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를 '인간이 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노력의 흔적'으로 해석한다면 일(노동)은 인류에게 부여된 신성한 의무이자 생존과 삶의 향상을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짐이 되어 왔다. 그리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인류의 소망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인류를 과도한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새로운 형태의 스트레스(이른바 테크노 스트레스)를 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컴퓨터의 발전은 편리함과 아울러 높은 생산성을 보장하지만 새로운 사용법을 익혀야 하는 부담과 업무 강도의 증가, 반복성 상해(RSI, Repetitive Strain Injuries)와 전자파 장해에 대한 심리적 압박 등으로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생활환경이나 일을 단순히 경제적인 척도로만 재어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 생활환경의 많은 부분을 양보하거나 열악한 작업 환경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의 과거였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한 범주인 인간공학은 한마디로 사람과 일,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의 조화를 꾀하는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화나 과학 기술에 의한 역기능을 최소화해 인간을 보호하며 보다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공학의 목표다.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해야
저명한 인간공학자인 맥코믹과 샌더스는 "인간공학의 주된 관심은 인간이 만들어낸 환경(설비 시설 건축물 도시 등) 물건(도구 기계 자동차 등) 및 작업절차 등으로 인간의 복지를 유지하면서 인간과 기계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조화시키기 위해 인간의 특성(인간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각 환경과 물건 작업절차 등의 설계에 적용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는 인간공학의 기본적인 철학이 어떤 제품이나 환경, 또는 작업 절차 등을 만들 때 그것을 사용하게 될 사람을 미리 염두에 두고 설계하며, 완성된 제품이 나오기 전에 미리 시험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용하게 될 사람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과 같다. 예를 들어 전철의 자동 매표기는 이 기계를 처음 사용해보는 시골 할머니도 사용 가능하도록 설계해야 하며, 자동차의 계기판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고령 운전자를 감안해 설계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은 대체로 달리기나 무거운 물건 들어 올리기 등 육체적인 능력은 가장 뛰어난 사람과 평균적인 사람의 비가 2:1을 넘지 않는다(1백m 달리기의 경우 세계기록이 9.8초대인데 반해 느린 사람도 20초 이내에 뛸 수 있다). 반면 사고 능력에 있어서는 이보다 훨씬 큰 차이가 있어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경우 10배 이상 차이가 날 수 있다.
따라서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체형 근력 감각기관의 민감성 등과 같은 생리적인 측면이 고려돼야 하며, 더 나가 사용하는데 얼마 만큼의 기억력을 필요로 하는가, 또는 사용법은 쉽게 익힐 수 있으며 기계의 작동상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가 등과 같은 심리적이고 인지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기계와 시스템이 대형·복잡화됨에 따라 인간공학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거대한 정유화학공장의 경우 수십명의 인력으로 공장이 운영되고 있고, 원자력 발전소도 불과 4-5명의 인력이 전체 발전을 통제한다. 이러한 시설의 주제어실은 수백 수천의 계기를 통해 작동상태를 감시하고 정상운전의 영역에서 벗어나면 절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84년 12월 인도의 보팔시에서 발생한 유독가스 유출 사고나 드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에서의 사고는 이러한 복잡한 시스템의 설계에 인간공학적 설계 미흡으로 별 것 아닌 사고가 대형사고로 발전하게 된 좋은 보기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인간공학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대형시스템, 원자력발전소, 항공관제시스템, 대형선박 및 항공기의 운영에서 인간의 실수를 방지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지침을 제공하며 또 시스템의 안전을 평가하는 일이다.
5㎝ 높아진 작업대의 의미
우리는 각자 몸담은 작업현장에서 적어도 하루에 8시간 이상씩, 전 생애의 많은 부분을 일과 함께 보내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작업면의 높이를 2인치(5㎝) 조절하였더니 생산성이 20% 증가됐다고 한다. 물리적인 크기로서의 5㎝는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에서의 5㎝는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작업대의 높이가 작업자가 선 자세에서의 팔꿈치 높이보다 지나치게 높거나 낮으면 좋지 못한 작업자세를 가지게 되고, 이로 인해 신체의 여러근육이 더 많은 부하를 받아 직업성 질환의 발병률이 높아져 결국 결근 사기저하 노사관계 악화 등 기업경영에 연쇄적인 파급효과를 미치게 된다.
인간공학에서는 이처럼 작업과 관련된 작업대의 설계, 작업 자세, 작업물의 운반방법, 운반 하중에 대한 안전기준, 안전한 기계 장치의 설계 등 작업 현장에서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간공학의 연구로 말미암아 개선된 대표적 예로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에서는 자동차의 후방 충돌을 막기 위해 1986년 이후에 출고되는 승용차의 후미 브레이크 등의 위치를 시야 중앙(자동차 뒤 유리창의 중앙)에 위치하도록 법제화했는데, 이 결과 후방 충돌 사고가 급격히 감소했다. 물론 이러한 법제화는 브레이크등이 달린 위치에 따라 브레이크를 밟기까지의 지연시간이 크게 차이난다는 인간공학의 연구결과에서 시발된 것이었다.
또 다른 예로는 조정을 위해 최소 3명의 승무원이 필요하던 기존의 여객기를 컴퓨터를 이용한 패널디스플레이로 통합 단순화한 항공계기판으로 바꾼 보잉 757기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비행기는 계기판 재설계를 통해 두명의 승무원으로도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도록 해 조종사들의 업무부담을 줄이고 경제성도 높여 각 항공사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었다.
매킨토시 컴퓨터도 인간공학적인 측면에서 컴퓨터의 개념을 바꾸게 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매킨토시는 84년 복잡한 명령어를 배우지 않고도 그림운영체제(GUI)를 이용해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최초의 대중용 PC로 선보여, 이후 대부분의 컴퓨터가 그림운영체제를 갖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그림운영체제는 70년대에 제록스사의 팔로알토연구센터(PARC)에서의 인간-컴퓨터 상호작용의 연구로부터 탄생되게 되었으며 마우스나 비트맵 디스플레이도 이때 개발된 것들이다.
우리나라 인간공학 연구는 초기단계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산업공학의 분야에서 인간공학을 다루어왔다. 이같은 전통으로 인해 국내의 인간공학 연구는 작업 현장에서의 작업 생산성 향상과 산업 안전의 측면을 강조해 왔으며, 최근들어 산업디자인 가정학 심리학 산업보건학 등의 분야에서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82년 설립된 대한 인간공학회는 인간공학 분야의 학술 및 정보교류의 장으로서 현재 4백여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92년에는 세계 각국의 인간공학회로 구성된 국제인간공학회(IEA, Int'l Ergonomics Association)에 정식 가입해 94년 11월에는 범태평양 국제 인간공학 학술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인간공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인체의 형상에 관한 자료, 즉 인체 측정치에 대한 조사는 60년대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인 조사는 공업진흥청에서 KS규격과 관련해 79년에 최초로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86년과 92년에 또 한번의 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들 자료를 쉽게 검색,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한국표준과학 연구원에서 개발되기도 했다. 이 조사사업을 계기로 한국 표준 과학연구원에 인간공학연구실이 설립됐으며 그후 원자력발전소의 주 제어실 설계와 관련, 한국 원자력 연구소에도 인간공학연구실이 생기게 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인간공학 분야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이는 달리 말해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다양하고도 충분한 특성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다. 인간공학 분야는 조사와 실험을 바탕으로 자료를 축적해나가는 분야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많은 비용이 유발돼 지금까지의 여건상 이러한 자료의 축적이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최근 들어 시장개방과 아울러 국제 표준화에 대한 압력이 거세지고 있는데, 국제 표준화에 있어 인간공학 분야 또한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인간공학 분야의 표준화안 가운데 ISO 9241은 정보 표시기에 대한 국제 표준으로, 컴퓨터 등 정보기기 수출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각국에서는 국제 표준화 과정에서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가 국제 표준화 과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고유의 연구결과와 자료들이 뒷받침돼야 하므로 앞으로 이 분야의 기초자료 축적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야 할 것이다.
질 높은 삶과 노동환경을 위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공학이란 우리 삶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매우 다양하고 넓은 분야에서 적용되고 있는 학문이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게 되면 새로운 기술과 인간 사이의 연계에 관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따라 앞으로는 이 분야에서의 인간공학 연구도 크게 증가될 것이다.
미래의 가전제품은 고품위 TV에 컴퓨터 전화 팩스 쌍방향TV 등이 복합된 복잡한 형태가 될 것이며, 이러한 기기를 효율적으로 쉽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에 대한 많은 인간공학적 연구가 필요하다. 이미 AT&T의 벨 연구소에서는 이러한 연구에 종사하는 연구원만 2백여명이 넘는다. 또한 일본에서도 인간공학을 기반으로 국민 복지를 향상시키고 일본 제품이 계속 경쟁력을 갖추도록 감성 설계 기술 개발에 매년 1천6백억원 이상을 투자하고 있는 실정이다.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신공항 고속철도 고속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SOC)에 대한 엄청난 투자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거대 프로젝트들의 기본적인 목표는 역시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역사(大役事)를 진행하다 보면 정작 이들 시설을 사용하게 될 '사람에 대한 고려'는 건설 그 자체에 비해 아주 작은 일로 치부되고, 건설된 다음의 일이기 때문에 건설 당시에는 등한히 하기 쉽다. 또 이러한 면을 고려하느라 시간을 끌면 경제적으로 손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일단 시설이 완성되면 앞으로 수십수백만명이 시설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 사용하게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공공시설에 대한 인간공학적인 설계와 평가는 공사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기계와 시스템은 사용자들이 편리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쾌적하게 사용할 수 있을때 비로소 있어야 할 이유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나라의 인간공학 분야가 진일보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마도 일본의 간사이 국제공항 건설 과정은 우리에게 큰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공학은 학제적(interdisciplinary)인 연구 분야다. 따라서 학문 영역 사이의 담을 헐지 않고는 발전하기가 어렵다. 다행히도 우리 교육계는 교육개혁을 위한 움직임과 함께 학문 영역간의 벽 헐기에 힘쓰고 있다. 앞으로 국민학교에서부터 인간공학의 개념을 가르치며 이공계 대학의 대부분 학과에서도 기본적인 내용이 강의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삶과 노동의 질이 조속히 향상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