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에서 신화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 루이 파스퇴르. 그는 뛰어난 과학자이긴 했지만 경쟁자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사람들을 속이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은 그가 남긴 1백2권의 노트를 조사한 한 과학사가에 의해 밝혀졌는데….
지난 5월 출판된 수정주의 역사학자(revisionist history)의 발표에 따르면, 과학사에 있어 신화적인 인물의 하나인 루이 파스퇴르는 연구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경쟁자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한다. 그는 또한 현대에는 사기나 과학적 협잡으로 여겨질만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였다. 이같은 사실들은 파스퇴르가 연구과정에서 남긴 노트를 조사함으로써 밝혀졌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 제랄드 L. 가이슨(Geison) 박사가 쓴 '루이 파스퇴르의 비밀스런 과학'은 한세기 이상 보존되어온 파스퇴르의 1백2권의 연구노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숨기는 것이 많았던 파스퇴르는 외부인에게 그의 자필노트를 보여주지 말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한 상속인이 그 공책들을 파리에 있는 국립 도서관에 기증했고, 도서관 측은 1970년대 중반부터 이것들을 학자에게 공개해왔다.
가이슨 박사는 연구노트에 기초하여 조사연구를 하는 몇 안되는 과학사가 중의 한사람이다. 그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파스퇴르의 경우, 발표된 저술 및 널리 알려진 진술과 공책에 기록한 것 사이에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것이 과학자와 사학자, 혹은 기자들이 역사상의 중대한 발견이나 그 발견자에 대한 미신을 산산조각낸 유일한 예는 아니다. 이들의 폭로는 과학은 그렇게 객관적이거나 정연하지도, 양심적이고 정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연구노트란 과학자가 매 실험의 목적과 실험재료, 방법 및 실험결과와 그 결과의 해석을 기록하게 되어 있는 곳이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전세계 연구실에서 계속되고 있는 과학계의 가장 오래된 전통 중 하나인데, 연방 보조금(Federal grants)의 수혜자에게 조차도 이런 연구노트가 꼭 요구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전통은 지켜지고 있다.
발견에 이르기까지의 사고의 흐름, 발견자의 창의성, 이를 둘러싼 주변 상황 등은 과학 연구에서 가장 덜 알려진 부분중 하나다. 과학 출판물은 이야기의 일부만을 알려줄 뿐이다. 만약 연구노트가 더 자주 검토된다면 일반인들은 발견 과정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식은 또한 과학연구가 순수하고 흠 잡을데 없을것이라는 환상을 깨뜨리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대중이 과학자에 대해 달성할 수 없는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는 그들의 실수나 부정 행위가 드러났을 때 배신당한 듯이 느끼는 것을 방지하도록 도와줄지도 모른다.
연구노트는 발표된 보고서의 진실성을 입증할 수 없는 경우나 과학자들의 정직성과 성실성에 대한 논쟁이 촉발됐을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MIT 대학 테레사 이마니시-카리의 연구노트는 1986년 그녀가 노벨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볼티모어 박사와 함께 세포(Cell)지에 기고한 논문 결과와 차이가 있다는 점이 일련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조사 결과 그녀는 연방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연구에 10년 동안 참가할 수 없게 조처되었다.
1백 2권의 연구노트
발효와 질병에서 미생물학 이론을 확립하는데 기여한 파스퇴르는 1881년 수의학과 의학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예방접종에 알맞도록 세균을 산소에 노출시킴으로써 독성을 줄이려고 시도했다.
당시 양들의 주요 사망원인은 탄저병으로, 탄저병을 예방하는 문제는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손익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탄저병 예방백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파스퇴르는 자신이 그 1년전 닭콜레라 백신을 만들 때 사용했던 방법을 응용했다. 경쟁자들보다 앞서나가기 위해 파스퇴르는 닭콜레라 백신 제조과정에 사용했던 간단한 방법을 일부러 발표하지 않았던 것이다.
탄저병 백신이 실용화 단계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파스퇴르는 세계 최초로 실험단계의 백신을 시험해보자는 공개도전을 충동적으로 받아들였다. 파스퇴르의 조수는 양 25마리에게 그의 처방을 주사하고 다른 25마리에게는 아무 처치도 하지 않았다. 그후 50마리 모두에게 독성이 있는 탄저병 세균을 주사하자 결과는 그의 승리로 나타났다. 예방접종을 한 양들만이 살아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연구노트는 파스퇴르가 거짓말을 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백신이 탄저병 세균을 산소에 노출시킴으로써 만들어졌다고 공공연하게 말했으나 사실 그는 은밀히 그의 라이벌이며 수의사인 장 조셉 투쌩(Jean Joseph Toussaint)이 사용한 방법, 즉 중탄산칼륨이라는 화학물질을 사용한 기법에 의존해 그 백신을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파스퇴르의 방법, 즉 산소를 이용한 방법으로 탄저병 백신이 생산되기는 했다. 그것은 그가 백신 생산 독점권를 획득한 이후의 일이었다.
파스퇴르의 마지막 승리는 광견병 백신 개발이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실험 이전에 그는 공언한 대로 동물 광견병을 치료하려 시도했다.
그가 했던 가장 유명한 실험은 조셉 메이스테르라는 어린 소년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그 소년은 광견병에 걸린 개에 물려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파스퇴르에게 자식을 치료해 달라고 애원했다.
파스퇴르는 그 이전에 자신의 광견병 백신으로 단 한건의 실패도 없이 개 50마리를 치료한 바 있다고 보고했었다.
다시 한번 연구노트는 이 설명에 오류가 있음을 보여준다. 파스퇴르가 개를 대상으로 백신을 실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메이스테르에게 주입한 백신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또한 그는 백신이 효과를 나타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동물실험 결과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추측은 맞아 떨어졌다.
파스퇴르는 의사라기 보다는 화학자로 그의 광견병 백신 실험과 같은 인체 실험이 오늘날의 생각처럼 비윤리적이라 보기 보다는 대담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활동한 선구자였다.
만일 오늘날이었다면 이 실험이나 그의 유명한 다른 실험들을 수행하려면 파스퇴르는 몇몇 인체 실험위원회와 식품 의약국의 승인을 포함하여 많은 연방 정부의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했을 것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
연구노트는 과학자들이 논문으로 발표하기 이전의 통계 처리하지 않은 연구자료를 보존하는데 있어 필수적이다.
"연구 자료를 분석하는 과정 중 원래의 연구노트로 되돌아가보면 때로 실험결과에는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잊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는 수도 있다"고 뉴헤이븐 소재 예일 대학의 바이러스 학자 조지 밀러 박사는 말했다.
"과거에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고 어떤 실험에서 만들었던 생성물이나 바이러스 균주를 되찾을 수 있는 체계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것들을 추적하여 다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좋은 연구노트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밀러 박사는 그가 사표로 삼고 있는 존 엔더스 박사로부터 배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엔더스약사는 홍역과 소아마비 백신 개발의 기초가 된 발견을 한 하버드 대학의 바이러스 학자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노트를 작성한다. 유달리 강박적으로 노트를 쓰는 사람도 있다. 범위도 수수께끼같은 간단한 기록에서부터 광범위한 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연구노트를 작성하는 방법은 부분적으로 연구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엔더스박사는 나중에 순서가 바뀌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본된 공책을 사용할 것을 고집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은 컴퓨터로 그린도표와 다른 자료들을 끼워넣기 쉬운 날장으로 철하는 공책을 사용한다.
일부 과학자들은 한때 다른 과학자들과 주고 받은 모든 서신을 공책에 풀로 붙이고는 했다. 그러나 전화나 전자우편으로 주고 받은 정보는 공책에 끼워넣을 수 없다. 몇몇 학자들은 실험에 대한 생각이나 대화, 분석에 관계된 것만 모아 다른 공책에 기입하기도 한다.
런던에 있는 암 연구소의 중역이며 저명한 바이러스 학자인 로빈 바이스 박사는 산업체에서 훈련받은 연구자들이 대학에서 훈련받은 사람들보다 더 상세한 연구노트를 적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학계에 있는 과학자들은 철저히 훈련받은 바도 없고, 단련도 덜 되어 있기 때문에 때때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대학이나 정부 관리들이 과학자의 발견이나 연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도 학자들이 연구노트를 작성하는 또다른 주요 원인이다.
논문의 정확성 여부는 그 실험을 반복한 다른 학자들에 의해 확인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발표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재연할 수 없을 경우, 실험 결과들이 불일치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꼼꼼하게 연구노트를 작성하는 것이 좋다"고 샌프란시스코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소속의 AIDS 연구자인 제이 레비 박사는 말했다.
"나는 나의 연구원들에게 지금 행해지고 있는 연구의 어떤 연구노트도 연구실 밖으로 갖고 나가서는 안되고 그것들을 보려면 그들이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레비 박사는 덧붙였다.
이 규칙은 한 연구원이 연구소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노트를 도난당한 뒤부터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그가 가방에 너무나 필사적으로 매달렸기 때문에 강도는 그 안에 아주 값비싼 것이라도 들어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같다"고 레비 박사는 말했다. 그 연구노트는 영영 되찾지 못했고, 그 과학자는 똑같은 연구를 되풀이하느라 몇달을 허비해야만 했다.
세속적으로도 성공한 과학자
가이슨 박사는 파스퇴르가 실험가이자 이론가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공적이 경시되어서는 안된다고 결론지었다.
파스퇴르는 또한 언변이 뛰어나고 홍보에도 능했다. 이 또한 과학의 중요한 단면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라도 경쟁자를 앞지르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규칙을 무시하는 도박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파스퇴르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처럼 파스퇴르도 정부와 산업체의 보조금에 의존했으며 특허권과 상금으로 수입을 늘렸다. 한때 파스퇴르는 프랑스 정부가 주는 보조금의 10%를 받았다.
프랑스 국민들의 성금으로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와 다른 나라의 자매 연구소들이 세워졌다. 1895년의 파스퇴르의 장례식은 프랑스 정부가 비용을 지불하는 국장으로 치러겼다.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AIDS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분리해내는 등 많은 발견을 한 파스퇴르 연구소에 그는 묻혀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모든 찬사에도 불구하고 파스퇴르 연구소는 속임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