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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좌우한 최초의 항생물질 페니실린


페니실린의 발견자 알렉산더 플레밍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 약효를 입증한 플로리와 체인. 페니실린의 진정한 발견자가 누구냐는 의견이 분분했다. 과정이야 어쨌든 그들의 연구 열정은 인류에게 항생물질이라는 매우 유익한 선물을 안겨줬다.

페니실린과 프론토질은 박테리아 전신감염에 듣는 항균제다. 페니실린은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프로톤질은 1932년 게르하르트 도마크가 발견했다. 다 같은 항균제이지만 합성물질인 프론토질과 비교해 페니실린은 미생물의 대사산물인 점에서 항생물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최초의 항생물질 페니실린은 항생물질 시대를 개막하는 신호탄이었다. 발견연대로 보면 페니실린이 프론토질보다 먼저 개발된듯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임상적으로 프론토질은 1935년 공급된 반면 페니실린은 제2차 대전 중에야 약으로 나왔다.

페니실린의 약효를 밝혀낸 사람은 옥스퍼드의 하워드 플로리와 언스트 체인이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뒤 12년이 흐른 후의 일이다. 이 때문에 플레밍을 페니실린의 진정한 발견자가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1881년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한 플레밍은 13세때 런던으로 와 상업학교를 다녔다. 그 후 선박회사의 서기로 취직했으나 남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보어전쟁(1899-1902)이 그의 일생을 바꿔 놓았다. 그는 제대 후 선박회사에 돌아가지 않고 의사가 될 생각을 했다. 1906년 성메리병원 의과대학을 졸업 후 그는 군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격솜씨 때문에 사격팀의 일원으로 병원에 남을 수 있었다.

성메리 병원의 접종과에서 플레밍은 조수로 출발했다. 접종과를 맡고 있던 암로스 라이트는 면역접종에 깊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접종과는 면역백신을 제조, 판매해 병원 운영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플레밍은 라이트교수 밑에서 미생물학을 연구해 1908년 강사가 됐고 교수의 길로 들어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플레밍은 프랑스 부르고뉴 근처 병원에서 미생물학자로 일했다. 그는 감염으로 죽어가는 많은 총상환자를 접했고 당시 소독제로 사용되던 석탄산을 상처 부위의 깊은 곳까지 주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로 소독제는 박테리아와 싸우는 백혈구를 파괴해버려 치료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18년 성메리병원으로 다시 돌아온 플레밍은 소독제가 가진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이상적인 항균물질을 찾기 시작했다. 플레밍의 연구습관은 독특했다. 미생물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험에 사용한 배양접시는 즉시 소독제에 담군 후 세척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러나 그는 배양접시를 2-3주 그대로 놓아두곤했다. 그래서 40-50개의 배양접시가 실험대에 쌓이면 하나 하나 확인하면서 이상한 현상이 없나 살핀 후 처리했다.

주위 사람의 눈에 플레밍은 '게으른' 과학자였다. 실제로 그가 게을러 그런 식으로 실험실을 운영했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창조적 발견에 일정한 모범답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플레밍식 연구습관에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1921년에 플레밍은 지저분한 실험실에서 눈물 콧물을 박테리아와 함께 배양한 접시를 동료에게 보여주었다. 이들 분비물 근처의 박테리아가 죽어있었다. 그는 박테리아를 녹여버리는 성분이 계란 흰자위에도 있음을 발견했다. 결국 플레밍은 1922년 라이소자임의 발견자가 됐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후까지도 라이소자임의 작용메커니즘을 규명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이 실패를 플로리와 체인이 해결함으로써 인류는 항생물질이라는 유익한 선물을 받게됐다.

발견 순간에 인정 못받아
 

유명한 알렉산더 플레밍의 배양접시. 윗부분에 곰팡이가 있고 주위에 박테리아가 자라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28년 여름 휴가를 떠나기 전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청탁받았다. 그는 원고를 쓰면서 문헌에 발표된 애매한 내용을 분명히 할 생각으로 몇 종류의 균주를 배양해 실험했다. 그리고 배양접시를 실험대 구석에 방치해 둔 채 휴가를 떠났다. 당시 바로 아래층 실험실에서는 곰팡이 알레르기 치료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 실험실의 곰팡이가 플레밍 연구실 창문을 넘어와 배양접시를 오염시켰다. 마침 날씨가 무덥지 않았으므로 곰팡이가 잘 자랐고 이때 자란 곰팡이는 나중에 페니실린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날씨가 무더워지면서부터는 박테리아가 잘 자랐다.

9월 3일 휴가에서 돌아온 플레밍은 세척을 하려고 배양접시를 소독제 속에 넣다가 우연히 오염된 곰팡이 주위의 박테리아가 죽어있는 반점을 발견했다.

플레밍은 아침이면 다른 실험실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바로 그날 아침에도 다른 실험실에 들러 "이상하게 곰팡이 주위의 박테리아가 죽어있다" 는 말을 했다. 주위 사람들은 플레밍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게을러서 오염시킨 곰팡이가 도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좀더 가치있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플레밍의 얼굴을 멀건히 쳐다볼 뿐이었다.

플레밍은 미생물학자였다. 그는 배양접시를 오염시킨 곰팡이를 플라스크에 넣어 배양했다. 이미 그 곰팡이가 페니실리움 속(屬)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배양 플라스크에 페니실린(penicillin)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는 배양액을 사용해 여러 균주의 효과를 시험했다. 라이소자임보다는 연쇄상구균 포도상구균 폐렴균 뇌막염균 등 많은 균에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플레밍은 배양액 속에서 항균력을 보이는 물질을 분리하지 못했다.

의사이기도 했던 플레밍은 페니실린의 임상적 가치를 확인해 보았다. 1928년 12월 실험에서 소독제와는 다르게 백혈구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으나, 페니실린은 상처부위까지 침투하지는 못했다. 토끼에게 주사후 혈액을 확인한 결과 너무 빠르게 항균력이 소실돼 버렸다. 이것은 현대과학적으로 판단하면 그리 치명적 문제는 아니였으나 당시 플레밍의 지식으로는 낙심할 만했다.

1929년 1월 배양액을 비강염증환자와 패혈증 조짐이 있는 다리절단 환자에게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폐렴균이 감염된 각막염환자는 효과가 있었는데도 그냥 지나쳐 버렸다.

플레밍은 1929년 2월 13일 성메리병원 세미나에서 페니실린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접종과에서 생산하던 파이퍼균 백신 제조시 포도상구균의 오염을 제거하는 데 페니실린이 사용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뿐이었다.

1929년 5월 논문이 발표됐으나 이미 곰팡이 배양액이 항균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드물기는 하지만 이미 보고돼 있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페니실린을 되살린 플로리와 체인
 

균주를 배양해 항생물질 생산능력을 시험하는 장면.


플로리는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 의과대학을 마친 후 영국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1935년 그는 세필드대학에서 옥스퍼드 병리학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1936년 유태인 생화학자 체인을 고용했다. 체인은 베를린 출생으로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영국으로 이민해 케임브리지에서 박사학위를 한 후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플로리 연구실로 온 것이다.

플로리는 체인에게 라이소자임의 항균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연구를 맡겼다. 연구 결과 라이소자임이 박테리아의 세포벽을 구성하는 다당류를 절단시켜 분해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 연구과정에서 자연히 플레밍의 페니실린 논문을 접한 체인은 페니실린이 라이소자임과 유사하다고 생각했고 플로리에게 연구할 뜻을 말했다.

실제 라이소자임은 단백질이므로 페니실린과는 다른 것이다. 플로리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둘다 천연항균제인 이상 연구가치가 있다면서 연구를 허락했다.

약발견과는 관계없는 순수과학적 동기로 출발한 연구였으나, 하여튼 1938년 여름 체인은 페니실린 분리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에는 체인 뿐만 아니라 유능한 화학자인 에드워드 에이브러햄, 노먼 히틀리도 큰 역할을 했다.

1940년 3월 중순까지 아주 불순한 1백mg의 페니실린 분말을 얻었다. 같은 해 5월 플로리는 이것을 악독성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생쥐에게 투여했다. 효능은 탁월했다. 간략한 첫번째 연구논문이 1940년 8월 발표됐다.

이제 임상시험을 위해 다량의 페니실린이 필요했다. 플로리 연구실은 소규모 공장으로 변했고 연구원들은 밤낮으로 일했다. 흡착크로마토그래피를 도입, 분리법을 개선하는 등의 노력 끝에 순수한 페니실린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얻어진 페니실린은 1941년 2월 포도상구균에 감염된 43세의 경찰관 알렉산더를 처음으로 여러 환자에게 시험됐다. 임상효과를 포함한 자세한 두번째의 논문이 1941년 8월 발표됐다. 임상시험 확대는 제약회사의 도움이 필수적이었으나 아직 영국에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41년 6월 27일 아침 독일 폭격기가 영국 도시를 폭격하는 가운데 플로리와 히틀리는 미국으로 향했다. 여행경비는 록펠러재단이 제공했다. 미국 정부의 도움으로 페니실린은 미국 제약회사에서 대량 생산됐다. 부상자를 치료하는 데 탁월한 페니실린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물론 영국의 제약회사도 차츰 참여했다.

진정한 발견자는 누구

플레밍을 페니실린의 발견자라고 언론에서 부각시키는 데 대해 체인은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하지 않았다" 라고 주장했다. 플레밍 자신도 "나는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라고 말했다. 플레밍만이 페니실린의 발견자라고 알려진 데는 '언론 플레이' 라는 시각이 정확하다.

1940년 8월 플로리와 체인의 첫번째 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플레밍이 그들을 찾아갔을 뿐. 플로리와 체인은 플레밍의 존재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그가 살아있는지 조차 몰랐었다. 플레밍은 공장을 전부 돌아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떠났다.

1년 뒤 임상결과가 실린 플로리와 체인의 두번째 논문이 발표되자 '타임'지는 옥스퍼드의 연구에 관한 사설을 실었다. 사설을 읽은 당시 81세의 라이트(플레밍의 은사)는 신문사에 편지를 써 실제 페니실린의 발견자는 플레밍이라고 주장했다. 신문기자들은 즉시 성메리병원에 몰려들어 플레밍을 인터뷰하고 그의 기사를 실었다.

그러자 옥스퍼드의 로버트 로빈슨(1947년 노벨화학상 수상)교수도 타임지에 편지해 "플로리팀이 아니었으면 페니실린이 발견되지 못했을 것" 이라고 반박했다. 기자들은 다시 플로리 연구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플로리는 기자들을 만나주지 않았고 연구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그는 신문에 기사를 싣는 것은 값싼 행위이고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플레밍은 자신의 초기연구와 플로리팀의 연구내용을 기자들에게 알려주었다. 결국 플레밍 플로리 체인이 1945년 노벨의학상을 공동 수상할 때에도 플레밍은 헤드라인으로 장식된 반면 플로리와 체인은 작게 기사화됐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중요한 교훈이 아니다. 예리한 호기심으로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향상된 약 발견을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만이 가치가 있을 뿐이다.

플레밍의 페니실린(페니실린 G)은 내성균주에 잘 듣지 않았고 주사로만 투여해야 했으며 제한된 균주에만 효과가 있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위해 페니실린의 일부 구조를 바꾼 암피실린 클록사실린 아목시실린 등의 반합성 페니실린이 1960년대부터 시장에 나왔다.

용어설명
라이소자임(Lysozyme) : 외부와 접촉하는 점막에 존재하는 단백질 효소의 일종. 눈물 콧물 침 우유 계란흰자 등에 존재한다. 이 효소는 공기에 의해 운반되는 박테리아의 세포벽을 파괴해 감염을 막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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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강건일 약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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