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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5 암 억제·유발의 두얼굴 p53을 찾아라

암과 p53의 관계는 매우 복잡해서 양자가 적인지 동지인지 구분하기조차 쉽지 않다. 암발생을 막는 제동장치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암 유발을 돕는 가속장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정상적인 p53은 암을 억제하고 돌연변이된 p53은 암을 촉발한다.

무한궤도를 질주하는 암세포. 비유하자면 제동장치가 고장난 자동차와 흡사하다. 그래서 최근 암관련학자들은 암세포의 증식을 막아주는 일종의 브레이크를 찾는 일에 열중이다. 현재 이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물질은 p53이라는 우리 몸속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단백질.

p53이라는 이름은 그것의 본체가 단백질(protein)이고, 그 질량이 53킬로달톤(kilidalton)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또 p는 예방(prevention)의 머리영문자이기도 하다. 아마도 암을 막아 준다는 뜻일 것이다. 무게가 겨우 수십킬로달톤이라면 분명이 p53은 마이크로 세계의 물질이다. 1달톤(dalton)이 겨우 수소 1원자의 질량에 불과하므로 엄청나게 작은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79년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 물질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암과 관련된 수많은 물질들 가운데 하나로만 여기고, 그 실체를 캐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는 학자가 없었다. 발암유전자(oncogene)가 암연구의 주축을 이루었던 1980년대에는 p53는 관심 밖의 존재였다. p53이 암세포의 증식을 촉진하는 발암유전자의 하나인 것으로는 평가되었으나 그보다 훨씬 흥미로운 발암유전자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10년의 무명시절을 보낸 p53은 1989년에 운명의 전기를 맞는다. 대장암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그 암세포 안에서 p53의 돌연변이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곧 이어서 p53이 돌연변이 되면 암이 발생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와 아울러 정상적인 p53은 오히려 암의 증식을 억제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파필로마바이러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p53의 변이가 생길 수 있다.


1993년, '올해의 분자'로 선정돼

"쉽게 말해 p53은 발암억제유전자(tumor suppressor gene)입니다. 정상인의 몸에는 이 물질이 다량 존재하기 때문에 암의 발생이 억제되지만 어떤 이유로 p53이 손상되면 항암기능이 상실되기 때문에 암이 유발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암을 일으키는 발암유전자(oncogene)와는 성질이 다른 물질이라고 봐야 합니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면역학자 우희종 교수의 말이다.

원자력병원 내과 김창민박사로부터 언제, 왜 p53이 손상되는가를 들어보자.

"p53이 구조적 또는 기능적 이상을 일으키면 세포증식의 억제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구조적 이상이란 발암억제유전자(p53)가 소실되거나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것을 뜻하지요.

간암의 경우 아플라톡신(aflatoxin) B1이라는 곰팡이 독소에 노출됐을 때 체내의 정상적인 p53에 점변이(point mutation)가 일어나는 것이 관찰됐습니다. 그리고 p53의 돌연변이는 발암물질을 장기간 섭취하거나 몇가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경우에 나타날 수 있어요. 최근에는 흡연과 p53의 돌연변이가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p53의 기능적 이상이란 p53의 분자생물학적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제 기능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MDM2라는 발암유전자가 p53에 달라 붙으면 유전자의 소실이나 돌연변이는 목격되지 않지만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하지 못하지요."

이제 p53은 암정복의 중요한 도구로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수많은 학자들이 이 물질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여기에는 종양학자, 세포생물학자, 바이러스학자, 역학자, 환경학자 등이 포함된다. 지난 해에는 각종 전문지에 실린 p53 관련논문이 1천편을 넘을 정도로 대단한 열기를 보였다. 미국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Science)는 '1993년, 올해의 분자'로 p53을 선정했다.

암과 p53의 관계는 매우 복잡해서, 양자가 적인지 동지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p53은 암발생을 막는 제동장치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암을 일으키는 가속 장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정상적인 p53은 암을 억제하고, 돌연변이 된 p53은 암을 촉발한다.

이상이 없는 p53은 세포의 비정상적인 분열과 증식을 억제하는 기능을 지닌다. 또 유전물질인 DNA가 미친 듯이 증폭되는 것도 막아준다. 1992년 말, 유전적인 조작을 통해 p53을 체내에서 조금도 생산하지 못하도록 한 생쥐들을 대상으로 매우 의미있는 실험이 실시됐다. 이 생쥐들은 태어날 당시에는 전부 정상적인 상태였다. 하지만 6주후부터 암에 걸리기 시작했고, 생후 6개월이 되기 전에 모든 생쥐들이 암으로 죽었다.

또 1993년에는 한 발암유전자가 p53에 의해 무력화되는 것이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이렇게 정상적인 p53은 우리 몸의 암방어군으로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게놈(genome)의 보호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p53을 구성하는 3백93개의 아미노산들(단백질은 아미노산의 결합체) 중 단 한개만이라도 변이를 일으키면 상황은 완전히 역전된다. 돌연변이된 p53은 차라리 없는 것보다 더 해롭다. 연구자들은 인간의 암 가운데 51종이상의 암이 p53의 돌연변이에 기인하다고 주장한다.

p53과 관련된 암들을 열거하면 마치 인간의 주요한 장기를 총망라한 느낌이 든다. 뇌종양 유방암 방광암 결장암 자궁경관암 폐암, 식도암 후두암 간암 난소암 췌장암 전립선암 피부암 위암 갑상선암 등이 그 영향권 안에 든다. 또 호지킨병 T세포림프종, 몇몇 백혈병 등 혈액암의 발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직장·결장암의 70%, 폐암의 50%, 유방암의 40%가 돌연변이된 p53과 관련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매년 전세계에서 암환자로 진단되는 6백5십만명 가운데 약 반수가 돌연변이된 p53을 자신의 세포 내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고장난 p53은 암유발에 관한한 약방의 감초이다.

"암의 종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약 50%의 암발생이 p53의 고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의 암발생 원인은 p53으로 설명되지 않지요. 학자들은 이렇게 p53과 무관한 암의 발생원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고 있지요"

서울대 의대 허대석교수(내과)의 말이다.

연세암센터의 김주항교수는 금년 3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미국 암학회에서 한국의 위암 폐암 간암환자를 대상으로 비정상 p53를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다음은 그의 연구 결과.

"연세의료원에서 치료받은 위암환자 3백4명 가운데 비정상 p53을 지닌 사람은 1백29명(42.4%)이었습니다. 또 폐암환자 75명 중 27명(36%)이, 간암환자 12명중 1명이 손상된 p53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김교수가 비정상 p53을 식별해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면역조직 화학적 염색법. 염기서열을 직접 확인한 결과는 아니다.
 

p53이 p21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밝힌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의 버트 보겔스타인 박사


암의 진단과 예방에 유효

앞으로 p53의 실체를 보다 자세히 밝혀낸다면 암의 진단 치료 예방에 있어서 절대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돌연변이된 p53을 암발생 초기에 찾아내 암세포가 퍼지기 전에 조기치료를 할 수 있다. 이때 암환자의 예후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세포 내에 p53 돌연변이물질이 많으면 악성암일 소지가 크며, 신체 다른 부위로의 전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반대로 돌연변이된 p53의 수가 적으면 희망적인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p53을 암의 조기 진단용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미 암조직을 몸에 지니고 있는 환자에게서만 고장난 p53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암 환자라 할지라도 그의 정상 조직에서는 비정상적인 p53을 찾을 수 없습니다."고 지적한 허대석교수는 "p53의 이상 유무를 알아내기 위해 현재 간단하게는 염색법, 보다 정밀한 조사를 위해서는 환자의 DNA를 추출한 두 염기서열을 결정하고 이미 알려져 있는 정상적인 p53의 염기서열과 비교하는 방법을 주로 활용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p53에 의해 유발된 암이라면 그 상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약을 개발, 암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약물은 문제된 p53내의 아미노산에 달라붙어 그것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도록 도와줄 것이다.

또 하나의 가능한 시도는 유전공학적으로 p53 또는 그 유전자(p53의 체내 생성을 주관하는)를 대량생산, 이 단백질이 돌연변이를 일으켰거나 부족한 사람에게 직접 주입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전자 치료의 투여물질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지난 해부터 14명의 말기 폐암환자들이 처음으로 p53 유전자치료를 받고 있는데 그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p53 유전자를 클로닝(cloning)하여 대량을 복제한 뒤 이것을 레트로바이러스(retrovirus)나 아데노바이러스(adenovirus)에 삽입합니다. 이를테면 이 바이러스들을 p53의 운반체로 활용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운반체에 실린 p53을 암환자의 몸에 투여하는 것이 유전자 치료법입니다."라고 설명한 김창민박사는 "현재 미국에서 MD 앤더슨 암센터의 잭 로스박사가 폐암 환자를 대상으로, 샌프란시스코 소재 캘리포니아대학(USCF)의 베눅박사가 간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유전자 치료를 수행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아직 정식으로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만약 김주항박사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다면 우리나라에서도 2,3년 후에는 p53 유전자 치료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네이처'(Nature)지 1994년 4월 21일자, '사이언스'지 1994년 4월 15일자에는 p53에 필적할만한―어떤 면에서는 능가하는―새로운 암제동물질을 발견했다는 논문이 실려 있다. 연구결과를 네이처지에 기고한 캘리포니아대학의 분자생물학자 쓰토무 노보루는 p16이라는 단백질이 p53과 비슷하게 암을 일으키거나 억제한다고 밝혔다. 그는 몇 종류의 흑색종 백혈병 폐암 등이 p16의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미국의 분자생물학자 알렉산더 캠 등은(사이언스지 수록) 신장암 방광암 유방암 흑색종 등의 발병과 p16의 돌연변이가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 단백질과 관련되 암발생이 전체 암발생건수의 58-75%를 점한다고 서술했다. 또 그들은 p16의 질량(16킬로달톤)이 p53보다 4배쯤 가볍고 p16을 생성하는데 관여하는 유전자도 마찬가지로 극미하기 때문에 유전자치료 시에도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즉 p16은 만들기도 수월하고 고장난 부위를 땜질하기도 용이하다는 것.

또 1993년 11월 셀(Cell)지에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의 버트 보겔스타인교수는 'p16과 p21을 체내생산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p53유전자가 있다고 밝혔는데 p16과 p21도 암의 증식을 억제하는 유력한 브레이크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국내에서 p16과 p21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서울대 의대 김영환교수(내과)는 p53과 p16 및 p21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p53은 세포의 DNA가 손상됐을 때 이 DNA를 정상복구시키는 기능을 지닙니다. 이를테면 고장난 DNA를 치료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때 p53은 수많은 DNA 치료기구들을 동원하는데 p16(MTS1이라고도 한다)과 p21(WAF1이라고도 한다)도 그 가운데 하나지요.

p21은 세포주기를 활성화하는 효소의 작용을 억제하여 결과적으로 세포의 분열과 증식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p53과 p16 및 p21은 세포의 증식을 억제한다는 점에서 공통되고, 작용부위가 서로 다르다는 점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p53, p16, p21이라는 항암군(軍) 3총사를 얻게 된 셈이다. 이밖에도 RB, WT1 등 지금까지 알려진 10여종의 암억제유전자들을 항암군의 대열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에 비해 현재 70여종의 발암유전자가 등록돼 있으므로 얼핏 생각하면 항암군이 절대 열세인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발암유전자와 암억제유전자가 서로 직접 대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우리 몸에는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암억제유전자가 수없이 존재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암억제유전자는 물론이고 발암유전자도 잘 활용하면 암정복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p53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연구팀은 그리 많지 않다. 서울대 의대 방영주교수팀, 김영환교수팀, 연세의료원 김주항교수팀, 원자력병원 김창민박사팀 등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연구팀들만이 이 분야에 적극적이다. 암관련 연구 가운데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p53이 웬지 국내에서는 홀대받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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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박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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