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대국이자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일본에서 새로운 과학교육 바람이 불고 있다. 과학적 소양을 갖춘 시민 교육이 그것. 일본 청소년과학제전은 바로 그 출발점이다.
지난 7월 27-31일 5일 동안 제5회 일본 청소년과학제전 전국대회가 도쿄 과학기술관에서 열렸다. 과학기술관은 아키히토천왕이 얼마 전까지 기거했던 고쿄(皇居)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1964년 개관한 과학기술관이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하나다. 이곳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첨단과학기술과 과학원리를 탐구할 수 있는 각종 시설이 갖춰져 있어 청소년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볼거리와 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보다 일본 과학기술력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준다는 점이 더 크리라고 본다.
과학나라 패스포트
과학제전 행사장에 들어서자 안내원이 패스포트를 건네줬다. ‘과학나라’ 를 여행하기 위해 필요한 여권이다. 패스포트에는 “21세기 주역인 본 여권을 가진 사람에게 아무런 장애없이 여행할 수 있도록 모든 도움을 아끼지 말 것을 관계자에게 요청한다. - 과학제전 전국대회실행위원회”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안에는 10개 코너, 1백50개 실험실의 약도와 간단한 설명, 메모할 수 있는 여백들이 마련돼 있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면서 한발짝 내딛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여학생이 뱀을 들고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자연과 친구가 되는 코너’ 로 10개 코너중 첫 관문이었다.
평소 청소년들은 뱀, 도룡뇽, 가재, 장수풍뎅이 등을 만져볼 기회가 거의 없다. 이 코너는 사라져가거나 평소 접하기 힘든 동물을 직접 만져 볼 기회를 제공했다. 뱀은 변온동물이다. 다리가 없지만 비늘로 기어간다. 하지만 직접 만져보지 않고 그 느낌을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이 코너를 만든 효고교육대학 체험교육연구회의 설명이다.
‘자연과 친구가 되는 코너’ 에는 14개 실험실이 있었다. 돌멩이를 깨서 현미경으로 보석을 찾는 학생들, 석고를 부어 삽엽충 화석을 복사하는 학생들, 우유팩으로 천체망원경을 만드는 학생들 모두가 열심이었다. 누구나 직접 해보는 것이 이 코너의 매력이자 탐구목표였다.
다음 ‘생활과학 코너’ 에 들어서자 비누방울, 플라스틱, 바나나, 풍선 등을 이용해 여러가지 재미있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특히 비누방울 실험실을 운영하고 있는 사토씨의 이야기는 가히 감동적이다. 과학그림책 작가인 그는 지난 20년 동안 비누방울만 연구해 두권의 비누방울 책을 썼으며 비누방울에 관한 많은 특허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금 캐기, 초능력, 과일향 만들기, 마술, 광탄성과 편광필터를 이용해 힘을 색으로 느끼기, 발광 박테리아, 핵분열 실험, 초전도 실험 등 1백50개 실험실을 차례로 둘러보면서 누가 이 많은 실험들과 탐구학습을 만들어냈을까 궁금해졌다.
행사를 주최한 일본과학기술진흥재단 가츠코 차장은 “주로 중고등학교 선생들이 만들어냈지만, 고등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이 참여한 실험실도 상당수가 된다” 고 말했다. 가나가와현에 있는 한 고등학생 물리서클은 자기부상자동차를 비롯해 전기와 자기를 이용한 6개 실험을 보여줬다.
이번 행사를 견학온 류성철선생(‘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 회원, 서울 번동중)은 “이들이 하는 실험에는 독특한 노하우가 있는 것 같다”며 “몇번 자료와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 보며 모방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류선생은 일본에서 3단 물로켓을 만드는 것을 보고 지난 2년 동안 노력했지만 겨우 2단 물로켓을 만드는데 그쳤다. 나중에 3단 물로켓은 일본선생이 10년 걸려 만들었다는 것을 전해듣고 그 노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과학제전은 매일 1만여명의 학생들로 붐볐다. 가츠코 차장은 “이와 같은 행사는 올해 전국적으로 10곳에서 열리며, 과학기술진흥재단의 후원을 받지 않고 행사를 치루는 곳도 17곳이나 된다” 고 말했다.
청소년과학제전에서는 한국 학생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모 출판기업에서 과학탐구기행이란 주제로 학생들을 모집해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한국학생들은 열심히 실험에 참여했고 모두들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웬지 딱했다. 한국 청소년들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국에 와서 과학을 배워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청소년들이 과학제전과 같은 과학탐구학습 현장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청소년과학제전은 일본의 몸부림
일본 청소년과학제전이 탄생하기까지는 요지 다키카와선생(국제기독교대학고등학교)의 공이 컸다. 그는 과학의 즐거움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10년 전 물리선생들과 함께 갈릴레오공방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일본 청소년들은 과학을 싫어한다. 그 원인은 입시에 있다. 학교에선 복잡한 과학이론만 배우고 있으니, 과학에 흥미를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지선생은 우선 청소년들에게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과학공부와 과학의 재미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청소년들은 물론 성인들도 과학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갈릴레오공방은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주부 모임, 어린이 캠프, 청소년 캠프, 나중에는 방송에 출현해 재미있는 과학프로그램을 소개했다. 2-3년 지나자 처음 냉담했던 청소년들과 시민들의 반응이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다.
갈릴레오공방이 고군분투하는 사이 문부성(일본의 교육부)에서는 여기에다 찬물을 끼얹었다. 과학수업시간을 줄인 것이다. 청소년들이 배우기 싫어하는데 굳이 많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때부터 일부 의식있는 시민들과 과학선생들이 일본 과학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들은 문부성이 일본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며 국회를 찾아갔다. 또 그동안 눈을 가리고 있던 각종 학회와 대학교수들도 정부에 탄원서를 올렸다. 결국 이것이 기폭제가 돼 청소년들이 재미를 붙일 수 있는 행사를 만들어내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청소년과학제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학시간은 아직 다시 늘어나지 않았다.
오늘 일본은 청소년들 사이에 이과 진학을 점점 싫어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첨단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일본에게는 21세기의 위상을 위협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과학기술·정보화시대는 무엇보다 효율이 우선시된다. 그러나 성인들에게는 그게 필요하겠지만 청소년들에게는 필요치 않다. 다소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청소년들은 스스로 생각해 보고, 직접 만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96 청소년과학제전 위원장인 야마다씨는 “과학제전은 놀고 즐기기 위해 만든 자리로, 여기서 과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고 말했다.
YSC(Youngster’s Science Center)운동은 청소년이 과학기술에 친한 환경을 만들자는 운동이다. 과학기술을 싫어하고, 제조업을 경시하고, 이과를 가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을 이과계로 돌려놓겠다는 것이다. 청소년과학제전은 바로 YSC운동의 일환이다.
96 청소년과학제전 전국대회장을 맡고 있는 요지선생은 “과학교육의 위기는 일본의 위기” 라고 말한다. “탐구하고 생각하는 것을 잊어가는 일본의 학생들, 입시전쟁으로 몰아가면서 학생들을 암기기계로 만드는 일본의 과학교육은 개선하기엔 너무나 벽이 두껍다” 고 요지선생은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일본은 새롭게 시작하고 있었다. 과학선생들과 시민이 중심이 되고 과학학술단체들이 단합해 청소년과학제전을 계속 확대해 나가고 있다. 또 청소년들의 관심도 늘어가고 있다. 청소년과학제전 참가자들만 살펴보더라도 92년 1만5천명에서 95년 10만명으로 늘었다. 또 3곳에서 실시되던 청소년과학제전이 27곳으로 확대된 것도 뜻있는 과학선생들과 과학기술단체들의 노력이다.
한국과 일본은 많은 면에서 닮은 꼴이다. 많은 청소년들이 입시에 시달리고 과학교육은 갈수록 재미가 없어지고 있다. 또 시민들은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이들 시민들을 위한 과학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도 없다.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과학교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듯이, 한국의 미래 역시 지금의 과학교육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지난 7월 동아일보·과학동아가 주최했던 청소년 과학놀이경연대회는 ‘신과람’(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이란 교사모임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들은 91년 ‘신나는 과학, 정확한 과학, 모든 이를 위한 과학’을 만들자는 결의로 시작해 지금까지 많은 과학행사를 이끌어왔다. ‘부산과학교사모임’(대표 김옥자)도 같은 뜻으로 결성된 지역교사단체다.
신과람과 부산과학교사모임이 일본의 교사모임과 다른 점은 젊은 선생들로 구성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과학교사모임은 대부분 중장년층 선생들이다. 그리고 일본의 젊은 과학선생들은 탐구학습과 연구를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의 실정은 정반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대로 경험이 많은 선생들이 아쉬운 것이다.
과학올림피아드, 과학경시대회가 일부 우등생들을 위한 과학 프로그램이라면 나머지 대다수의 학생들을 위한 과학제전, 과학놀이마당이 개최돼야 한다는 것이 의식있는 과학선생들의 주장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은 과학놀이마당, 과학제전과 같은 이벤트를 통해 과학교육의 문제점을 메우려고 몸부림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입시위주 교육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고름만 짜는 정도에 그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 양국 선생들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