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한 남학생, 자녀를 살해한 주부, 병원에서 투신자살한 의경 등 우리나라 전 인구의 1-3% 정보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누구나 생활하다 보면 우울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우울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병이 아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정상적'인 것이고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일시적인 우울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슬픔과 좌절 절망 염세적 사고에서 유래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기억력 감퇴 죄악감 불안 집중력부족 수면장애 식욕장애 성욕감퇴 등을 경험한다. 우울증 환자의 60%가 자살을 생각해 본적이 있으며, 치료하지 않으면 15%정도는 목숨을 끊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우울증은 정신병으로 분류되는 질병이다. 2백년이 되는 현대 약발견사에 비해 정신병을 칠하는 약 발견은 지난 50년동안 이뤄졌다. 항결핵제의 발견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항우울제를 살펴보자.
일석이조의 항결핵제
1940년 말에서 1950년대 초, 획기적인 결핵약이 출현했다. 이소니아지드 파스스트렙토마이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소니아지드는 최초의 항우울제를 탄생시킨 계기가 됐다. 고통받는 환자를 위해 약발견에 헌신한 과학자의 노력이 이중으로 보상받는 경우다. 뒤에 이야기할 이미프라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소니아지드는 미국 스퀴브, 로슈, 그리고 독일 바이엘제약회사가 거의 동시에 발견했다. 1951년 이소니아지드를 발견한 로슈연구소의 하이만 폭스와 존 지바스는 이 약의 구조를 조금 바꿔 더 좋은 결핵약을 찾고자 했다. 곧 이프로니아지드가 합성됐고 이 물질은 효과가 더 강했다. 효능면에서는 이프로니아지드가 좋았지만 독성, 부작용면에 문제가 있었다.
1952년 두 약을 동시에 임상실험한 셀리코프 등은 이프로니아지드가 중추흥분 부작용을 나타내므로 이소니아지드가 더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의사들은 이프로니아지드의 처방을 기피했다. 그런데 뉴욕병원의 데이비드 보스워스는 이프로니아지드를 처방한 결과, 항결핵효과 외에도 전반적으로 치유효과를 높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사실을 1956년 까지 몇 편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후 1957년 4월 뉴욕에서 열린 미국 정신과학회에서 서로 다른 병원에 있는 세명의 의사가 "이프로니아지드는 만성 우울증 환자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동시에 발표했다. 즉 결핵환자의 우울증을 개선해 결핵치유 효과를 높인다는 것이다.
이 발표를 계기로 우울증 환자에 대한 집중적인 임상실험이 실시됐고 이프로니아지드는 우울증 환자에게 필요한 약이 됐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약을 사용한 환자에게서 심한 신장 독성과 간 독성이 나타났고, 그 결과 1961년 미국시장에서 발매가 중지됐다.
항히스타민제에서도 발견
이프로니아지드와 거의 동시에 유럽에서 발견된 약이 이미프라민이다. 이 약도 우연히 발견된 것이지만 그 뿌리는 항히스타민제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1950년대 스위스 정신과 의사 롤란트 쿤은 프랑스의 롱프랑 제약회사에서 갓 개발한 정신분열증치료제, 클로르프로마진을 환자에게 상의해 봤다. 이때 그는 환자에 나타나는 반응이, 자신이 수면제를 찾을 목적으로 스위스 바젤의 가이기 제약회사에서 보내준 항히스타민성 물질을 실험했을 때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쿤은 장문의 편지를 가이기에 보내 당시의 화합물을 제공해 주도록 부탁했다. 쿤은 가이기에서 보내온 화합물(G22150)에서 흥미 있는 성질을 발견했으나 독성이 심했다. 그래서 다시 클로르프로마진과 좀 더 구조가 유사한 G22355(이미프라민)를 택해 정신과 영역에 관련된 자세한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이미프라민이 정신 분열증에는 효과가 없는 반면 항우울작용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956년 초 이미프라민은 우울증 환자에게 투여돼 탁월한 항우울작용이 증명됐고 즉시 1956년 2월 가이기에 보고됐다.
이 사실은 7개월 후 국제 정신과 학술회의에서 발표돼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미프라민은 1958년 유럽에서, 1959년 미국에서 발매됐다. 이물질은 이미 1951년 가이기의 해프리거와 쉰틀러에 의해 미국특허로 등록된 것이었다. 그 후 이미 프라민과 구조가 닮은 다양한 항우울제가 전세계적으로 개발됐다.
이프로니아지드와 이미프라민의 발견은 우울증 환자에 큰 도움이 됐을 뿐만 아니라 이 약제의 작용 매커니즘은 우울증의 정체를 밝히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신경세포 간의 대화부족
뇌에는 1백억개에 달하는 신경세포가 신경망을 구성하고 있으며 정신적 기능을 수행하고 육체적 활동을 통제한다. 우주에서 가장 복잡하다는 뇌의 기능에 대해 완벽한 연구가 돼있지는 않다. 그러나 뇌 특정 부위의 신경세포 간의 대화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정신병을 유발한다는 윤곽은 파악됐다.
정신병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신경 전달 물질에 관심이 크다. 정신병은 특정 신경전달물질을 사용하는 신경세포망의 대화가 부족하거나 과도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을 신경전달물질로 사용하는 신경세포간의 대화가 부족해 생기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것은 이프로니아지드 이미프라민의 작용 매커니즘과 관련돼 밝혀진 것이다.
신경세포 말단에서 방출된 전달물질 중 일부만이 이웃 세포에 도달해 신호를 전달하며 방출된 물질은 즉시 모두 제거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통화중인 전화처럼 다음 신호를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달물질 제거는 두가지 매커니즘으로 수행된다. 본래의 방출 부위로 섭취돼 돌아오거나 효소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다. 재섭취된 것 중 일부는 저장되지만 대부분 '모노아민 산화효소' 라는 효소에 의해 파괴된다. 즉 신경전달물질의 화학구조가 한 개의 아민기를 가진 '모노아민'이므로 이 효소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다.
1952년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의 알버트 젤러는 이프로니아지드가 모노아민 산화효소를 억제한다고 발표했다. 이프로니아지드가 재섭취된 전달물질의 파괴를 막아 다시 신호가 전달될 때 전달물질이 충분히 방출되도록 해 신경세포간의 감소된 대화를 복구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이미프라민은 방출된 전달물질의 재섭취를 막아 이웃 신경세포에 전달물질이 충분히 도달되게 해서 대화를 원만하게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계획적인 창조
이미프라민과 유사약은 그 후 수십년간 항우울제 시장을 석권했으나,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이미프라민은 뇌의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뿐만 아니라 몸안의 다른 신경전달물질에도 영향을 미쳐, 변비 몸마름 심장박동이상 현기증 등의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부작용을 해결할 수는 없을까? 이론적으로는 뇌에서만 작용하고, 노르에피네프린이나 세로토닌만의 재섭취를 막는 약이 필요했다. 이런 약발견은 우연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론과 실험이 겸비된 창조적 과정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최초로 달성한 제약회사가 미국의 일라이릴리(릴리)다.
1970년부터 릴리는 이미프라민과 유사약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 없는 항우울제를 찾기 시작했다. 정신병에 쓰는 약 연구 경험이 전혀 없었던 릴리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우선 항우울작용을 나타내는 물질을 선별해내기 위해 기초 스크리닝법을 확립해 이미 합성해 갖고 있던 많은 화합물을 실험했다. 동시에 합리적인 약 디자인법에 근거해 새로운 화합물들을 합성했다.
새로운 화합물 합성의 주역은 브라이언 몰로이였다. 그는 릴리 연구소에 들어와 1970년부터 항우울제 합성과제 책임을 맡았다. 그는 항히스타민제의 하나인 디펜히드라민을 실마리로 택해 유사 화합물을 합성하기 시작했다. 기초 스크리닝에서 항우울효과가 있는 화합물은 더 자세한 실험을 위해 생화학자 웡에게 보내졌다.
데이비드 웡은 대만에서 대학 1년을 다닌 후 미국으로 이민,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 릴리에 입사한 웡은 1971년부터 흰쥐의 뇌신경말단에서 모노아민의 재섭취에 관한 연구를 했다. 그는 모노아민의 재섭취 과정을 자세히 연구해, 결국 선택적으로 어느 하나만을 억제하는 물질을 찾는 방법을 확립했다. 그는 몰로이가 합성한 플루오세틴이 세로토닌의 재섭취만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시험관내 실험에서 재섭취 억제제로 판정된 물질은 동물실험으로 이어졌다. 이 일을 맡은 사람은 생화학자 레이 풀러였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기 전까지 6년간 정신병원에서 시간제로 일한 경험이 있었고 학위를 받고도 정신병 분야 연구를 2년간 했다. 그리고 릴리에 입사해서는 중추신경계 분야에서 일했다. 그는 동물실험을 통해 플루오세틴이 세로토닌의 재섭취만을 억제해 뇌속의 세로토닌 농도를 높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단 개발 가능성이 보이자 릴리는 1백명의 연구원을 할당해 좀 더 나은 물질은 없는지. 더 확실한 안전성과 효능에 대한 실험에 착수했다. 1973년 초의 일이다.
1976년까지 수집한 자료에서는 이 물질이 적어도 동물에게는 이미프라민보다 독성이 적다는 것을 나타냈다. 이 과정에서 1973년말 특허가 출원됐고 1974년 4월 플루오세틴은 학계에 알려지게 됐다.
결국 성공적인 임상실험을 거쳐 1983년 9월 신약 신청서가 제출됐고 1987년 마지막 주에 미국 식품의약국의 허가가 떨어졌다. 릴리는 1988년 1월 푸로작이라는 상품명으로 플루오세틴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연구가 시작된지 거의 16년만의 결실이었다.
의사들은 즉시 약의 효능을 확인했다. 1990년 3월 26일자 '뉴스위크' 에서는 이 약을 '우울증에 획기적인 약' 이라는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1992년 푸로작은 릴리 1백여년 역사상 처음 연간 매출액 8천억원(10억달러)이상을 기록한 약이 됐다. 1994년에는 1조2천억원(15억달러)의 매출액을 기록하면서 의사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푸로작은 1989년 정신과 치료를 거부하는 어느 종교 교파의 전쟁선언에 의해 수난을 겪기도 했다. 때마침 1990년 한 신경과 의사가 6명의 푸로작 복용환자가 강한 자살충동을 느꼈다는 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하자 그 종교단체는 언론플레이를 개시했다.
그 후 2년간 사회문제화돼 소송이 폭주했고 심지어 그 종교단체는 미국 식품의약국에 푸로작의 발매를 철회시켜 달라는 청원서까지 제출했다. 그러나 이 청원은 1991년 8월 근거없는 것으로 거절됐다.(자료 도움, 시비-가이기, 일라이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