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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고 1회·과기대 1회·박사 1호 정근창박사

"과학고 시절 충분한 실험 실습이 오늘의 밑거름"

26세의 나이로 고속질주를 해 학위를 취득한 정근창 박사는 우리나라 과학영재 교육의 첫 작품이다.

67년 12월2일생, 86년 2월 경기과학고 1회졸업, 89년 8월 과학기술대 1회졸업, 94년 6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에서 고분자 운동메커니즘을 규명하는 논문으로 phD 획득(만 26세 6개월), 현재 LG화학 정보전자연구소 선임연구원, 연봉 2천8백만원. 과학고 1회 과기대 1회 졸업생으로 처음 박사학위를 받은 정근창 박사의 이력이다.

본격적인 과학영재교육의 산실인 과학고등학교가 생긴지도 올해로 12년. 그로부터 3년후(86년) 과학기술대학이 문을 열었고 경기과학고 1회졸업생들 중 35명이 과학기술대에 입학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박사학위를 끝내고 국내 연구소에서 현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중에 선두주자가 바로 정근창 박사이다.

정박사를 만나기 위해 그의 연구실 문을 노크했을 때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는 복잡한 분자식이 아니라 안경 낀 학생(?) 하나가 돌도 안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떠 있다. 화면의 주인공이 정박사임을 확인한 후 "딸입니까"라는 물음에 계면쩍으면서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 영락없이 앳된 학생이다. 잘 보아야 대학원생. 아무리 머리 위에 박사모를 씌워봐도 근엄한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자신을 과학영재라고 생각합니까?" "영재는요. 그냥 정해진 코스대로 따라갔지요." 약간은 당황한 듯 자신을 특별한 눈으로 보지말라고 사정조로 애원하듯이 말한다.

수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즈음에 두분 다 교사인 부모님으로부터 경기과학고가 생긴다는 소리를 듣고 아무런 망설임없이 과학고를 선택했고, 대학으로 진학할 때는 부모님을 비롯해 주변에 서울대 출신이 많아 한동안 고민했으나 결국은 교장선생님에게 설득당해(?) 과기대를 지원했으며, 남이 하는대로 공부하다가 3년6개월 만에 졸업했다는 것. 대학 3학년 때 과학기술분야에서는 유학을 가는게 좋겠다고 생각돼 여기저기 유학신청서를 냈고 칼텍으로 부터 허가를 받아 장학금으로 공부해 4년6개월만에 학위를 받은 것이 전부라고 아주 '심심하게' 자기 이력을 소개한다.
 

창의적인 연구를 위해서 '자기평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정박사


평범한(?) 고속질주

그럼 어렸을 때는 어땠냐고 묻자, "국민학교 때는 학급에서 중간 아래였고 중학교 올라와서 2학년 때 우연히 한번 시험을 잘 보았는데 성적이 잘 나오니까 아주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때부터는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아요"라며 솔직하게 답변한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쏘다니느라고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

과학고 시절은 정박사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시기. "공부를 무척 재미있게 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고 들었지만 당시는 2학년 때까지 대학입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국정교과서에 나오는 실험은 물론이고 당시 사대에서 교육자료로 썼던 PSSC(물리) 케미스트리(화학) BSCS(생물) 등에 나오는 모든 실험을 다 해보았어요. 나중에 과기대에 진학해 보니 과학고 때 얼마나 공부를 많이, 그리고 재미있게 했는지 알겠더라구요." 결국 과학고는 정박사에게 과학자가 되는데 필요한 자양분을 충분히 공급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후에 전공을 화학공학으로 선택하게 된 것도 과학고 시절 남들이 외우는데 급급한 화학과목을 개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란다.

과기대에서 첫 신입생을 뽑고나서 취재를 갔을 때 과학고 출신 학생이 "강의실 도서관 기숙사만 왔다갔다해 고등학교와 별 다를 것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 기억나 과기대 초창기 시절을 어떻게 보냈냐고 물었다. "글쎄요. 저는 주체성이 없어서 그런지 기숙사 생활이 익숙하지 못해요. 단체 생활에서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자기 생활을 전혀 못해 조금 힘들었구요. 아무래도 선배도 없고 대학문화가 전혀 없어서 그런지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들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쪽에도 관심을 가지고 학회를 만들어 활동들을 했지요. 저도 주도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뿌리'라는 우리나라 고역사 연구회에서 활동했습니다."

초창기라서 연구시설이 별로 없어 강의에 의존하다보니 실험을 제대로 못한 것 같지만 강의는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나중 유학생활을 하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자신의 성격을 "낙천적이면서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표현한 정박사는 유학시절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대학 때 사귄 과기대 동기생(조수정)과 서둘러 결혼했다. 사실 이 결혼으로 상대방은 큰 희생을 치렀다. 결혼 당시 부인은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서로 지역이 달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협박하다시피 했다는 것. 그 빚은 평생 갚을 계획이라고 한다. 부인에게 컴퓨터에 관한 지식이라든가. 연구논문 아이디어를 상당 부분 의존하기 때문에 집에서 토론을 많이 한다고 한다.

유학시절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냐고 묻자 옆에 있던 부인이 "겉보기와는 달리 집착력이 강해 어려운 과정을 잘 극복하는 것 같다"고 대신 대답해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박사가 하는 말이 흥미롭다.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논문 테마도 정해지고 이렇게 연구하면 학위를 받을 수 있게 되겠구나 하는 구체적인 계획이 정해지고 나서지요. 그런 것도 없이 무책임하게 결혼할 수 있겠어요. 무턱대고 협박한 것은 아니라구요."

작년 8월에 귀국한 정박사는 아직 병역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병역특례 대상으로 LG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 3명의 연구원과 함께 전지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지금은 자료수집과 팀을 짜는 시기. 한 10년 하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정박사는 조심스럽게 밝혔다.

의무 근무 기간이 끝나면 다른데로 자리를 옮길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주위에서 학교로 가야하지 않느냐고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매듭을 지으려면 1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하기도 하구요. 요즘 우리나라 기업연구소들은 연구여건이 좋아졌어요. 당장 돈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연구테마만 좋으면 돈 시설 사람 등을 아낌없이 지원해주거든요. 젊었을 때 일을 많이 하고 싶어요."

과학고 출신 1호 박사로 '평범하게' 고속질주를 한 정근창 박사는 후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공부하는 분야를 제한하지 말았으면 해요. 자기 전공이다 아니다를 가르지 말고 흥미있는 현상이 있으면 자기의 지식체계로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해요 그런 사람만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연구를 재미있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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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전민조 기자
  • 김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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