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까지 위세를 떨친 테리악에는 독사의 살코기와 아편이 섞여 있었다. 19세기 영국에서 설사약을 만병통치약으로 판매한 돌팔이가 한때 대중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미국에서는 무절제한 광고가 대중을 우롱하는데 한몫 거들었다.
히포크라테스보다 용한 의사
사람들이 무병장수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리고 “무슨 병이라도 쉽게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있으면” 하는 바람도 크게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절절한 기대와 소망을 이용해 터무니 없는 만병통치약들이 사람들을 현혹해온 모습은 역사 속에서 쉽게 발견된다. 만병통치약들이 판을 쳐온 배경에는 인간의 탐욕과 무지, 그리고 질병과 건강에 관련된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만병통치약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람의 건강과 병, 그리고 치료를 담당하는 신은 아스클레피오스이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4백년대부터 병에 걸리면 아스클레피오스를 모신 신전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치료를 받아 병을 고치곤 했다. 오늘날 ‘그리스 의학’ 하면 히포크라테스부터 떠올리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아스클레피오스가 훨씬 더 친숙하고 믿음직한 존재였을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의 두 딸 역시 질병과 건강에 관계된 일을 했다. 맏딸 히게이아(Hygeia, 위생을 뜻하는 영어 ‘hygiene’의 어원)는 뒤에 질병의 예방을 상징하는 건강의 여신이 됐으며, 작은딸 파나케이아(Panakeia, 만병통치약이라는 뜻의 영어 ‘panacea’의 어원)는 치료의 여신이 됐다. 그런데 언니보다 동생이 지위가 높고 인기도 훨씬 좋았다. 여기서 고대부터 스스로 위생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함으로써 건강을 지키는 노력을 하기보다 신이나 만병통치약에 자신들의 건강을 맡기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태도는 2천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만능해독제 테리악
전설에 따르면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기원전 132-63년)는 자신이 독살당할까봐 광적으로 두려움에 떨어 노예와 사형수에게 독약과 해독제를 먹이는 실험을 했다. 그래서 마침내 만들어낸 해독제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미트리다티움이었다. 미트리다티움은 실제 효력이 어떻든 그때부터 만능해독제로 쓰였으며, 이후 더욱 효능 있는 약을 만들려는 노력이 잇따랐다.
네로 황제의 담당의사 안드로마쿠스는 미트리다티움에 독사의 살코기를 첨가했는데, 이를 테리악(theriac)이라고 불렀다. 테리악은 야생짐승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생존 당시부터 근대 초에 이르기까지 의학의 황제로 군림하던 갈렌(기원 130-200년)은 테리악에 첨가하는 성분을 70가지까지 늘렸다. 중세에는 그 수가 1백가지가 넘었다. 테리악은 여러 달이 걸리는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뒤 포도주처럼 여러 해 묵혀졌다. 제조 과정은 술과 비슷했지만 그 모양은 물약보다는 고약에 더 가까웠다.
교양있는 사람이나 무지한 사람 모두 온갖 독성에 감염된 상처를 아물게 하고 염증을 치료하며 전염병을 물리치고 질병을 예방하는 데 테리악을 써 왔다. 갈렌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테리악을 높이 평가해 그가 섬긴 황제들에게 그 약을 조제해 주었다.
테리악은 르네상스기 이후 서유럽의 중요한 상품이 됐으며, 테리악의 제조과정 자체가 중요한 행사로 취급됐다. 18세기까지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의사들이 입회한 가운데 최상급 약사가 거들먹거리며 성대한 의식과 함께 테리악을 조제했다.
테리악이 그토록 오랫동안 큰 인기를 끈 한가지 이유는 성분 중에 아편이 포함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편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위험하고 해롭기 짝이 없지만 근대적인 약품이 개발되기 전까지 효험이 가장 높은 약물이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테리악은 점차 위세를 잃게 되었다. 테리악에 대해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1745년 발표된 영국 의사 윌리엄 헤버든의 논문 ‘미트리다티움과 테리악에 대한 고찰’ 이었다. 19쪽에 불과한 이 논문에서 헤버든은 거의 2천년 가까이 내려온 만병통치약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고 나섰다. 만병통치약의 성분과 작용에 대한 헤버든의 논의는 매우 합리적이어서 많은 학자들에게 공감을 주기 시작했다. 1756년 마침내 에딘버러 약전(藥典)에서 테리악을 비롯한 만능해독제 항목이 삭제됐다. 그러나 에스파니아와 독일의 약전에는 19세기까지 그것이 남아 있었으며, 프랑스의 경우 1908년판까지 수록돼 있었다.
설사약으로 판명
고대부터 근대초까지 명성을 떨친 만병통치약은 결과야 어쨌든 갈렌으로 대표되는 정통의학계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정규 교육과 훈련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의료행위를 하는 일이 대단히 많았지만 큰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비약(秘藥)은 대부분 의사들이 아닌 돌팔이(비정규의사)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유통됐다. 세상이 점차 자본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면서 대중을 우롱해 돈을 긁어 모으려는 돌팔이가 많이 나타나 정규 의사보다 더 확실한 치료를 장담하고 다녔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제임스 모리슨이 주도한 영국의 ‘히게이아 학파’(이름이 대단히 역설적임)가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원리를 주장한 일. 즉 비밀스럽게 처방된 비약(1820년대부터 시판된 ‘모리슨 식물정제’)을 써서 모든 나쁜 피를 몸밖으로 내보내 만병을 치료한다는 선전이었다. 이 비약은 나중에 강력한 설사약으로 밝혀졌다.
양심적이고 명망 있는 의료계 인사들은 모리슨을 사기꾼이라고 고발했고 당시 정론지들도 그 허구성을 풍자했지만, 모리슨은 광고를 대대적으로 펼치고 여러가지 교묘한 판매전략을 사용함으로써 사업을 더욱 번창시켰다. 모리슨 비약은 프랑스, 미국, 독일 등 다른 나라까지 퍼져 1840년 모리슨이 죽은 뒤에도 19세기 내내 판매됐다. 재판을 통해 그 사기꾼의 정체가 드러났지만, 대중이 열광하는데는 속수무책이었다. 오히려 대중들에게 모리슨은 박해받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비쳤다. 열렬한 지지자들은 정통 의학을 비난하고 모리슨의 미덕을 칭송하는 1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청원서를 몇차례에 걸쳐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돌팔이들이 애용하던 약품 가운데 많은 것이 고대와 중세부터 전해져 유럽에서 널리 쓰였다. 18세기 유럽에서 만병통치약은 부정직하고 뻔뻔스러우며 과장되게 선전됐다. 19세기에 이르면 광고수단과 판매술이 발달하면서 만병통치약 사업이 더욱 번창했는데, 특히 미국에서 이런 현상이 심하게 나타났다. 당시 미국인들은 정규 의학이 비싸고 위험하며 때로는 불쾌한 치료법을 쓴다고 여겨 정규 의학보다 자가처방을 선호하고 있었다. 만병통치약은 이런 대중의 정서에 잘 맞는 치료책이었다. 더욱이 각종 신문의 난립, 저렴한 인쇄물 가격, 떠돌이 약장사들의 활발한 활동 때문에 만병통치약이 대중에게 쉽게 선전됐다. 또 생산 기술이 발전하면서 만병통치약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게 돼 저렴한 가격으로 널리 사용될 수 있었다.
법적규제 부른 특허 매약
특허매약(의사 처방에 따라 그때그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허를 받고 미리 제조해 만들어 파는 약, patent medicine)도 돌팔이들이 만들고 판매하는 일이 많았다. 미국에서 특허권을 처음 받은 약은 1790년대 ‘담즙 환약’이었다. 이후 1840년대에는 70가지 이상의 특허매약이 있었고 남북전쟁 초에는 6백여가지에 달했다.
특허매약 사업은 19세기 후반에 엄청나게 성장했는데, 당시의 ‘규제 없는 광고’ 가 주요한 추진력이었다. 지역 신문과 특정 주제를 다루는 잡지, 심지어 종교 잡지도 특허매약의 광고를 주된 수입원으로 삼았다. 1900년 경 미국에서는 특허매약에 대한 전국적인 규모의 광고가 실렸다.
하지만 특허매약 사업의 급격한 번성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몰락을 재촉했다. 터무니 없는 폭리와 과장된 선전 활동이 대중의 반감과 지식인의 분노를 부른 것이다. 특히 작가와 저널리스트들이 규탄 작업에 앞장섰는데, 미국의 경우 ‘레이디스 홈’ 잡지가 대표적이었다. 이 잡지는 ‘미국의 거대한 사기’라는 제목으로 특허매약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기사를 연재했다. 이는 미국이 1906년 최초로 식품의약법규를 제정하도록 만드는데 크게 공헌했다. 만병통치약과 그 제조·판매자들에게 최초의 법적 규제가 가해진 순간이었다.
역사의 교훈 잊은 '천지산' 해프닝
오늘날 의학계에서는 만병통치약이란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양식있는 의사나 의학자라면 아무도 그런 것을 만들려는 헛된 노력을 하지 않는다. 간혹 정통 의·약학적 연구에 의해 만들어진 약이 만병통치약 비슷하게 쓰이는 경우가 있지만 이런 ‘남용’은 사실 의학계와는 전혀 무관하다. ‘특정한 발병원인―특정한 질병―특효적 치료’라는 현대 의학 사상에는 불특정(不特定)한 성격의 만병통치약이 자리잡을 틈이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에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에는 질병이 생겼을 때 특정 부위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신체 전체의 상태와 연관지어 파악하려 했다. 이런 전인적(全人的)이고 유기적인 질병관을 바탕으로 만병통치약에 대한 가능성과 기대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18세기 이래 비약과 특허매약들이 아무런 검증도 받지 않은 채 기승을 부린 사실로부터 ‘사회적 감시’와 터무니 없는 ‘만병통치약의 유행’ 사이에 역(逆)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부와 더불어 그러한 감시에 앞장서야 할 언론이 오히려 국민을 오도하고 있는 모습은 최근 ‘천지산’ 보도에서 드러났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또한 만병통치약은 정규 의학과 의사들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땅에 떨어졌을 때 더욱 기승을 부린다. 의료인들은 질병이 주는 고통과 공포 앞에서 떨고 있는 대중들이 만병통치약이나 사이비 이론에 현혹되고 있는 사실을 무작정 개탄하거나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의료인들이 의학지식과 의술, 아니 그보다 도덕성과 환자들에 대한 태도 등에서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사이비 의술을 추방할 수 있는 첩경이다.
환자의 처지에서는 의사나 의술을 신뢰하되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는 편이 현명한 자세다. 다시말해 자신의 건강에 대한 주체로 서서 의학을 활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검증받은 의학은 무시한 채 터무니없는 만병통치약이나 사이비 의술에 매달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히게이아와 파나케이아의 인기를 고쳐 기록해야 할 사명이 현대인에게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속성’을 너무나 모르는 소치일까?
멜라토닌 인터넷 사이트 1만9천여개 : 개인 복용 경험·예견되는 부작용 토론 활발
이미 멜라토닌이 정식으로 제조·판매되고 있는 미국 등지에서는 1950-1970년대의 비타민에 버금가는 붐을 이루고 있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누구라도 그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웹에서 찾아볼 수 있는 멜라토닌 관련 사이트의 수는 1만9천여개. 약의 새로운 수용체를 찾아냈다는 발표부터 제약회사의 홍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비교적 '평범한' 이야기가 올라와 있는 웹과 달리 같은 관심사를 가진 전세계인이 활동하는 유즈넷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훨씬 구체적이다. 이를 테면 수면에 지장이 있는 사람들(alt.support.sleep-disorder)이나 대륙을 넘어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rec.travel)이 주고받는 이야기에서 멜라토닌은 단골손님이다.
가장 많은 멜라토닌 관련 질문과 답이 오가고 있는 곳은 역시 의약에 관심있는 이들이 몰려 있는 sci.med그룹과 rec.drugs.smart 등인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작용에 관한 토론이 자주 벌어진다. 이를 테면 멜라토닌 정제복용이 인체 내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멜라토닌 분비를 막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대표적.
또한 알려진 약의 효능이 워낙 광범위하다보니 각자의 상황에 맞는 복용법을 묻는 질문도 많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은 대개 전문가보다는 약을 복용한 경험을 가진 일반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어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위험 부담'을 안고 있다.
한편 지난 7월초 misc.health.alternative, sci.life-extension 등의 뉴스그룹에서는 유럽국가들이 OTC 항목에서 멜라토닌이 제외되고 있는 것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벌어져 눈길을 끌었다. OTC란 아스피린이나 소화제처럼 의사의 처방 없이 누구나 동네 상점에서 사먹을 수 있는 일반매약품으로, 현재 멜라토닌은 미국과 달리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서는 의사 처방이 있어야 구입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상당수의 의견 개진자들은 유럽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거대 제약회사의 농간으로 풀이했다. 지난 7월3일 글을 올린 한 네덜란드인은 "멜라토닌의 '부작용'이란 수면제를 만들고 있는 제약회사의 이윤 감소"라고 단정하고 있을 정도, 이와 함께 3mg짜리 멜라토닌 정제에 비타민 B6를 같이 먹으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는 것 역시 제약회사의 마케팅 전략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