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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진화, 성공의 드라마

직립보행에서 도구제작까지


화가 자신도 풍경의 일부이므로 자신을 캔버스에 담고자 하는 불가능한 작업을 하고 있는 화가.


파충류 포유류 등으로 머물 수도 있었던 인간이 진화에 성공한 드라마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필자는 우선 동물 생존의 핵심이 '이동'과'조작'임을 주목하는 데서 출발한다. 파충류는 이동과 조작이 미분화된 상태이며 포유류는 이동에 성공했다. 포유류가 이동에만 골몰하고 있을 때 조작의 기능성까지 모색한 것이 영장류다.

한 천재의 광기를 가진 화가가 있었다. 그는 세계를 자신의 캔버스 속에 완벽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신의 창조행위에 버금가는 창조를 자신의 캔버스 속에 재현하고자 했다.

자기의식으로서의 정신

그는 자신의 주변세계를 남김없이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재현작업이 진행되면 될수록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는 자신에게 되풀이해서 물었지만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날 새벽, 잠을 못이뤄 뒤척거리다가 갑자기 한줄기 영감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로 자신이 그림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그 영감이 빠져나갈까 두려워 서둘러 자신을 그려 넣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또 무엇인가 자신의 그림 속에서 빠져 나가고 있었다. '자신을 그리고 있는 자신'이 거기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그것을 그려 넣었으나 또 무엇인가 빠져 있었다. '자신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그리고 있는 자신'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림 1).

이 화가가 캔버스 속에 그려 보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가? 바로 정신이다. '대상-자기'를 다시 '자기'속에 포섭시켜가는 과정, 바로 그것이 정신이다. 이것을 우리는 '자기의식'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가능함으로써 비로소 대상 혹은 사실은 '의미'를 획득한다. 내가 어떤 사물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사물과 자기와의 관계를 다시 자기 속에 포섭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화가는 정신을 그려내는 데 실패하고 있는데, 결국 자기를 캔버스 속에 그려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물도 사물과 자기와의 관계를 지각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다시 자기와 관계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동물은 세계 속에서 단지 행위 할 뿐 그것을 자신 속에서 다시 재창조하지 못한다

손과 도구제작

파워그립(a)과 정밀그립 (b)


이 정신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이것은 대상의 가공(도구제작) 과정을 통해서 획득된 것이며 그것의 기초는 손의 특유한 조작기능에 있다. 인간의 손의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 손으로 물건을 쥐고, 다루는 방식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내피어는 이것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정밀그립'(precision grip)과 '파워그립'(power grip)이 그것이다. 정밀그립에서 대상은 손가락 끝과 대향적인 엄지손가락 사이에 놓인다. 파워그립에서 대상은 손가락의 내측과 손바닥 사이에 놓인다. 이 경우 힘은 비대칭적인 엄지에 의해서 가해진 반대압력에 의해서 얻어진다(그림 2).

인간의 이러한 그립을 가능하게 한 기초는 엄지손가락의 구조와 그것이 집게손가락과 갖는 대향성(對向性)이다. 엄지손가락은 일찍이 알비누스(Albinus)가 '손안의 작은 손'(lesser hand)이라고 불렀듯이 5개의 손가락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이다. 뉴턴(I. Newton)은 신의 존재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는 가운데서 엄지손가락만이 자신에게 신의 존재를 믿게 했다고 고백 했었다.

통상적인 포유류의 엄지손가락(엄밀히 말해서 손은 인간만이 갖는 것이므로 엄지발가락이라 부르는 것이 정확하겠다)이 다른 손가락과 특히 구분되는 점은 없으며 단지 손가락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다른 손가락에 비해 가동성의 범위가 약간 넓다(이것은 새끼손가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장류의 경우는 어느 정도 엄지손가락의 기능적 독립성을 보여준다. 인간은 그것의 정점에 있다.

특히 인간의 엄지손가락의 중수골(metacarpal)은 유니크하다. 그것은 넓은 가동성을 가지는 안상관절(saddle joint)에 의해서 수근골(carpals;팔목뼈)과 연결돼 있다. 다른 손가락의 중수-수근 연결은 다축성의 평면관절이기 때문에 가동성의 범위가 좁다. 그러나 엄지 손가락은 안상형의 특징으로 인해 구관절(ball-and-socket joint)만큼 가동적이면서 내전-외전(adduction-abduction), 굴곡-신전(flexion-extension), 회내-회외(medial-lateral rotation) 등의 다양한 운동이 가능하다(그림 3).
 

왼손을 눈쪽으로 향하게 했을 때의 중수골 수직 단면도. 엄지손가락의 중수골은 대능형골(trapezium;엄지의 중수골과 연결되는 수근골의 뼈)을 보여주기 위해 제거했다. 엄지의 운동축을 실선으로 나타냈다. 외전과 굴곡의 조합이 대향성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안상관절이 점선으로 나타낸 회전운동을 가능하게 한다.


손가락을 운동시키는 수근골은 대부분의 현생 파충류와 포유류에서 8개로 구성돼 있다. 영장류의 수근골은 두 열로 배열돼 있고, 그 중간에 중심골(centrale) 이라 불리는 뼈가 자리잡고 있다. 인간의 경우 이 뼈는 사라졌는데, 이것은 엄지와 집게손가락의 다른 손가락과의 독립적 운동을 위한 발판을 만들기 위해 그것과 인접한 주상골과 융합됐다.

엄지손가락은 이 넓은 가동성으로 인해 정밀그립의 기초가 되는 대향성을 만들어 낸다. 엄지의 중립위치는(기어의 중립과 유사하게) 대향성 운동을 기술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엄지가 회전할 때, 그것은 손바닥에서 구부러진다. 일단 엄지의 운동이 시작되면 굴곡과 회전운동을 하면서 척골(ulnar)쪽으로 향한다. 그것이 더 많이 굴곡하면 할수록 더 많이 회전하며 반대쪽에서 완전히 정지한다.

운동을 완성하기 위해서 집게손가락은 엄지의 끝과 접촉할 때까지 모든 관절을 굴곡시킨다. 엄지가 회전하고, 집게손가락도 일정한 정도 회전할 수 있기 때문에 엄지와 집게의 육질부간의 완전한 접촉이 가능하다. 인간의 경우 손이 할 수 있는 가장 정밀한 작업은 엄지의 끝을 집게의 끝과 대향적으로 놓음으로써 두 손가락의 육질부가 최대한으로 접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손은 동물일반의 수족과는 그 설계의 근본이념이 다르다. 이것은 말의 발굽이나 범의 '발톱달린 손'처럼 직접적 목적에 쓰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특수한 목적에서라면 범의 '손'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찢고, 발기는 데는 효율적일지 몰라도 다른 용도에는 서투르거나 아예 불가능하다.

인간의 손은 찢고, 발긴다는 특수한 용도에서는 범의 '손'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손은 특수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기 보다 그러한 수단을 만들어내는 수단이다. 동물의 '손'을 도구에 비유한다면 인간의 손은 도구를 만드는 도구, 즉 공구에 해당한다. 도구는 특수화될수록 효율적이지만-동물의 경우 수족의 통상적 진화의 방향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공구는 일반화될수록 효율적이다.

진화의 추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각 생물의 신체를 특수화시킨다. 6천만년 전 포유류형 수족의 원형이 만들어 진 후 그것은 분화와 분지를 거듭해서 각양각색의 다양한 수족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 특수화를 통해서 효율성을 높일 수 있지만 또 그것으로 해서 특정한 용도 외에는 쓸모가 없어진다.

원시형은 특정목적에 비효율적인 반면 넓은 범위의 쓰임새를 갖는다. 즉 그것은 그 비효율성만큼 보편성과 일반성을 갖고 있다. 인간의 손은 신생대 초기의 수족의 원시형에서 그 본질적 구조가 크게 변한 것이 없다(그림 4).

손뼈의 구성과 명칭


도구제작과 의식


표유류형 파충류로부터 현생인류에 이르기까지 손의 진화. 검게 칠한 부분이 중심골인데, 인간의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인간의 손이 신생대 3기 초기의 형태의 기본적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에 주목할 것.

이것은 비할 데 없는 이점이다. 한편으로는 신체의 원시성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여타 동물에서 보여지는 특수화에 따른 행태양식의 제약에서 해방될 수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구를 통해서 비특수화에 따른 신체적 약점을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손은 도구제작을 매개고리로 해서 정신을 산출한다. 도구제작이 어떻게 정신을 산출하는가를 보기 위해 이 정신의 생물학적 원형을 찾는 데서 시작하자.

동물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즉 동물도 한 개체로서의 자기를 인지하는가? 동물도 주변의 세계를 지각하며 거기에 맞추어 반응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물의 의식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자기의식'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동물도 세계에 대해서 반응하지만 인간은 세계에 대해서 반응하는 자기에 대해서 반응할 수 있다. 피히테(Fichte)의 자아에 대한 두 가지 구분을 여기에 적용해 두 의식의 구분을 분명히 해보자.

일찍이 피히테는 자아(自我)를 원리로 하여 그 자아로부터 모든 것을 이끌어내는 '지식학'(Wissenschaftslehre)을 구성하고자 했다. 지식학의 근본원리로서의 자아는 비아(非我)까지도 자기의 소산으로 한다. 이 자아의 활동을 피히테는 사행(事行;Tathandlung)이라고 불렀는데, 절대적으로 자기자신을 정립시키는 자아의 무한한 활동이다.

이 사행을 통해서 자아는 근원적으로 절대적인 자신의 존재를 정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는 나다"다. 이것이 첫째의 정립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근원적으로 절대적으로 정립된 자아는 그것이 비아와 구별됨으로써 비로소 정립된 것이다. 즉 자아에는 절대적으로 비아가 반정립되는데, 이것이 "나는 비아가 아니다"다. 이것이 두번째의 반정립이다.

첫째의 정립을 편의상 '적극적 의식'(positive consciousness), 둘째의 반정립을 '소극적 의식'(negative consciousness)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의식의 진화의 역사를 볼 때 그 역이 타당하다고 본다. 즉 소극적 의식에서 적극적 의식에로의 전환이며 이 정점에 인간이 있다고 본다.

이 소극적 의식은 동물일반에 관련된 의식이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을 가져올 필요가 없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동물일반에서 출발해 보자.

생물이 자기를 아는 것은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자기를 탐지하는 데는 두 가지 수준이 있다. 하나는 자기 아닌 것의 인식을 통해 반사적으로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 경우 자기를 알기 위해서 자기를 전면적으로 통찰할 필요는 없다. 자기 아닌 것의 표식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서 자기란 자기 아닌 것을 뺀 모두다. 앞서의 소극적 의식 또는 즉자적 의식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나는 B 가아니다.
나는 C 가아니다.
나는 D 가아니다.
 .
 .
 .      
이 경로는 무한히 되풀이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나는 A다"라는 적극적 의식은 도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극적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이러한 자기의식의 가장 원형적 형태는 중앙집중적 중추신경계를 가진 다세포 생물(척추동물)의 세포조직들 간의 인지방식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다.

이 기본적 자기탐지 시스템이 척추동물에게 특유한 면역시스템이다. 세포가운데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을 식별하는 능력이 없다면 이 시스템은 작동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면역시스템에서 자기의식의 진화론적 원형을 찾아 볼수 있다. 체내가 이물질에 의해서 감염됐을 때 몸은 그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항체를 만들어 그것을 침입자와 화학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상대를 무효화시켜 버린다(무척추동물의 경우 항체와 닮은 것이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아직 개체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전면적으로 통찰하는 "나는 나다"의 의미가 아니고 타자의 표식을 인지한 데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인식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생체의 거부반응이나 알레르기성 질병이다.

자기 아닌 것을 통해서 자기를 식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직접 통찰할 수 있다면 알르레기나 생체거부반응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아닌 것이 자기일 수 있다는 것을 면역체계에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이 소극적 의식은 또 역의 실수를 낳을 수 있다. 예컨대 암세포의 경우 면역시스템이 이것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타자의 표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이것은 소극적으로 규정된 자기의식에서는 불가능하다.

소극적 의식에서 인식의 범위에 들어오는 것은 타자이며 자신은 무규정적인 채로 남아있다. 자아를 통해 반정립된 타자가 아니라 타자를 통해 반정립된 자아다. 이러한 생물학적 사실은 피히테의 도식이 거꾸로 됐으며 그것을 도치시킴으로써 의식의 진화의 비밀이 드러남을 보여준다.

소극적 의식(즉자)은 아직 자기를 통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단계에서 '자기'(Sich)의 개념이 출현하고 있다.

의식을 이렇게 구분한다면 소극적 의식 속에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을 전제할 필요가 없다. 이 즉자 단계로서의 소극적 의식은 물론 감각과 지각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식의 소지자는 그 감각과 지각을 자신의 밖에 있는 대상의 현상태(現象態)로서 파악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진정한 내부가 없기 때문에 동시에 진정한 외부도 없는 것이다.
 

위는 탄자니아의 레이톨리에서 발견된 발자국 화석. 우측은 이것을 토대로 화산재 위를 걸어가고 있는 호미니드 가족을 그린 상상도.


도구변형행위와 도구제작행위

여기서 대자 상태로의 이행은 진정한 외부 세계를 발견하는 과정이며, 이것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내부세계를 창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적극적 의식이다.

그렇다면 소극적 의식의 단계에서 적극적 의식의 단계로 전환시킨 요인은 무엇일까? 그 비밀의 문을 여는 주문은 바로 '도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장 제기될 수 있는 점은 도구의 사용행위는 동물의 경우에도 그렇게 드물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사실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도구사용 행위는 인간에게만 특이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동물의 도구와 인간의 도구의 차이는 전자가 도구의 사용에 머물고 있는 데 대해서 후자는 그것의 제작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서 그 구분점을 찾고 있다. 이 구분이 성립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기 위해서 우선 동물의 도구사용 행위를 살펴보자.

가장 잘 조사돼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갈라파고스 제도에 서식하는 다윈핀치의 일종인 나무쪼기핀치(Camarhynchus)다. 이 새는 나무가지 사이의 갈라진 틈에 사는 벌레를 잡아먹는데, 이를 위해 나름대로의 도구를 사용한다. 관찰에 의하면 이 새는 먼저 선인장 가시나 작은 나무가지를 찾아내어 부리로 그것을 문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기 좋도록 가시나 나무가지를 짧게 꺾거나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꺾어 없애는 경우도 있다.

이 '인공적으로 늘어난 부리'를 나무 틈 속에 찔러 넣어 그 끝으로 곤충을 꿰뚫어 바깥으로 긁어내거나 아니면 곤충이 저절로 기어나 올 때까지 마구잡이로 휘젓거나 한다. 이렇게 해서 일단 벌레를 잡으면 도구는 폐기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리로 도구를 계속 붙잡고 있다가 다시 이것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영장류들의 도구사용 행위다. 카푸친 원숭이(Capuchin)는 딱딱한 견과의 내용물을 끄집어 내기 위해서 견과를 나무에 내리친다. 일본원숭이는 모래 섞인 보리알에서 보리알만을 분리시키기 위해 그것을 바닷물에 던진다. 구달(Goodall)이 관찰한 침팬지는 흰개미를 낚기 위해 나뭇가지를 꺾어 흰개미굴에 집어 넣는데, 이때 옆의 잔가지를 제거하기 위해 나무 껍질을 벗겨 매끈하게 한다.

침팬지나 나무쪼기핀치의 행위는 단순한 도구사용 행위는 아니다. 그것은 대상에 일정한 변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피어는 이것을 단순한 도구의 사용단계를 넘어서고 있지만 도구제작에는 이르지 못한 중간 단계로 보고 도구의 발전을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1) 도구사용(tool-using);직접적인 필요에 의해 주위의 자연물을 이용하는 임시변통적 행위. 이 경우 사용된 후 바로 폐기된다.

2) 도구변형(tool-modifying);어떤 일의 수행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간단한 수단에 의해서 자연물을 그것에 적합하도록 변형하는 것이다. 일단 사용 후 그것은 폐기될 수도, 보존될 수도 있다.

3) 도구제작(tool-making);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규정된 규칙에 따라 자연물을 변형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도구변형과 도구제작의 구분이 모호하다. 리이키는 '규칙적 유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도구변형과 구분되는 도구제작의 특성이라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구제작은 세대를 통한 전달―이것이 꼭 언어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며 직접 보여주는 시범을 통해서 전달될 수 있다―을 특징으로 하며, 이것을 그는 '문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모호하다. 구달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침팬지의 흰개미 낚시도 그러한 시범을 통해 같은 동아리들뿐 아니라 다음 세대로 전수됐으며, 일본원숭이의 보리 씻기 양식도 그렇게 확산되고 전수됐다.

도구변형 행위와 도구제작 행위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도구변형 행위로서의 도구는 어디까지나 신체의 확장이며 신체와의 관련성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도구제작 행위로서의 도구는 신체와는 원리적으로 독립돼 있다. 그래서 도구는 그 자체 도구를 생산하는 도구 즉 도구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도구변형 행위는 동물들에 의해서 행해지지만 그들은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 도구를 만드는 경우는 없다. 그들에게 신체-도구의 관계는 있어도, 신체-도구-도구의 관계는 없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도구는 신체-도구-도구-도구…의 관계로 이행하면서 그 스스로 자립성을 획득한다. 이것이 바로 도구제작 행위가 다른 도구행위와 구분되는 점이다.

역석기를 제작한 최초의 도구제작자의 목표는 그 역석기 자체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즉 뼈를 부수어서 골수를 빼어 먹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신체-도구'이지만, 뼈를 가공해서 바늘을 만들기 위한 공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면 그것은 '신체-도구-도구'이고, 또 가죽을 기워서 주거지의 침낭을 만들 예정이었다면 그것은 '신체-도구-도구-도구'다.

물론 석기를 제외한 여타의 도구들은 발견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작된 도구는 이러한 본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컴퓨터에 의해 조종되는 자동제어기계는 인간으로부터 전적으로 추상화돼 버렸지만 그것은 태고의 역석기의 궁극적 이념이었을 것이다.

가장 오래된 인공도구는 약 2백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역석기(pebble tool), 또는 찍개(chopper)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둥그스름한 돌을 다른 돌로 타격을 가해 끝을 뾰족하게 한 것이다. 이것의 제작자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이며 이것을 고고학에서는 '올도완 공작'(Oldowan Industry)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석기의 제작은 프랑스의 고고학자 브로드가 재현해 보여주었듯이 돌의 성질에 따라 타격방법 타격부위가 달라진다. 그리고 타격의 강도를 적절히 조절해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 손의 정교성과 손의 감각기관의 섬세성이 요구된다.

그런데 재료가 되는 원석(原石)들이, 도구가 발견된 주거지 근처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적어도 10㎞ 이상 떨어진 곳에서 운반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도구를 만들기 전에 석기의 형태나 적합한 재료를 머리 속에 그리고 있다가 다른 곳에서 이것을 찾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그들의 도구제작이 즉흥적이 아니고 주의깊게 계획되고 기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즉흥적 행위인 도구사용과 구분되는 점인데, 여기에는 이미 의식(적극적 의식)이 개입하고 있다. 이것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검토해 보자.

도구제작에서 비롯된 도구제작자의 이러한 성향은 자아와 사물간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지금까지 자아는 타자(他者)가 아닌 것으로 정의된 소극적 성격에 머물고 있었다. 이것은 자아가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으로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도구제작은 한 덩어리의 무정형(無定形)의 돌 속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형상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대상의 침투를 저지하는 소극적 과정이 아니라 대상속에 침투해 들어가는 능동적 과정이다.

이제 자아가 타자 아닌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자아 아닌 것으로 정의된다. 전자는 자아가 무규정적으로 주어진 데 대해서 후자는 오히려 타자가 무규정적인 것으로 주어진다. 이제 타자는 자아의 침투와 확장에 맞서 있는 어떤 대상으로 간주된다.

대상의 가공, 즉 도구제작은 바로 대상의 저항을 밀고 들어간 자아의 정립이며 도구는 바로 자기자신이다. 그는 자신의 생산물을 통해서 자신을 본다. 여기서 자기의식의 정립의 단서가 열린다.

손과 정신

손은 도구제작과 맞물려 있고, 도구제작은 정신(자기의식)과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손은 도구를 매개로 정신과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손은 정신의 신체화이고, 정신은 손의 정신화다. 정신과 신체는 서로 맞물려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양식으로 반영한다.

이것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진화를 눈에 보이는 손의 진화를 통해서 추적해 볼 수 있다. 진정한 인간의 손은 언제 출현했는가? 우리는 이것을 진화의 좀더 넓은 지평에서 접근해 보자.

손의 원형은 동물의 수족이고 이것의 중요한 기능은 이동과 조작의 기능이다. 그런데 이동기능 없는 조작기능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므로 문제의 핵심은 이동기능을 최대화하면서 조작기능을 최적 수준에서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물들의 기본적 생존전략이다. 그러나 이 두 기능은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고 진화의 추는 결국 포유동물에 와서 이동기능 쪽으로 이동했다. 말과 같은 유제류가 그러한 추세의 정점을 보여준다.

정신을 포태할 수 있는 후보종은 조작의 기능을 살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종이다. 이것은 결국 이동기능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수상생활(樹上生活)을 하는 종에게 그 기회가 주어졌다. 수상에서의 나무타기 이동은 이동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조작을 필요로 한다. 수상에서의 이동은 나무를 잡는 조작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이동과 조작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 이 기회를 잡은 것이 바로 영장류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관심사는 이동이지 조작은 아니다. 조작은 아직 이동의 한 수단일 뿐이었다. 진정한 조작 즉 진정한 손은 그것이 이동에서 해방될 때 출현한다. 한 영장류의 일단이 수상에서 지상으로 재진입 했을 때 바로 그 기회가 제공됐다. 그 종은 수상생활의 과정을 통해서 습득한 직립자세를 이용해서 두 발로 서고 그것을 통해서 드디어 앞팔을 이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다. 이동에서 해방된 조작 전문의 진정한 손이 출현한 것이다.

직립보행은 손을 예상하고 있으며, 손은 정신을 예상하고 있다. 그러므로 직립보행의 단계에서 정신이 손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메리 리키(M. Leakey)에 의한 레이톨리에서의 발자국 화석의 발견은 적어도 3백70만년 전 호미니드에서 직립보행이 완성됐다는 것, 즉 손이 이동에서 해방됐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림 5).
이동에서 해방된 손은 생명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조작 전문형 손을 완성시켜 갔다. 이것은 동시에 정신이 출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도구제작이 시작되는 2백만년 전의 호모 하빌리스에 와서 손의 형태가 완성됐다고 본다. 그들은 이제 자기를 자각하기 시작했으며 자연계에서 자신의 독특한 위치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자신의 내부에서 정신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의식되기 시작한 것은 문명의 시대에 들어온 훨씬 후의 단계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손을 발견했다. 정신에의 자각은 손의 자각에서 시작됐다. 알타미라 시대의 동굴벽화에는 흔히 인간의 손이 찍혀 있다(그림 6).
 

스페인 산탄테르의 엘카스틸로에 있는 동굴에 찍혀 있는 손.


그들은 자신을 특징짓는 고유한 본질을 자신의 손에서 찾았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나는 인간이고, 이것은 나의 표지다"라는 자기 선언인데, 이 선언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이 글은 필자가 인제대 철학과의 강좌중 '철학적 인간학'의 강의록 일부분을 재집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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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조용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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