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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순응한 지혜로운 삶의 공간

자연환경은 주거문화의 형식과 내용을 규정한다. 우리 선조가 이루어낸 집은 자연의 한 구성물로, 곡선으로 대표되는 미학과 철저한 인간중심의 과학이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왔다고 말해진다. 이는 한국인의 천성이 순박하고 남을 해칠 줄 모르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의 자연환경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이집트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사막지대가 아니며, 더구나 중국대륙처럼 불순한 기후의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도 다르다. 우리는 어디서나 아름다운 곡선으로 구성된 구릉과 둥그스름한 산봉우리를 볼 수 있고, 또 사계(四季)가 뚜렷한 기후를 이루는 자연환경에 처해 있다. 그리고 이같은 자연환경은 우리의 주거공간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우리 선조들은 석기를 사용하던 먼 옛날, 땅을 1.5m 정도 깊이로 파내 바닥을 삼고 이 바닥 둘레의 땅에 서까래를 중심을 향해 경사지게 모으거나, 기둥을 여러개 박아 기둥사이에 굵은 나뭇가지들로 만든 도리를 수평으로 엮고 도리에 서까래를 걸쳤다. 그리고 서까래에 의지해 나뭇가지와 넝쿨 등을 엮고 풀잎과 흙을 덮어 지붕을 이룬 움집을 짓고 살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지가 발달하고 도구가 발달하자 땅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워 도리와 보로 결구하고 지붕틀을 짜 자연에서 채취한 띠나 농경 생활에서 얻는 짚으로 이엉을 이룬 초가집을 지었다. 이런 초가집이 일반 백성들의 집으로 널리 지어졌고, 귀족계급을 흙을 빚어 기와를 구워내면서부터 기와집을 짓고 살게 됐다.

초가집과 기와집은 모두 바닥이나 벽체 지붕 등 구조와 마감이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들로서 극히 자연스럽고, 자연인인 우리에게 이로운 구조였다. 흙벽이나 창호지는 숨을 쉴 수 있다. 오늘날 인공적으로 공장에서 생산된 재료들로 마감된 벽체나 창호와는 달리 이들 재료는 방안에 습기가 많으면 습기를 빨아들이고 메말라지면 머금었던 습기를 다시 내뿜어줌으로써 방안의 습도를 조절해 준다.

'둥근선' 따라 주변환경 적응

한편 산간지방의 화전민들이 손쉽게 지어온 이른바 '너와집'은 두께 4-5㎝, 가로 20-3O㎝, 세로 40-60㎝의 적송이나 전나무 널판인 너와(느애, 능에라고도 부름)로 지붕을 덮은 것이다. 너와는 비가 오면 물기를 먹고 늘어나 비가 새는 것을 막고, 햇빛이 밝게 드는 맑은 날에는 수분을 내뿜고 줄어들어 너와의 틈새로 집안의 나쁜 공기는 물론, 난방이나 취사 때 발생하는 연기를 집 밖으로 쉽게 내보냄으로써 집 전체가 숨을 쉬게 했던 것이다.

이들 초가집이나 기와집, 너와집, 또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굴피집은 모두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로만 구성됐기 때문에 주변의 들과 언덕 산과 수풀에 어울려 자연의 일부가 되고 만다. 더욱이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의 지붕 용마루와 처마를 이루고 있는 곡선은 주변의 산등성이나 산봉우리의 둥그스름한 곡선과 잘 어울린다.

우리 땅은 지질학상으로 보아 노년기에 접어든 땅이라 그 표면은 둥그스름하게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런 자연 풍토 속에서 생활해온 한국인은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곡선을 사랑해 저고리 배래의 선, 버선코의 선, 청자나 백자의 선 등에서 보이듯이 주변의 생활용품에까지 적용했던 것이다.

건축에 있어 이 부드러운 선은 바로 현수선(懸垂線)으로 나타난다. 현수선은 우리가 실을 양끝에서 잡아당겨 팽팽하게 했다가 양끝을 조금 안으로 이동할 때 실의 자중(自重)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 선은 가장 자연스런 선이기도 하다.

채와 칸으로 구성된 이중성격

우리 땅에는 도처에 산과 내가 있어 집터는 자연스럽게 앞에는 냇물을 끼고 뒤로는 산을 등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배치법을 고수해 왔다. 물론 이것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성행한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과학적으로 보아 자연환경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자연에 적응 융화시킨 우리 주거문화의 특질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과의 융합성은 기단을 쌓고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우며, 대들보를 걸고 문지방을 만드는 집의 구조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리의 집은 모두 집터를 고른 후 어느 정도의 높이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초석을 놓는다. 기단의 사면은 자연에서 채취한 산돌이나 강돌의 막돌로 허튼층을 쌓아 극히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한다. 기단은 평시에는 습기를 막아주고 장마철에는 집에 빗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준다.

기단 위에 놓는 초석들도 자연에서 채집한 막돌이며, 기둥을 초석 위에 세울 때에는 기둥이 놓이는 자리인 주좌(柱座)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울퉁불퉁한 막돌면에 맞추어 기둥 밑면을 파내는 그랭이질을 해 세운다. 이것은 돌의 표면 온도가 밤에는 주변 온도보다 낮아짐으로써 머금게 되는 습기를 낮에 손쉽게 발산할 수 있도록 하는 공격(空隔)을 기둥과 초석 사이에 만들어 두어 기둥의 부패를 막아준다. 또 기둥 양측에 벽체를 칠 때 초석과 기둥 양측으로 일부 큰 구멍을 내줌으로써 습기가 기둥 밑동에 모여드는 것을 방지한다. 이러한 기법은 자연의 이치를 잘 알고 이것에 대응한 것이며, 나아가 자연과의 융합성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전면과 후면의 두 기둥사이에 건 대들보는 휘어진 재목을 그대로 이용한다. 즉 종도리를 떠받치는 자리에 가장 커다란 보의 휨힘(bending moment)을 받기 때문에 휜재의 휘어 올라간 곳을 위로 하고 가장 크게 휘어진 꼭지점에 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게 한다. 반대로 문지방에서는 휜재의 휜 꼭지점이 아래로 오게 함으로써 출입에 편리성을 주고 있다.

자연환경에의 적응성은 우리나라가 북으로 중국대륙에 접해 있고 나머지 동 서 남의 세 면이 바다에 접해 있는 반도국으로 점이지역(漸移地域)에 속해 있기 때문에 대륙적이며 해양적인 이중성격을 이룬 것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대륙적이면서 해양적인 문화의 성격은 우리의 집들이 채(棟)와 칸(間)으로 구성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게 했다. 즉 우리의 집은 안채 사랑채 별당채 사랑채 행랑채 등채로 지어지고, 채 속에서 안방 대청 부엌 등 다시 칸으로 분화된다. 이는 중국의 주택인 사합원(四合院)이 채로 분화되고, 일본의 주택이 한 채로 이루어진 채 속에서 사이 창호와 벽으로 여러개의 칸으로 분화되는 것과의 중간적이며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다.
 

안채 대청은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함을 유지해 집안일을 편히 할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


기후에 있어서도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의 점이지대에 놓여 있어 전국 각 지방마다 상이한 풍토를 이룬다. 따라서 각 지방마다 서로 다른 주택의 평면 모습과 구조를 볼 수 있다.

예컨대 함경도 지방에서는 바닥에 마루를 깐 대청을 두지 않는 '밭전(田)자형 평면'의 집을 짓는다. 이 곳의 집은 정주간에서 부엌과 정주방이 중간에 칸벽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구성되고, 온돌방들이 서로 벽체를 공유함으로써 난방의 열효율을 극대화했으며, 외양간을 정주간 정주방의 반대편 한 지붕 속에 두어 추운 겨울에 소가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 울릉도와 같이 눈이 많이 오는 곳에서는 투방집을 짓는데, 우선 축담을 둘러치고 그 속에 집을 지어 집 둘레에 사방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 눈이 쌓여도 집속에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돌기와 지붕^주변에서 손쉽게 얻을 수있는 납작한 돌로 지붕을 덮으면 만년을 간다고 했다.


폐쇄성과 개방선이 공존

긴 겨울과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해 일찍부터 온돌과 마루의 두가지 바닥구조를 이룬 것은 폐쇄성과 개방성이라는 서로 다른 이중적 성격이 공존케 한 예로 살펴볼 수 있다. 수원의 서둔동 집터에서 발견된 것처럼 온돌은 철기시대인 기원전에 이미 만들어졌다. 이 당시의 온돌은 구들고래를 방안 두벽을 따라 ㄱ자형으로 만들고, 아궁이를 방안에 두고 굴뚝을 방 밖에 세운 ㄱ자형 구들에서 시작돼 고구려의 집안 동대자(東臺子) 집터나 백제의 부소산 집터 등에 까지 그대로 축조돼 왔다.

그러나 이러한 ㄱ자형 구들이 방바닥 전체를 구들고래로 깔고 아궁이를 방 밖에 만든 온돌구조로 바뀐 것은 13세기 이전으로 보인다. 이 온돌 난방법은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갖고 있는 독특한 난방법이다. 이와 유사한 '캉'이라 부르는 난방법이 중국에도 있지만, 온돌처럼 방바닥 전체를 따뜻하게 해주지는 못해 우리의 온돌에 비길 바가 아니다. 현대에는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이 온돌 난방법에 매료돼 이른바 패널 히팅으로 발전시켜 보편적인 난방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온돌방은 또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해서 더위를 식힐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방은 사방이 막혀서는 안된다. 안방과 붙은, 바닥이 모두 우물마루로 구성된 대청(大廳) 사이에는 네짝 불발기 분합문을 달아 두짝씩 접어 들어열개로 들쇠에 매달고, 아랫목 마당 쪽과 옆마당 쪽으로는 쌍창을 달아 맞바람이 치게 한다. 그러나 창호는 덧창 쌍창 갑창으로 세겹을 이루고 여기에 다시 몰면자(궁중에서는 무렴자라 함)를 창에 치고 머릿 병풍을 둘러침으로써 곧 아늑한 공간으로 전환시킨다.

이처럼 온돌로 이루어진 방에는 폐쇄성과 개방성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가지 성격중 개방성은 우물마루로 만들어진 대청에서 더 한층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물마루로 이루어진 대청은 기원전부터 지어진, 바닥이 높은 고상구조의 집에서부터 시작됐다. 대청은 일반적으로 전면은 아무런 창호나 벽체없이 개방되고, 뒷쪽 벽에는 두짝밖 여닫이 골판문이나 널문을 단다. 그리고 양측의 방 사이에는 네짝 들어열개 불발기 분합문을 단다. 때문에 대청은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며, 온돌방과 대(對)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의 집에는 온돌과 마주하는 두가지 큰 바닥구조가 자리잡게 되고, 개방적이며 폐쇄적인 이중적 공간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온돌 드들고래로부터 나오는 연기는 뒷뜨락에 다로 쌓은 굴뚝으로 배출한다.


한 공간을 여러 용도로 활용

집의 온돌방과 대청은 우리생활의 기거양식인 좌식생활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많은 융통성과 다용성을 이루어 왔다. 즉 안방은 낮에는 안주인의 거실이며 안손님을 맞이하는 접객공간인 동시에 밤에는 잠을 자는 취침공간이 돼 실(室)의 전용성(轉用性)이 손쉽게 이루어져 방 하나를 여러 용도로 쓰게 된다.

또한 좌식생활로 실내에 좌식용 가구들이 비치돼 방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도 되는 인간적 척도(human scale)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방 하나를 특정한 용도만으로 쓰는 일실일기능(一室一機能)의 서양집과 비교해 집이 차지하는 공간이 커지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

좌식생활은 지면으로부터 높이 쌓은 기단과 구들고래로 자연히 높은 온돌바닥, 높은 우물마루 바닥과 더불어 집의 조경에도 영향을 주었다. 즉 우리의 뜰이 그 속을 거닐며 즐기는 소요 정원이 아니라, 방이나 대청에 조용히 앉아 턱을 문지방에 괴고 모든 창호를 들어열개로 들쇠에 매달거나 활짝 열어 젖히고 내려다보며 사색에 잠기게 하는 뜰을 형성하게 했다.

그래서 선조들은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 한칸을 지어내니, 반칸은 청풍(淸風)이요, 반칸은 명월(明月)이라, 청산(靑山)은 둘러 두고 보리라"라고 노래부르며 자연에 순응해 더불어 사는, 그런 집을 지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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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이경재 사진가
  • 남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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