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객관적인 평가로 보아 현재의 아시아 과학기술은 한동안 구미 선진국을 능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국이 벌이고 있는 피나는 노력과 투자는 21세기 초반 의외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21세기 세계 문명이 아시아, 특히 극동 지방에서 만개할 것이라는 이른바 '문명 선진론'이라는 게 있다. 연금술을 비롯한 아랍권 과학이 르네상스를 통해 이탈리아로 건너가 프랑스로 전해졌으며 프랑스에서는 독일과 영국 두 나라로 나뉘어 전파된 다음 독일에서는 소련으로, 영국에서는 미대륙으로 건너갔으니 다음은 일본을 위시한 아시아-태평양으로 건너간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역시 아시아에 속해 있으니 듣기 좋은 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근대 이후 지금까지 드러난 아시아 제국의 모습을 보자면 문명이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표피적 현상만으로는 낙관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서구 국가들은 적어도 한 두세기 이전부터 자신들이 쌓아온 과학 유산을 성숙시켜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과학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할 만한 여유를 갖추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랑 사실이 무색하게도 오랜 기간 서구의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자국의 전통적인 과학문명조차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아시아의 과학은 단지 경제 발전을 위한 '도구'에만 머물러 '돈 되지 않는 과학'은 아예 그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는 처지에 빠짐으로써, 전체적인 '과학 마인드' 형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한 세대 뒤진 과학 마인드, 이것은 아시아 국가들이 각 분야에서 서구 선진국에 뒤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반도체 산업의 호황은 우리나라나 일본을 비롯해 동남아 등지까지, 아시아 전체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양과 질에서 서구에 밀려

미국 과학정보연구소(ISI)가 매년 발행하는 과학기술 논문 색인(SCI, Science Citation Index)은 각국의 과학기술을 비교 분석하는 자료로 자주 인용된다. SCI는 전세계에서 출판되는 6만여종의 과학기술 잡지 가운데 인용률 등 엄격한 자체 평가 기준에 따라 선별한 3천2백여종의 잡지에 실린 논문을 색인화한 것.

올 초 발표된 작년도 각국의 '성적'을 우리나라 과기처가 분석한 것에 따르면, 70만 5천3백18편의 전체 수록 논문중 미국이 26만7천1백15편으로 전체의 37.8%를 점유해 당당 1위를 차지했고, 그 뒤를 영국(6만5천1백59편, 9.2%) 일본(5만5천1백42편, 7.8%) 독일(4만9천5백52편, 7.0%) 프랑스(3만8천6백23편, 5.5%)의 순으로 좇고 있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각국의 성적은 여전히 '우등생'과는 현격하게 거리가 멀다. 전통적으로 기초과학이 강세를 보여온 것으로 평가되는 인도가 1만3천7백7편을 발표해 전체 12위를 차지했고, 중국(9천74편, 15위) 대만(5천6백73편, 20위)이 3천9백10편을 발표해 24위에 오른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30위 안에 드는 아시아 나라는 일본을 포함해 이들 5개 국가가 전부다.

논문 발표수 40위권 국가들의 인구 1만명당 국제 학술지 발표 논문수를 보면 아시아 국가들과 구미 국가들과의 격차는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전세계에서 10건 이상이 되는 나라는 모두 아홉인데, 이중 중동권인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럽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5.3) 일본(4.4) 홍콩(3.0) 대만(2.7) 등이 1건 이상씩을 발표했을 뿐이고 우리나라(0.9)와 중국(0.8)은 그나마 1편도 못되고 있다.

더구나 SCI분석 결과 상위 10위 안에 든 국가들의 위치는 93년도와 비교해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어 과학기술의 발전이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아시아 제국이 뒤로 한참 밀려 있는 것은 SCI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학술지'가 대부분 상위권을 차지한 국가들이 발행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양적·질적 평가는 굳이 이 자료가 아니더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상위권에 속한 나라일수록 연구개발 투자의 규모 역시 크기 때문이다.

94년도 일본과학백서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93년 과학 연구에 1천6백7억5천만 달러(약 1백28조원)을 쏟아부어 국민 총생산비중 연구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2.52%에 달하고 있으며, 일본은 92년도 기준으로 12조7천8백82억2천1백만엔(약 1백15조원), 동비(同比) 2.72%에 달한다. 이에 비해 그나마 아시아권에서는 상위 그룹에 속하는 우리나라가 92년 연구개발투자비로 총 4초9천8백90억원을 써 미국이나 일본 등의 20분의 1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아시아 과학기술은 세계를 선도할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또 그 잠재력은 현실로 발휘될 수 있는 것일까?

그래도 희망은 있다

한 나라의 과학기술력을 평가하는 요소인 인적자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과학기술계의 '맨파워'야 말로 열악한 현재의 여건을 극복하는 최대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발간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내 아시아-태평양계의 비율은 3%인데 반해, 과학 기술 분야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에 달할 만큼 아시아인의 과학적 두뇌는 결코 서구인들에 뒤지지 않는다. 도리어 서구인보다 더 과학적이며 구조적이라는 평가가 우세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렇듯 뛰어난 뒤뇌를 사장시키는 아시아 각국의 교육을 비롯한 제반 제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79년 아시아인으로는 드물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파키스탄의 압두스 살람의 경우를 보자. 그는 고국을 떠나 영국에서 유학하면서 입자 물리학 분야에 상당한 성과를 이루고 조국의 과학 연구 발전을 돕고 싶었으나, 허허벌판에 불과한 조국의 현실 때문에 결국 '학문을 위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파키스탄 최초의 노벨상 수상은 그가 공부하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이루어졌다.(과학동아 94년 11월호 특별기획 노벨상 도전 참조).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최근들어 '싹수를 지닌' 아시아 제국의 과학기술과 과학자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면서 이 분야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정하고 있다. 선진적인 몇몇 아시아 국가들은 과학기술 관리 시스템을 개혁하고 과학기술 정보의 수집과 보급 시스템을 강화하는 등 중·장기의 종합적 과학기술 진흥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경제적 약진이 이루어지자 이를 견제하려는 구미 국가들(일본 포함)에게 의지해서는 더 이상의 발전이 힘들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일본 과학기술청이 발간한 '94 일본 과학기술 백서'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예시된 중국 우리나라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 국가들의 각종 과학 관련 지표를 살펴보면 해마다 성장을 거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직은 구미 과학선진국들과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지만, 이같은 변화는 아시아 과학기술이 깨어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되기에 충분하다.

사실 과학기술에 관한 인적자원은 아직도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다. 또한 질적으로 보아도 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시아 각국 정부와 민간 기업들은 기술개발 투자 없이 국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꾸준히 투자를 늘려 왔다. 일례로 최근 우리나라와 싱가포르의 국민 총생산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은 EC 수준에 육박하고 있을 정도.

그리고 구미에서 선진적인 학문을 익힌 아시아계 학자들이 고국으로 복귀하는 'U턴 현상'은 아시아 과학기술계의 또다른 청신호다. 경제 수준이 높아지고 역동성을 갖춘 대만같은 경우에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귀국하는 숫자가 91년2천9백명에서 2년만에 거의 두배로 늘기도 했다(대만은 이중국적을 인정함으로써 해외로 나간 우수인력이 다시 돌아오는 길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고국으로 되돌아오는 이유는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벽이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되고 있긴 하지만, 한때 고급 인력이 대거 외국으로 진출해 인력 공동화 현상을 겪었던 아시아 국가들이 이들의 복귀로 과학과 경제 발전 속도에 가속이 붙는 것만은 틀림없다.
 

선진국의 앞선 학문을 접한 유학자들의 귀환은 인적자원의 부족 현상을 겪던 아시아 국가들에게 또다른 힘이 되고 있다.


'과학'과 '기술' 조화이뤄 발전해야

아시아 국가들의 특징은 '과학'보다는 '기술' 쪽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의 뒤떨어진 경제를 끌어올리기 위해 가시적 성과가 상대적으로 쉽게 나타나는 분야에 눈을 돌린 때문이다.

지난 93년간 유네스코가 발간한 '세계 과학 보고서'(World Science Report)는 우리나라와 싱가포르 대만 홍콩 등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이 과학기술과 경제개발을 성공적으로 연결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좀더 엄격히 말하자면 이들 국가들에게 성공적인 경제개발국이라는 평을 안겨준 것은 노동집약적 산업구조를 지탱할 '기술'이었을 뿐이다.

이들 국가가 비교적 강세를 보이고 있는 분야는 첨단 정보 통신 분야. 노동집약에서 기술집약으로 산업구조를 바꾸면서 생존을 위해 이 분야를 집중 육성하기로 결정했고, 이 선택은 일정 부분 성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에는 마우스 스캐너 메인보드 등 컴퓨터와 주변기기에서 세계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대만과 싱가포르,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한 우리나라, 각종 첨단 제품의 제조창 역할을 하고 있는 동남아 국가 등의 모습이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이들 국가들은 이전의 단순 조립지에서 벗어나 최근에는 핵심 기술을 자체 확보하는 등 장족의 발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초과학에 대한 진전 없이 기술만 독주하는 현재의 상황은 아시아 과학기술의 또다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아시아 국가중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이 최근들어 응용 개발분야에 대한 투자보다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투자를 상대적으로 늘리고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국가기술 위주의 과학기술 경향을 보여온 일본의 이같은 변화는, 진정한 과학기술력 확보는 기초와 응용 개발 연구가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년 초 우리나라를 방문한 저명한 사회학자 다니엘 벨(하버드대 명예교수)도 '가술대혁명 시대가 오고 있다'는 주제의 강연에서 "21세기 기술혁명에서 승리하려면 기초이론 지식의 소재 기술의 발전, 두가지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물리학을 토대로 전자 통신산업이 발달했고 생물학을 기반으로 의학 농업기술이 발전했음을 예시하면서 "철저한 기초 이론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첨단 기술혁명도, 활용 능력개발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과학과 기술의 조화를 이룬 발전. 이것이야말로 아시아 국가들이 정치와 제반 사회제도의 비민주적 요소를 과감히 척결하고 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우뚝 서기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5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이강필 기자

🎓️ 진로 추천

  • 물리학
  • 컴퓨터공학
  • 전자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