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장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 두명이 병원을 찾았다. 이들은 모두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나 아픈 정도가 달랐다. 한명은 데굴데굴 구르며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반면, 다른 한명은 늠름하게 앉아 배가 고프다는 엄살만 떨었다.
이때 병원에서는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별다른 조치가 내려지지 않는다. 의사는 병의 원인을 제거했기 때문에 통증 자체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환자는 "맹장을 잘 떼어냈다"는 의사의 말보다 배가 아픈것을 당장 낫게 해주는 치료가 필요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김전교수(서울대 의대 생리학교실)는 "의료계가 막상 환자들이 병원을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통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기울인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통증을 일으키는 원인을규명하고 치료하면 통증도 자연히 낫는다는 전통적인 서양의학의 입장에 따른 것" 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최근 질병 치료와 함께 통증자체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신경차단하는 제3의 요법
통증은 생명을 당장 위협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활 리듬을 깨뜨리거나 적절한 운동과 식사를 못하게 돼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그래서 우울증에 빠져 인생을 포기하기 쉽고, 심하면 견디다 못해 자살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상철 교수(서울대 의대 마취과.통증치료실)는 "심한 통증이 있는데 이를 참고 정신력으로 극복하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이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말기 암환자의 경우 통증을 줄이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는 일이 많은데, 그 부작용을 걱정해 약을 되도록 복용하지 않고 견딘다면 마지막 남은 짧은 인생마저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지 못하고 불행한 최후를 맞는 셈" 이라고 지적한다.
암과 함께 통증 전문가들이 대표적으로 꼽는 치료 대상은 분만통과 수술 후에 오는 통증이다. 아기를 낳을 때 산모가 느끼는 통증은 암으로 인한 것보다 더 크다고 한다. 더욱이 분만통은 몸에 무슨 병이 있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한편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말은
이미 병의 원인이 제거됐음을 의미한다. 이때 통증만을 별도로 '떼어내' 없앤다면 환자로서는 더 이상 바랄것이 없다.
통증전문가들이 가장 흔히 사용하는 치료책은 신경차단술이다. 아픔을 느끼게 하는 통각신경이 작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의료계에서 사용되던 약물요법이나 수술요법과 달리 '제3의 요법'으로 불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통증은 환자마다 매우 주관적이며 불규칙해서 일정한 틀에 맞취 치료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래서 전문가가 각 환자의 특성에 따라 치료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쉽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종합병원에 통증치료실이 개설돼 있고 개인적으로 개업하는 병원(현37곳)도 늘고 있다. 김철호 원장(신경통증클리닉)에 다르면, 1972년 연세대 의대에 최초로 통증치료실이 개설된 이래 1988년 대한 통증학회(초대 회장 연세대 의대 오홍근 교수)가 설립 되면서 본격적으로 통증치료가 시행되고 있다. 얼마전 대한 통증학회는 마취과 졸업자 중 통증에 관해 전문적으로 5년 이상 종사한 1백2명에게 '인정의' 라는 자격을 부여했다. 아직 통증분야가 하나의 '과' 로는 인정되기 않았기 때문에 정부에서 부여하는 '전문의' 는 없는 실정이다.
종합병원의 통증치료실을 찾는 환자는 대부분 같은 병원 내 다른 과에서 추천을 받고 온다. 이상철 교수는 "1991년 병원에 통증치료실이 개설된 이래 점차 이곳을 찾는 환자들이 늘어, 요즘은 하루 평균 10-30명의 환자가 오고있다" 고 말한다.
개인 병원을 찾는 환자도 늘고 있다. 김철호 원장은 "처음에는 각 병원에서 보낸 환자가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치료받은 환자의 소개로 직접 찾는 것이 특징" 이라고 설명한다. 그만큼 통증 치료에 대한 인식이 높아 졌다는 말이다.
근원뿌리 뽑지 못해
때때로 통증 치료는 다른 진료과에서 '놓친' 사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전문화.세분화된 다른 과에 비해 환자가 아픈 원인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하태형 박사(삼성의료원 통증관리센터)는 손목이 아파 정형외과를 거친 후 찾아온 환자를 예로들어 설명했다. 정형외과의 진단은 교감신경이 외축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환자의 손목이 잔뜩 부어 있었다. 자세히 알아보니 환자가 병원에 오기 전 침을 맞았는데, 그때 소독되지 않은 침을 통해 결핵균이 옮은 것이었다. 하태형 박사는 우선 환자 손목에 있던 고름을 뺀 후 치료를 마칠수 있었다. 부은것은 뼈나 신경의 해부학적 구조를 주로 살피는 정형외과의 1차적인 관심이 아니었다.
그러나 통증 치료는 사람을 덜 아프게 만들 뿐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수술 해야 할 경우는 수술을 거치고 난 뒤 통증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상철 교수는 "병원에서 다른 과는 필요 없고 통증치료실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 이라고 단언한다.
또 하태영 박사는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처음에는 기대를 너무 많이 갖고 찾아오지만, 실제로 병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아픔의 근원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다" 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암세포가 척추에 퍼져 등과 허리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환자의 경우 10정도의 통증을 3-4정도로 줄이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병의 근원을 없앤다는 느낌을 주는 '치료' 라는 말보다 단지 통증의 정도를 조절한다는 의미에서 '관리' 라는 말을 선호한다.
사회가 점차 노령화되고 만성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면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증가하고 있다. 물론 병에 걸리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거나 병에 걸렸을 때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 병이 나았거나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렸을 때 다가오는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다. 통증의 메커니즘과 치료책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행된다면 인간이 육체적인 고통 없이 살 수 있는 날이 가까운 시일 내에 올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