 이런 환자의 뇌를 관찰하면 뇌가 전반적으로 심하게 위축돼 있다는 점이 발견된다. 한편 최근 급증하고 있는 각종 산업재해나 교통사고로 인해 머리에 외상을 입어 걸린 치매도 무시할 수 없이 늘어나고 있다.
과학자들은 치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분자생물학, 신경인지학, 지역사회의 역학(疫學)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정확한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는 상태다.
급성적 착란 증세, 섬망
극단적인 행동 변화 일으켜
당뇨병을 앓고 있는 45세의 여환자가 응급실로 왔다. 그녀는 3일 전부터 정신이 혼돈스러워지기 시작했으며,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불안스러워 했다. 입원 당일에는 불안감을 억제하지 못하고 집을 뛰쳐 나가 차도로 뛰어들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시간과 장소를 거의 깨닫지 못했다. 주의력이 많이 떨어져 의사와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검사 결과 그녀는 당뇨약을 먹지 않아 병이 심해져 있었다. 입원 후에는 멍한 상태로 하늘을 쳐다보거나 소리를 치며 난동을 피우는 등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의식의 혼탁’(clouding of consciousness)이 급성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섬망(Delirium, 일시적 정신착란)이라 한다.
섬망 증세가 나타나면 집중력과 지각력에 장애가 와서 기억장애, 착각, 환각, 해석 착오가 일어난다. 또 사고의 흐름이 지리멸렬해 체계가 없어지며, 말이 토막나기 쉽다. 심지어 불면증이나 과수면증, 악몽, 가위눌림 등의 현상까지 나타난다.
섬망 증세의 특징은 극단적인 변화가 많다는 점이다. 사람들과 얘기할 때 안절부절하거나 바쁘게 움직이다가 갑자기 가만히 아무 말 없이 있기도 한다. 또 보통 사람보다 공포를 훨씬 많이 느끼거나 슬픈 일에 전혀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섬망의 원인은 그 증세만큼 다양하다. 전신에 병균이 감염됐을 때, 뇌에 산소 공급이 잘 안될 때, 혈액에 당분이 모자를 때, 간장이나 신장에 질환이 있을 때, 뇌세포의 각종 대사과정에 관여하는 필수비타민 티아민이 모자랄 때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섬망 증세가 나타난다. 약물에 중독됐거나 금단 현상이 나타날 때 순간적인 정신착란이 일어나는 것도 섬망의 일종이다.
자신도 못깨닫는 건망증후군
만성음주가 주범
50세의 변호사가 기억력 감퇴를 호소하며 병원을 찾았다. 환자는 5개월 전 교통사고를 당해 뇌진탕으로 2주간 입원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고 전에는 법전을 거의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고 항상 자신감에 차있었다.
그러나 사고 이후 약속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고 과거에 외웠던 사건 판결 내용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약속 시간을 항상 수첩에 메모를 해두고 1시간마다 확인해야 했으며, 자신이 변호할 내용도 일일이 적어놓아야 했다. 이처럼 의식이 혼탁해지지 않고 지적 기능도 정상인데 장기기억이나 단기기억에 장애가 나타나는 현상을 건망증후군이라고 한다. 어느 사건이 일어난 시점 이전(선행성 건망증)이나 이후(역행성 건망증)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다.
앞의 사례와는 달리 이 증후를 가진 대부분의 환자는 자신의 기억장애에 대해 깨닫지 못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건망증후군은 대체로 갑자기 발병해 만성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심해지면 사람이 좀처럼 감동받는 일이 없어지고 정서적으로 온화해진다.
건망증후군의 가장 흔한 원인은 티아민의 결핍과 만성적 음주다. 이외에도 머리에 외상을 입거나 뇌에 산소 공급이 잘 안될 때, 그리고 머리 수술 이후의 후유증도 원인이 된다.
한편 건망증후군이 심해지면 심한 기억장애를 나타내는 코자코프 건망증(Korsakoff’s Amnesia)에 걸릴 수 있다. 티아민의 결핍이 심해지면 나타나는 증상이다. 병원에서 장기간에 걸쳐 치료를 받아야 할 경우다.
우울증환자 위협하는 가성치매
병 없어도 치매와 증세 비슷
부인과 아파트에서 살던 75세의 한 남성이 부인이 자궁암으로 사망하자 1년 정도를 집밖에 나오지도 않고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매일 소주 1병을 마셨다. 아들이 찾아가보니 환자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병명을 ‘우울증’으로 진단하고 치료를 시작했다. 2개월 후 우울증 증상이 호전되자 대소변 가리기는 물론 입원비를 스스로 계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성치매의 한 사례다.
가성치매(Pseudodementia)는 뇌에 별다른 병이 없으면서도 치매와 비슷한 증세를 나타낸다. 특히 치매처럼 장기기억이나 단기기억 능력 모두가 사라지게 된다. 대부분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잘 나타나며, 드물게는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는 사람에게 발견된다. 일반적인 치매에 비해 급성적으로 발병되며 경과가 짧아 가성치매에 걸린 사람은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 적응을 잘하는 편이다. 하지만 환자 개인은 이 증상을 무척 고통스럽게 느낀다.
일반적으로 우울증환자들의 기억력은 정상인보다 못하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단기기억과 장기깅거 모두가 정상인보다 낮게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었다. 새로운 언어 학습과 이야기한 내용을 회상하는 능력도 낮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우울증 자체가 곧바로 가성치매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기억 장애의 단계별 진행
일반적으로 기억에 장애를 일으키는 과정을 3단계로 나눠보면 잠재증상 노출기, 조기 발전기, 후기 발전기로 구분된다. 각각의 경우를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잠재증상 노출기
주변의 환경이 변할 때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다. 70세의 한 여성이 영국에 사는 딸집에 방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해외 여행길에 올랐다. 그녀는 영국에 도착한 후 식구들과 반갑게 해후하고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시차를 이기지 못해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2-3일간 시내를 구경하러 돌아다니던 중 그녀는 점차 흥미를 상실하고 멍하니 차안에만 앉아 있으려 했다. 그 다음부터는 집밖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방안에서 TV채널을 반복적으로 돌렸다. 이후 그녀는 정확한 날짜와 요일을 혼동하기 시작했으며 귀국할 날짜도 기억하지 못했다. 급기야 분명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행동을 보였다.
■조기 발전기
평소에 익숙하게 하던 일에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다.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58세의 한 남성은 약 6개월전부터 물건을 팔고 돈계산에 실수를 보였다. 이후 실수한 회수가 증가해 하루에도 여러번 손해를 보다가 최근 1달 전부터 부인에게 셈을 맡기고 병원을 찾았다.
여러가지 난이도를 가진 문제를 보이며 그 남성에게 풀어보게 했다. 그러나 비교적 난해한 문제들을 제외하고는 웬만한 문제는 정상인의 수준에서 풀어냈다. 커다란 이상 증세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은 것이다. 환자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 부인하지는 않았다.
■후기 발전기
일상 생활에 문제가 있을 정도로 기억 장애가 심해진 경우다. 14년 전 공무원직을 은퇴한 이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내온 69세의 한 남성이 있었다. 약 5년 전부터 건망증이 시작되더니 2년 전부터 심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계산력만큼은 자신있었지만, 자꾸 계산이 잘못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다 1년 전부터 집 멀리 혼자 나가면 돌아올때 집을 찾지 못해 전화로 자식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6개월 전부터 손자들을 잘 알아보지 못했고, 3개월 전부터는 점차 이유 없이 불안해 하며 방에서 서성거렸다. 급기야 1개월 전부터는 부인과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이유없이 신경질과 화를 잘 내며, 식사를 흘리고, 세수나 양치질들을 잊고 지내는 등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억지로 그를 병원에 데리고 와 치료를 받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