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고 우호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글들이 지배한다. 야한 이야기가 아니면 인기가 없다. '사기 욕설이 난무하는 난장판'. '정보화 사회의 총아' 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1 공 개(7) [921106 ]야한 여자환영
#2 공 개(6) [jekline ]미남미녀를 위하여...
#3 공 개(7) [1592 ]인연의 끈을 당겨요...
#35 공 개(4) [maxidea]너의 작은 입술 너무 뜨거워
#36 공 개(12) [CSRPRIMe]섹스방
일요일 오후 2시, 한 PC 통신 서비스에 개설되어 있던 대화방의 제목들이다. 7백여명의 사람들이 이방저방을 기웃거리는 대화방의 제목은 옆의 것과 비슷한 류가 많았고 그런 방일수록 유난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최근 몇 년 동안 업무상 필요한 전자우편이나 과거 신문기사 검색외에는 PC 통신 공간에 머무르는 일이 적었던 필자로서는 오랜만에 둘러본 PC통신만의 상황이 낯뜨겁고 당혹스러웠다.
사람들의 흔적이 많은 곳은 어디를 막론하고 '성' 과 관련한 내용으로 넘쳐났다. 심한 경우는 도색잡지의 제목을 보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게시판 유머란 대화방 그 어느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12월 7일 하이텔 큰마당에는 RLAEORNS이라는 ID를 가진 사용자가 올린 차마 인용하기 힘든, 노골적이고 외설스러운 제목의 게시물이 연달아 10여개는 올라와 있었다.
대화방의 세태를 컴퓨터 잡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대할 때와 'go chat' 이라는 명령으로 대화방에 갔다가 음담패성을 늘어 놓는 '야방' 이나 '컴섹스방', 스트레스 해소를 위하여 욕만 하고 나온다는 '욕방' 의 존재를 눈으로 목격한 때와의 충격은 다른 것이었다. 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가는지 궁금해 섹스방에 참여하려고 'j 36'을 열심히 입력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대화방 허용 인원이 초과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만 계속해서 나올 정도로 입방 경쟁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나우누리 천리안 하이텔 등 국내의 대형 PC통신망을 일주일 정도 부지런히 들락거리면서 파악한 우리 PC통신의 현실은 초창기 '가능성의 매체' 로서 품었던 기대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김완섭과 신모라
우리나라에 PC통신이라고 부를만한 서비스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86년. 지금의 데이콤인 한국 컴퓨터통신이 한글 전자사서함을 개설한 때부터다. PC통신의 초창기는 발전적인 분위기였다. 통신 예절을 강조하는 글들이 통신란에 많이 올라와 있었고, 통신인들 간에 잘못을 지적하는 글의 태도도 진지했다. 컴퓨터 잡지에도 통신의 장점이나 예절을 강조하는 글들이 자주 실려 그런 분위기 조성을 도왔다.
이는 새로운 것을 먼저 접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호기심, 모니터를 통해서만 접하게 되는 상대방에게 혹시라도 실수를 범하지는 않을까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게시판에 글을 올렸을 때나 대화방에서 만날 때 ID와 이름을 빼고는 전혀 성별이나 나이 직업 등 어느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 익숙치 못한 터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이름 끝에 '님' 자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 기본 상식이었다.
그런데 '천리안 매직콜' 의 유료 사용자만도 7월말 기준으로 30만명을 넘어섰다는 지금의 PC통신망은 어떠한가. 양적 성장이 반드시 질적 성장까지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요즘 게시판이나 대화방에서는 조심스럽고 우호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상대를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의 주장만을 일방통행으로 쏘아대는 글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런현상은 올리는 글도 많고 조회수도 가장 많은 플라자나 나눔의 터, 대화방 등에서 유난히 심하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사례가 최근 몇 달간 통산가 최대의 화젯거리였던 '김완섭' 과 '신(정)모라' 라는 두사람의 '성 논쟁' 이다. 논쟁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꺼림칙 할 정도의 공방이었지만 어찌되었든 논쟁이라고 하자.
이들은 '나우누리' '천리안' '하이텔'이라는 3대 대형 통신망을 수시로 넘나들면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 성과 관련한 서로의 주장을 담은 글을 끝없이 올렸다. 글을 올린 횟수나 수준은 그렇다 치더라도 진짜 문제는 논쟁을 벌이는 상대와 그 게시판을 읽어야 하는 또다른 사용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게시물은 폭발적인 조회수를 자랑했고 PC통신망을 온통 김완섭과 신모라로 뒤덮어버렸다. 이미 오래전에 운동권에 대한 비난의 글로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며 몇몇 잡지와 인터뷰까지 하면서 '통신가의 스타' 로 등장한 김완섭씨는 이번에는 신모라와 벌인 성 논쟁 등 이야기를 묶어 '창녀론' 이라는 책까지 출판한 기이한 인물이다. 신문에 실리는 책 광고에는 '통신가의 마광수' 라고 그를 부추기고 있기까지 하다.
이에 비해 신모라씨는 많은 이들의 반발을 사면서 여전히 독선적인 생각을 담은 게시물을 올리면서 스스로 굉장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여성(어떤 이들은 여자인지조차 의문을 제기한다)이다.
설상가상으로 두사람이 시작한 논쟁의 여파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지지나 반대, 혹은 비난의 입장을 밝히는 글들이 속속 게시돼 게시판을 심각한 오염상태로 몰고 가고 있다. 이런 글들은 두사람의 무책임한 논쟁만큼이나 원색적이고 수준 이하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요즘은 '완서비 책에서 퍼온 글'이라는 노골적인 성과 관련한 저질의 글들이 다시 게시물로 올라와 있는 상황이다.
'신모라'와 '김완섭'이라는 단어는 일단 높은 조회수를 보장해 준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자신의 글이 높은 조회수를 자랑하는 즐거움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흥행을 걱정하는 영화 제작자들이 미친 듯이 유명 탤런트를 고집하는 현상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런 글의 범람은 이들과 관련 없는 게시물 까지도 상당히 파괴적으로 몰고 가면서 생산적인 주제나 진지한 고민에 대한 글들을 점차 사라지게 하고 있다, 설령 올라와 있다고 해도 조회수가 형편없다.
범죄로까지 발전
대체 이런 분위기를 저지할 방법은 없는가. 아니, 그보다 먼저 왜 이런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인가. 그 밑바닥에는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익명성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PC통신은 매체의 성격상 사전 통제가 전혀 불가능한 무방비 공간이다. 이 점은 PC통신 공간에 대한 기대와 동시에 우려를 낳게 하는 부분이다. 이런 우려를 반영한 다음과 같은 계도의 글이나 경고성 메시지들이 PC에 등장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 불량대화자는 대화/토론(PCMEET) '대화 피해자 신고'에서 접수 받습니다.
* 전화/우편/컴퓨터 통신을 통한 음란행위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백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습니다.
* 물품거래를 하시기 전에 반드시 게시판에 게재한 사람의 인적사항 및 물품 내역을 확인하시기 바라며, 물품을 거래할 경우 에는 우편 거래나 온라인 입금거래를 하지 마시고 가급적 직접 만나서 거래를 하시기 바라며, 뜻밖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글은 다른이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준비되었다면 지금 두들기십시오. 활짝 열려 있습니다. 단! 나 아닌 남을 볼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정도로 난장판 분위기를 잠재우기는 어렵다. 게시물 삭제나 ID박탈과 같은 제재 조치도 결코 뛰어난 처방으로 보기 어렵다. 게시물은 다시 올리고 ID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도 얼마든지 다시 부여받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통신공간에서는 누구도 이름과 접속 ID외에 자신을 밝힐 의무가 없다. 프로필을 공개해 주는 PF명령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그나마 그것도 비공개를 선택할 수 있다. 설령 정보가 공개된다고 해도 얼굴을 숨기고 싶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초기에는 이런 익명성이 낯선 사람들간의 의사 소통에 있어서 쑥스러움을 해소해주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사용자도 늘고 서비스도 정착되는 단계에 이르면 오히려 공공 측면에서 원활한 의사 교환과 건전한 비판을 주고 받는데 저해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PC통신 공간의 익명성은 이를 이용한 범죄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대화나 게시물 중에 욕설과 성희롱,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 것과 같은 '가벼운 범죄'로부터 신문의 사회면에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심각한 사기사건, 통신을 인연으로 하여 만난 사람을 성폭행하는 사건, 한 컴퓨터 기업사용자들이 모인 사설 BBS를 통해 성희롱을 당한 여학생의 자살 사건, 21살의 학생이 홈뱅킹서비스가 가능한 회원들의 ID와 비밀번호를 해킹하여 불법으로 예금을 가로챈 범죄 등도 모두 자신이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저지른 사건이었다.
PC통신 공간에서 발생하는 이런 문제의 원인에는 공적, 사적 영역 구분이 모호하다는 PC통신 공간의 특수성이 자리잡고 있다. 사이버스페이스가 아닌 현실의 공간에서는 그래도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구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공간에 걸맞은 글이나 대화, 표현양식에 따라 꾸려져 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PC통신 공간은 어떤 공간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실로 모호하기 짝이 없다.
PC은 들어갈 때는 주로 '집' 이라고 하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시작된다. 시간도 주로 자정을 전후로 한 은밀한 시간이다. 그렇지만 일단 진입한 이후의 행동은 수만, 수십만을 대상으로 한 공적인 행위로 분류 되어야 한다. 사람의 공간이동은 전혀없는 상태인데도 행위의 결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공적인 공간에서 하는 행위가 공적인 것이 되고 사적인 영역의 행동이 사적 행위가 되는 일상의 관례와 달리. PC통신이라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이런 공식이 들어맞지 않는다. 같은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도 전자우편을 통해 개인 편지를 보내는 지극히 사적인 행위를 하다가도 몇 초만에 게시판이나 토론장에 글을 올려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공적인 행위를 하곤 한다. 이런 상황이니 많은 사람들이 PC통신 공간에 적당한 준거의 틀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프로필을 공개합시다"
이런 저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PC통신이란 화두를 놓지 못하고 계속 거론하는 것은 그만큼 PC통신이란 매체와 그것이 엮어내는 공간의 가능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미디어의 철학' 이란 책을 통해 새롭게 등장하는 뉴미디어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바 있는 마크포스터가 "프랑스 국민에게서 '언론의 자유' 는 미니텔의 메시지 서비스를 통해 실로 완전히 구현된 것이다" 라고 했다는 단정에 우리도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냐' 는 우리 조상들의 속담은 우리들의 논의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의 글이 쏟아지고 정보가 올라오는 PC통신은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자신의 생각을 대중에게 발표하고 평가받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 생각이나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공간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고 더욱 좋은 공간으로 창조해낼 방안을 모색하는 쪽이 현명하다.
그 첫단계로 PC통신 공간의 무조건적인 익명성, 즉 사용자들의 '베일걷기'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창기 어느 컴퓨터 전문가가 주창했던 캠페인을 생각해보자. 그의 주장은 "프로필을 공개합시다!" 였다.
걸러지지 않는 욕설과 천박하기 짝이 없는 비논리적인 견해를 공론화시키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을 모두 공개 마당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욕설과 외설과 무책임으로 오염된 PC통신에서도 좀더 정제된 견해와 정보의 교환이라는 PC통신 본래의 미덕이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