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란 자리는 한 나라의 모든 정책을 최종 결정한다. 과학기술정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아니, 어쩌면 과학기술 정책이야말로 대통령의 태도에 가장 크게 영향받는 분야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과학점수를 따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덕연구단지 연구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우스갯 소리 중 하나. 한 과학교사가 우리나라 역대 다섯 대통령에게 어둠상자를 주면서 부수지 말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알아보라는 문제를 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질문을 받자마자 당장 "나는 점장이가 아니니 알 수 없다"며 포기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를 시켜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오게 한다. 전두환 대통령은 어둠상자를 이리저리 격렬하게 흔들어보고 끝내 부숴버린다. 노태우 대통령은 부수지 말라는 말에 손도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나도 7등(G7) 안에 들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어둠상자니 안에는 당연히 어둠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역대 대통령의 과학기술관을 풍자한 이야기다. 이승만 대통령은 과학기술을 일종의 '요술'로 생각한 반면 노태우 대통령은 말만 번드레하고 실천력이 없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적당한 말로 본질을 회피한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 또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대해 대단한 집념을 가졌지만 비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연구원들의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는 단연 박정희 전두환 두 대통령이 꼽힌다. 나이가 많은 연구위원과 책임 연구원들은 주로 박대통령을, 상대적으로 젊은 선임연구원들은 전대통령을 내세우는 편이다.
알렉산더 드골 네루,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의 과학기술관은 일단 선거공약에서 그 단편을 찾아볼 수 있다.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과학기술을 들먹인 것은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이승만 후보가 처음.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과학기술 총괄기구 설치, 과학기술 교육 및 연구시설 확충, 원자력 사업 적극 추진 등 지금 다시 써먹어도 될 성 싶은 공약들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3번째 출마한 1971년 제7대 선거에서 처음으로 과학기술 진흥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과학기술 그 자체보다 경제성장에 중점을 두었다.
과학기술 정책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은 1987년 제13대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처음이다. 노후보는 당시 과학기술 투자를 1991년까지 GNP의 3%, 2000년대 5% 이상으로 한다는 성당히 구체적인 공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실 이 공약은 전임 전 대통령의 소신에서 뒷받침된 것이다. 다섯 대통령은 모두 집권당의 후보로 나서 당선됐고 집권당은 항상 행정부의 지원으로 공약을 만드는 프리미엄을 안고 있었다. 따라서 대통령의 공약을 그대로 대통령 개인의 가치관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대통령의 과학기술관이 중요한 이유는 과학기술에 있어서 권력의 후원이란 날개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발견과 발명은 대부분 '시장(市場)'보다는 왕실 주변에서, 궁핍보다는 풍요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둔 알렉산더대왕은 과학의 중심을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 사변 중심의 과학에 경험 중심의 기술을 불어넣었다. 프랑스의 과학이 나폴레옹의 대륙 정벌을 계기로 합리주의에서 실용주의로 넘어간 것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찰스2세는 1660년 설립된 왕립학회를 인가했고 프랑스의 루이14세는 1666년 파리 과학아카데미를 후원해 '자연물의 지식, 유용한 기술, 실험에 의한 발명' 등을 증진시켰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설치해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앙부일구 등을 개발토록 해 문물을 진흥시켰다.
현대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으로 과학기술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 대통령(수상)으로는 프랑스의 드골, 미국의 케네디, 일본의 나카소네, 인도의 네루 등이 꼽힌다. 드골은 원자력 해양 항공 3개 분야에 국력을 집중시켜 2차대전에서 엉망이 된 프랑스의 자존심을 되살려냈다. 케네디는 1957년 소련이 먼저 우주선을 쏘아올린 '스푸트니크 쇼크'에 맞서 아폴로계획(Man on the Moon)을 성공시켜 '위대한 미국'의 콧대를 높였다. 나카소네와 네루도 원자력 등 과학기술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 각각 일본과 인도의 부국강병을 실현하는데 큰 몫을 한 것으로 칭송받고 있다. 모두 2차 대전 후 원자력과 국방을 비롯한 과학기술에 전력 투자해 자국을 현대사를 주도하는 국가로 키워낸 것이다(단, 인도는 네루 이후 핵무기 확보에 지나치게 치우쳐 경제를 살리는데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근대 문물 처음 접한 고집 센 시골 노인
이들 대통령의 과학기술관 밑바닥에는 국가적인, 또는 민족적인 자존심이 강하게 남아있다. '지금은 뒤지고 있지만 곧 앞지르고야 말겠다'는 뿌리깊은 경쟁심이라고나 할까. 경우는 모두 다르지만 2차대전 후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미국은 소련에 대해, 일본은 미국에 대해, 인도는 영국에 대해 다양한 모습으로 자존심 회복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대통령은 그 수단으로서 과학기술을 택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해방후 일본에 대해, 동란 후 소련과 중국에 대해 증오를 불태우며 초창기의 대통령들은 과학기술로 자존심 회복을 시도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어서 원자력은 민족에게 8.15해방을 선물한 고마운 존재였다. 또 한국전쟁 때 "이것 한 방이면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다"는 맥아더의 한마디에 금방 현혹된 만큼 원자력은 귀가 솔깃한 대상이었다. 그에게 원자력은 곧 원자폭탄을 의미했고 '한 방이면' 해방과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엄청난 힘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따라서 이 대통령이 원자력이 가져올 엄청난 혜택과 공포에 대해 전혀 눈 뜨지 못한 채 '뭔지 모르지만 하나 갖고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56년 미국은 한국의 전력 복구사업을 돕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 휘하에서 2차대전 후 유럽의 전력 복구사업을 총괄지휘한 W.L. 사이슬러씨를 한국에 보냈다. 그는 이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에너지박스'라는 작은 상자에서 1.5kg의 석탄을 꺼내 "이것으로 4.5kW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같은 무게의 우라늄 막대기를 보여주며 "이것을 고속증식로에서 태우면 2백60만배가 넘는 1천2백만kW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원자폭탄을 갈망하는 이대통령에게 원자력 발전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이대통령은 서둘러 원자력법을 제정하고(1958년)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1959년). 또 미국에서 보내오는 원자력 관련 공문과 책자는 모두 경무대로 배달토록 하는 등 원자력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 원자력 연구소가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연구소로,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연구소(KIST) 등 다른 연구소를 발족시켜 과학기술의 저변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했다.
유엔의 원조로 1956년 가동하기 시작한 문경 시멘트 공장을 방문한 이 대통령은 커다란 석회석 바위가 삽시간에 돌가루로 변한 뒤 시멘트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치 시골 노인이 아들이 근무하는 공장을 처음 방문한 것처럼 경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당시 우리나라에는 과학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경탄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에게 과학기술이란 일종의 마법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에너지박스'가 '매직박스'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 대통령은 한번 돌리면 영원히 움직인다는 영구기관 이야기를 어디서 전해 듣고 미국에서 돌아온 과학자들을 붙잡고 영구기관을 만들어달라며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래서 과학기술에 관한 이 대통령의 이미지는 근대 문물을 처음 접한 '고집센 시골 노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대통령이다. 그의 자존심은 부국강병, 곧 경제와 국방의 두 방향으로 두드러진다. 그는 일찍부터 경제와 국방에서 자존심을 살리는 지름길은 결국 과학기술로 모인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는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경제기획원의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기술분야의 대책이 빠졌다고 지적하는 치밀함을 보였고 태릉의 연구용 원자로를 시찰하면서 원자력에 대해 큰 감명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박대통령은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과 인도 네루 수상의 과학기술 정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강력한 리더십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기술분야에서 박대통령은 강력한 리더십을 배경으로 국가적인 동원체제를 구성해 과학기술의 기반을 닦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1966년),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및 과학기술처 설립(1967년), 기술개발촉진법 제정 및 종합과학기술 심의회 설치(1972년), 대덕연구단지 건설 착수 및 한국과학원(KAIST) 개원(1973년) 등이 일단 연표상에 나타난 그의 업적이다. 곧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1976년 과학기술처를 연두순시할 때 쓴 '과학입국 기술자립'이라는 휘호에서 잘 드러난다.
기술 사기꾼에 사기당한 박대통령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관은 KIST 설립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1965년 미국 존슨 대통령이 한국군의 월남 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한가지 선물을 약속하자 그는 공업 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를 요구했다. 당시 존슨 대통령은 과학고문인 호닉 박사의 제안으로 공과대학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박대통령은 연구소를 요구한 것이다. 또 존슨 대통령은 5백만달러 정도의 원조를 예상했으나 박대통령은 2천만 달러를 요구해 결국 9백만 달러를 받아냈다.
박대통령은 초대 연구소장으로 최형섭 박사를 임명하면서 두가지를 당부했다. 예산을 따내기 위해 절대로 경제기획원에 들락거리지 말고 국회의원들의 인사 청탁을 단호하게 거절하라는 것이다. 한편 감사원장에게는 KIST쪽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박대통령은 철저하게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켰다. 박대통령은 예산 조정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KIST가 올린 예산이 경제기획원에서 삭감된 것을 발견하면 무조건 원상회복을 지시했다. KIST 부지를 선정하기 위해 직접 홍릉 임업시험장을 방문하고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KIST는 더 중요하다'며 15만평을 마련해줬다.
공사를 돕기 위해 공병대를 파견해 주변 도로를 닦게 하고 한달에 한두번씩 공사 현장을 방문해 "과학자들은 공사에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직접 인부들에게 막걸리 값으로 금일봉을 쥐어주기도 했다. 서울공대에서 "KIST 연구원의 월급이 교수보다 3배 이상 많다"고 불평하자 직접 급여수준을 비교해보고 "과연 나보다 월급이 많은 연구원들이 수두룩하군"하고 웃으며 그대로 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지금의 KIST가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꿈만 같은 시절이다.
1970년대 들어 베트남이 적화되고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방침이 전해지면서 박대통령은 자주 국방의 의지를 다졌다. 박대통령은 핵무기를 완성하기 위해 1973년 한국 원자력연구소를 독립시키고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려다 이듬해 인도의 핵실험으로 핵무기 확산을 우려한 미국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고 만다. 이에 박대통령은 당초 계획을 축소해 프랑스 차관으로 우라늄 정련 시설을 도입하는데 그쳤으나 1976년 한국 핵연료개발 공단을 설치해 자체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등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박대통령은 한국 과학 기술이 이룩해낸 가장 뛰어난 성과로 평가되는 한국형 유도탄개발사업(일명 백곰 프로젝트)을 지시했다. 이 유도탄은 국산화율이 80%로 7번의 시험 발사 끝에 1978년 9월26일 멋진 포물선을 그려 박대통령이 감격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이 유도탄 발사기술을 계속 발전시켰으면 우리나라는 1980년대 중반에 자체 기술로 위성을 발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두번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자신을 얻은 박대통령은 오원철 경제수석을 통해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이에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기계 선박 전자 석유화학 원자력 등의 핵심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분야별 출연연구소를 잇따라 설립했다. 이때 설립된 출연연구소는 모두 13개에 달한다.
과학기술자의 수요가 크게 늘어 거액을 주고 해외 과학자들을 끌어들였지만 연구소 설립 초기였기 때문에 이들 유치과학자들은 행정에 시간을 낭비해 연구에 몰두할 수 없었다. 유학파 박사들이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너도나도 유학을 떠나고 이에 따라 국내파 박사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또 '대통령보다 많은 봉급'을 받게 되면서 시끄러운 기계소리나 고약한 약품 냄새가 나는 연구실에 들어가지 않고 호화로운 해외나들이나 즐기는 귀족과학자와 터무니 없는 기술로 돈을 요구하는 기술 사기꾼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원자폭탄에 대한 집념 때문에 사기를 자주 당했다. 미국에서 유한한 일부 사이비 과학자들이 수백만 달러를 주면 원자폭탄을 만들어주겠다며 돈만 떼먹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이들중에는 낙하산 인사로 원자력 연구소에 들어와 고문까지 지낸 사람도 있다.
"밥통도 못만드는 밥통들"
전두환 대통령의 등장은 과학기술계에서도 '쿠데타적인 사건'이었다. 1980년 출연연구기관 통폐합 방침으로 16개의 연구소가 하루아침에 8개로 줄어들고 모두 과기처 산하기관으로 재편된 것이다. 기능이 중복되거나 부실한 연구소를 통폐합해 불필요한 관리비를 줄이고 연구실 위주의 연구소를 운영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 방침은 연구소에 기생하는 귀족과학자와 기술 사기꾼들을 몰아내고 과학기술계의 누적된 병폐를 도려내 연구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연구소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늘어나 인사와 재정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과기처장관의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 연구소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물리적인 통폐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연구소에 각종 분란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쿠데타적 사건'으로 등장한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 미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간 박 대통령이 미국의 눈을 피해가며 공들여 쌓았던 자주국방기술을 훑어버리는 작업을 과감히 단행했다. 박 대통령의 원자폭탄과 유도탄에 대한 집념 때문에 미국이 박대통령을 경계한 것을 알고 있는 전대통령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원자력과 유도탄 기술 개발을 중단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전대통령은 1981년 원자력연구소와 핵연료개발공단을 통합해 한국에너지연구소라고 이름붙였다. 원자력이나 핵이라는 용어조차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어 이듬해 국방과학연구소 숙정작업에 착수해 유도탄 개발팀을 비롯해 거의 절반 가량의 연구원들을 쫓아냈다.
이때부터 국방기술은 자생력을 잃고 쇠락의 늪에 빠져들었으며 각종 무기 도입으로 비리의 온상을 배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뜻밖에도 국방과학연구소의 우수한 연구원들을 민간기업으로 보내 기술개발을 주도하고 원자력 발전의 기술 자립을 가져와 고도의 국방기술을 민간에 이전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대통령은 민간기업의 기술 개발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직접 기술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고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시작해 본격적인 국산화 붐을 일으켰다. 각종 세제 혜택과 병역특례로 기업이 다투어 부설 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이때부터다. 특히 반도체 컴퓨터 교환기 등 정보통신 산업에 대한 국가적인 투자로 우리나라를 남부럽지 않게 한 것도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다.
과학기술에 대한 전대통령의 자존심은 민간 기술에서 잘 나타난다. 이른바 '코끼리 밥통사건'이 그 대표적인 보기다. 1982년 고위 공직자의 부인들이 일본에서 코끼리 밥통을 하나씩 안고 들어온 것이 신문에 보도돼 많은 사람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그러나 전대통령은 당시 국내 기술로는 그만한 제품을 만들 수 없다는 보고를 받고 "밥통도 못만드는 밥통들"이라며 화를 버럭냈다. 그리고 무조건 6개월 안에 비슷한 밥통을 만들어내도록 지시했다.
이 작전이 훌륭하게 성공하자 그는 '생활 필수품 1백개 품목 품질 향상 전략'을 지시했다. 손톱깎기 넥타이핀 라이터 만년필 안경테 등 생활 필수품 1백개를 골라 '밥통작전'과 같은 방법으로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어내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직접 사용해본 뒤 합격 여부를 판정했다. 이때부터 이태원은 없는 것이 없는 값싼 복제품의 천국으로 외국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었고, 외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외국에서 선물로 살만한 것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무소신으로 일관한 '앵무새' 노 대통령
박 대통령과 전 대통령의 과학기술정책은 묘한 공통점과 대비점을 보여준다. 우선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과학기술이라는 인식 아래 과학기술은 경제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전제를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다. 경제와 과학기술의 조율을 위해 박 대통령은 오원철 경제수석과 최형섭 과기처 장관으로, 전 대통령은 김재익 경제수석과 김성진 과기처장관으로 이어지는 참모를 두고 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했다. 테크노크라트를 앞세운 소수 정예주의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외국에서 유학한 민간 박사들에게 도장을 맡긴 반면, 전대통령은 군출신의 박사들에게 지휘봉을 맡겼다는 것이 눈에 띄는 차이점이다. 두 대통령의 과학기술관을 설명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공통점으로는 무엇보다 과학기술에 꾸준한 관심을 갖고 솔선수범해 약속하고 약속을 지켰으며 그 결과를 끝까지 챙기는 추진력을 들 수 있다.
노태우 대통령 대에 와서 경제와 과학기술의 조율은 깨졌다. 이때 경제는 무역에서 처음으로 흑자를 실현했고 과학기술도 반도체 컴퓨터 교환기 등 정보통신에서 당당한 성공을 자랑했는데도 불구하고 경제와 과학기술의 반목이 시작된 것이다. 1986년 반짝 흑자 이후 노대통령의 재임기간동안 나타난 경제 침체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경제는 과학기술 정책의 부재라고 몰아 세웠고 과학기술은 경제정책의 실패라고 반박했다. 이 갈등관계는 김종인 경제수석과 정근모 과기처장관의 대립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당시 노 대통령은 과학기술 비서관제를 폐지하고 경제수석이 과학기술정책을 맡도록 했다. 따라서 김종인 경제수석은 자연스럽게 과학기술을 정책 실패의 희생양으로 내몰 수 있었다.
김 수석은 1990년 안면도 사태를 빌미로 정장관을 몰아내고 이듬해 '출연연구기관 재평가 및 기능 재정립'을 단행했다. '연구소 두들기기로 불렸던 이 재평가 결과 출연연구소들은 경제기획원의 눈치를 살피고 감사원의 잔소리에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으로 향하는 연구원들의 엑서더스가 줄을 이었다.
이에 노대통령은 선도기술개발사업(G7 프로젝트)으로 1992년부터 2001년까지 3조7천억원을 투입한다는 당근을 내밀며 G7의 환상을 제시했다. 또 1991년 과학기술자문회의를 설치해 과학기술계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유화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별다른 소신을 갖지 못하고 결국 경제수석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발표하는데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중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학기술을 단편적이고 임기응변식의 경제처방으로 생각했고 5년의 임기동안 4명의 과기처장관을 두어 정책의 일관성을 흐트렸다. 또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과학기술을 둘러싼 부처이기주의가 팽배한 가운데 이를 조정하는데 실패, 숱한 행정력 낭비를 초래한 것으로 지적된다.
문민시대의 세종대왕은 가능한가
노대통령의 나약함은 원자력 분야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노대통령은 1990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설치로 인한 안면도 사태를 겪고 나서 남달리 원자력의 평화적인 이용을 강조했다. 그러나 평화적인 이용은 금방 비난에 직면했다. 1991년 발표된 한반도 비핵 선언이 야당은 물론 원자력계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비해 선언은 당시 북한의 핵개발을 사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고려한 카드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노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으로 외무부는 물론 과기처와 사전협의도 없이 비핵 선언을 발표해버렸다. 어쨌든 최근 문제되고 있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볼 때 당시의 비핵선언은 너무 무모하고 섣부른 전략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스스로 '과학기술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올해 과학기술 예산을 31%나 올려주고 과기처 업무보고를 제일 먼저 하도록 배려했다. 또 지방도시를 순시할 때마다 반드시 지방 유지 가운데 과학기술계인사를 배석시켰다.
전국 15개 시도에 과학기술 담당부서를 두어 지방자치단체가 스스로 지역특성에 맞는 과학기술 진흥 사업을 펼치도록 했다. 서울대 졸업식에 참석하듯 한국 과학기술원(KAIST) 졸업식에도 참석했다. 한국과학기술원과 한국 과학기술연구원(KIST)을 혼동하는 정도는 별 것 아니다. 군 출신의 대통령이 가지 못하는 서울대 졸업식에 모습을 비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과학 영재들의 졸업식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노 대통령이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은 과학의 날 기념식에도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김 대통령은 과학기술에서도 문민시대의 복음을 전파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연극 냄새가 난다. 취임이후 세종대왕의 묘를 찾고 세종로에서 충무공을 치우고 세종대왕을 옮겨놓으려 하는 작위의 냄새가 풍긴다. 김대통령은 세종대왕을 문민의 표상으로 내세웠다. 아니 스스로 '문민시대의 세종'이 되고 싶은 것이다. 김대통령의 측근들은 40년 동안의 '대통령 만들기'를 마치자 마자 5년동안의 '세종만들기'에 착수했다. 과학기술은 '대통령 만들기'에서는 별필요 없지만 '세종 만들기'에는 상당히 중요한 소품이다. 세종은 주로 한글과 과학기술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매달 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료는 '세종2000'이라는 표지를 달고 나온다.
세종시대의 대표적인 과학자는 장영실이다. 김대통령은 올해 1월 청와대에서 장영실상 수상자 초청 다과회를 갖고 45분간 2백명의 과학자들과 '기분좋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김대통령의 과학기술관은 화장기 없는 모습을 비친 적이 거의 없다.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92년 저술한 '김영삼 2000 신한국'이라는 책에는 '과학기술전쟁시대에 나라의 지도자는 과학기술 사령관이 돼야 한다'는 식의 화려한 주장만 계속 밝혀질 뿐이다. 따라서 전임 대통령의 원자력관을 별 수정 없이 과학기술관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김대통령의 원자력관으로 과학기술관을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김 대통령은 노대통령과 함께 아직 한번도 원자력 관련 시설을 시찰하지 않은 대통령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대통령은 수시로 원자력 관련 시설을 둘러본 데 반해 김대통령은 1993년 원자력 연구소 마당에 잠시 들렀을 뿐이다. 물론 관련 시설 시찰만이 관심도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김대통령의 원자력관은 아직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또 1993년 김시중 과기처장관이 국정감사에서 비핵선언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폭탄선언처럼 발표했을 때 김대통령은 이를 가볍게 나무라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최근 북한 핵사찰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대응방안을 볼 때 김대통령의 원자력관은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으며 비서진도 이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소신있는 참모가 아쉽다.
대통령 개인의 과학기술관이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하다면 한 국가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은 대통령의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라 요동칠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일부 테크노크라트의 판단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국가의 과학기술이라면 일찌감치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는 틀린 일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과학기술정책이 작위적 냄새를 풍기는 것은 극소수의 주변인에 의한 '세종만들기'로 추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모든 과학자들이 공감하는 '세종만들기'다. 극소수의 '세종 만들기'는 작위의 냄새를 풍기지만 대다수의 '세종 만들기'는 무위의 자연스러움으로 빛난다.
과학기술계의 대통령만들기는 과학기술을 좋아하는 특정한 개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떤 대통령이 나오든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의회의 역할이고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를 비롯한 과학기술 관련 압력단체의 몫이다. 또 과학기술자들의 몫이고 유권자들의 신성한 의무다.
결국 과학의 합리주의가 민주주의와 함께 해내야 할 새로운 전통이다.
최형섭 전 장관은 "당시 나는 대통령을 그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박대통령은 나의 말을 95%이상 들어주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90%이상 받아주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과학자를 존중하는 대통령과 대통령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과학자가 필요한 시점에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과학기술사령관인 김대통령의 어둠상자에 더 이상 어둠이 담겨 있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