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지에서 가장 흔히 관찰되는 경관은 묘지다. 특히 양지 바른 남쪽 산자락에는 어김없이 주검을 안은 조용한 무덤이 자리한다. 그러나 무덤 생태계의 얼개는 아직 한번도 밝혀진 적이 없다. 자신의 가족 이외의 무덤에 접근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을씨년스런 겨울날 깊은 산 속에서 마주치는 외딴 묘지는 얼마나 섬뜩한가.
하지만 나른한 봄날 무덤에 기대 휴식을 취하면 주위의 온기가 온몸을 포근히 감싸는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무덤이 자리잡는 곳은 생태적으로 혜택을 누리는 최적의 생물 서식처이기 때문이다. 너무 건조하거나 습하지 않고, 아주 가파르거나 평탄하지 않으며, 무척 높은 곳이나 아주 낮은 곳에 위치하지 않아 모든 생명체들이 살고 싶어하는 최적 입지다. 분명 풍수가 빼어난 삶의 터전을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양보한 곳이다.
오늘날 욕심 많은 사람들의 '묘터 찾기' 수단으로 매도되고 있는 풍수도참사상은 본래 신라시대 이후 아름답고 건전하게 발달돼 왔다. 산과 물과 방위, 그리고 배달민족의 지혜가 조화를 이룬 곳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자연의 에너지가 풍만한 명당은 당연히 풍부한 생물 서식처이며, 그 속의 사람들은 평화로운 눈동자를 가질 뿐이다.
산 사람은 4.3평, 죽은 사람은 15평
그러나 좁은 국토에 많은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현실 때문에 묘지 문화를 개선하는 문제가 해마다 논의돼 왔다. 웬만한 자연생태계 입지를 경작지 산업입지 주택지로 개간하는 분위기에서 묘지도 예외일 수 없다. 그리고 보다 큰 문제는 우리나라의 봉분묘(흙으로 쌓아올린 무덤)가 한반도 자연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핵'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고 영혼과 내세를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죽은 자를 기념하는 형상물로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은 지형이나 종교, 사회적 관습, 미적 요소, 위생적 측면을 고려해 조성되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무덤 관습은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으로 땅에 매장하는 문화가 크게 성했다. 그 결과 오늘날 분묘 1기 당 평균면적(15평)은 국민의 주택면적(4.3평/1인)이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식생면적(2.6평/1인)보다 훨씬 넓게 돼버렸다. 1993년 말 전국의 묘지면적은 약 9백66km²로 전 국토의 약 1%를 차지했다. 이 면적은 서울의 1.6배 크기다. 또한 매년 여의도보다 더 큰 면적이 무덤으로 변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약 68%가 올망졸망한 산들로 이루어져 그 속에서 어우러진 '숲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이는 유럽이나 북미와 같은 서양의 '잔디 문화' 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두 문화는 바람직하지 못한 공통점을 갖는다. 우리나라의 숲에는 무덤이 많이 들어서고 서양의 잔디는 골프장으로 메워져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백평의 무덤 또는 골프장에 서식하는 생물 종류가 한 그루의 참나무에 의존해 살아가는 생물 종류보다 극히 단순하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외국의 무덤은 어떨까. 유럽에서의 묘지는 도심 공원의 역할을 하고, 우리와 같은 유교권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화장(火葬) 문화가 형성된 지 오래다. 이런 예들은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한 무덤 생태계의 교란으로 인한 폐해가 있을 수 없다. 현재의 무덤 생태계는 우리나라만이 갖는 독특한 인공생태계인 셈이다.
우리나라 무덤이 이전의 모든 생태계를 일순간 파괴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무덤은 인간이 여러모로 생태계에 간섭하는 빈도를 크게 증가시킨다. 또한 삼림 속에 커다란 공간적 틈을 형성해 주변 구조를 변형시킨다.
삼림이 초원으로
대규모 집단 공동묘지의 경우 그 영향은 더욱 심각하다. 생물 구성종의 변화는 물론, 유기물생산량, 이산화탄소 흡수량과 산소 방출량, 수분함유능력, 토사유출, 기온 등의 변화가 발생된다.
무덤을 만들 때 흙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떼잔디가 덮여진다. 점차 잔디가 자리를 잡아 무덤이 안정되면, 이곳을 좋아하거나 이런 환경에 경쟁력이 있는 식물들이 이듬해 봄 하나 둘씩 종자를 발아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무덤이 조성되기 전에 존재하던 식물사회와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무덤에 형성되는 식물사회의 구성원은 여러 가지 생존 전략을 갖춘다. 먼저 햇빛과 따뜻한 곳을 좋아하고 건조함을 견뎌야 한다. 무덤의 입지는 음습하지 않은 양지바른 곳이기 때문에 빛이 많이 쪼인다. 또한 대부분 산지의 비스듬한 면이나 그 하부에 위치하므로 점토 성분이 많은 적황색 삼림토양이 많다. 따라서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불량한 토양이 강렬한 햇빛으로 쉽게 건조된다.
한편 정기적인 벌초에도 번식이 가능하도록, 벌초 후부터 그 다음 벌초 전까지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시간이 신속해야 한다. 일단 벌초가 시작되더라도 그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작은 키를 가져야 한다. 무차별 번식이 가능한 '게릴라 번식법'도 필요하다.
이런 전략을 갖춘 식물들은 적지 않다. 잔디 토끼풀 마디풀 실망초 석류풀 다닥냉이 김의털 멍석딸기 금강아지풀 제비꽃 망초 할미꽃 참꽃마리 새콩 벌노랑이 쓴풀 꿩의밥 조개나물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잔디 할미꽃 꿩의밥 조개나물 등은 부지런한 후손이 관리하는 무덤에서도 꿋꿋이 살아나는 대표적인 다년생 야생초다.
만일 무덤이 관리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무덤 생태계는 인간이 간섭하는 종류와 정도에 따라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부지런한 정원사를 고용한 골프장과 사향길에 들어선 골프장의 잡초를 비교하면 그 종류와 자란 상태가 크게 다르듯이, 후손들로부터 버림받은 무덤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더욱이 관리되지 않는 무덤은 원래의 생태계로 복귀되기 어렵다. 완만한 구릉 지형에 방치된 공동묘지를 생각해 보면, 후손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무덤 식물사회의 멤버 교체는 신속하게 진행된다. 벌초가 중단되면 키 작은 식물들 위로 키가 큰 초본식물종이 자라기 시작한다. 이때 키가 큰 식물들이 빛을 차단해 키 작은 식물들의 생명을 빼앗고, 마침내 가장 끈질긴 잔디마저 추방된다.
키 큰 초본들이 듬성듬성 들어선 부분은 비바람으로 크게 침식돼 낮은 구릉형의 황량한 초원이 형성된다. 이곳은 꽉 짜인 뿌리가 '인해전술' 방식으로 번식해 가는 '수크령'이란 키 큰 벼과식물이 빼곡이 들어서 야릇한 경관을 낳는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만큼. 수크령 밀집지역에는 무릇 멍석딸기 쑥 봄여뀌 새팥 왕고들빼기 토끼풀 가지청사초 억새 등과 같이 생명력이 억센 식물들이 비집고 들어와 사는 모습도 간혹 관찰된다.
순환의 원리로 바라보아야
그러나 이런 초원이 삼림으로 변해 가는 경로가 수백년이 걸릴지 모른다. 골프장과 마찬가지로 한번의 묘지를 본래의 자연으로 복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철학적으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생명이 살아가는 모습을 공부하는 생태학자의 관점에서 죽음은 그리 커다란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상호작용과 물질순환, 그리고 에너지순환의 법칙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죽음은 곧 탄생이다. 성장과 같은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의 원리에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효에 대한 교육적 가치, 조상에 대한 후손의 죄씻기, 가족 공동체의 화합 등의 이유로 한반도의 산천을 묘지로 전락시킬 수 없다. 천년 만대 살아 갈 미래 사람들을 위해 이 땅을 건전한 자연생태계로 유지할 수 있도록 슬기를 발휘해야만 하는 것이 현재 우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