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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로운 과학인가 20세기 신화인가

세계 과학ㆍ철학계의 논란

가이아 이론이 등장하자 과학계와 철학계는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과학의 성격을 띠면서도 신화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가이아 이론 자체의 특성 때문이었다. 가이아 이론은 과연 과학인가 신화인가.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Gaia)'이론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과연 하나의 새로운 과학이론인가 아니면 그 어떤 종교적 성격의 신화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가이아 이론은 단순한 과학도 아니요, 단순한 신화도 아니다. 가이아 이론은 분명히 과학의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도 신화로서의 모습 또한 지니고 있는 양면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가이아 이론이 어떠한 의미에서 하나의 과학으로 성립하며, 하나의 과학이론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체계와 내용을 갖추고 있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으로는 가이아 이론이 과연 신화로서의 성격을 지니는지, 그리고 만일 이것이 신화적 성격을 지녔다고 하면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이아 이론의 경우 이것이 과학인가 아닌가, 그리고 신화인가 아닌가를 판정할 기준은 비교적 간단하다.

가이아 이론의 요지는 한마디로 "지구가 살아 있다"는 말로 축약될 수 있는데, 이러한 주장이 과학적 내용을 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이것이 과학이냐 아니냐가 결정될 것이다. 또 이러한 주장이 신화적 내용을 함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신화냐 아니냐가 결정될 것이다.

우주에서 본 지구

우선 제임스 러브록이 붙인, 살아있는 지구를 지칭하는 '가이아'라는 말의 연원을 살펴보자. 이것은 다분히 신화적 내용을 함축하는 희랍어 '대지(Earth)'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이 개념이 역사를 통해 널리 존속해 왔고 지금도 여러 종교의 신조 속에 포용되어 상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우주선 안에서 깊은 어둠의 공간을 배경으로 찬연히 빛나는 지구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하게 된 현대인들은 이러한 고대의 신앙과 현대의 지식이 융합된 깊은 경외의 감정을 담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제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이 대지가 살아 있다는 증명이 되지 못함을 그는 인정한다. 그는 우주 공간으로의 여행이 지구를 육안으로 보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지구상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 상호작용에 관한 새로운 직관을 제공해줌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하나의 가설이 성립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가이아 가설'이라고 그가 부르는 이 가설의 내용은 지구의 대기 바다 지표면들이 지구상의 생물들과 그 어떤 유기적 결합을 이룸으로써 그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생물과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이며, 이는 지구에서 생명이 서식하기에 적합한 조건들을 유지시켜준다는 것이다.

가이아이론은 과연 과학인가

지구상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한 가설을 설정할 때 종래에 파악할 수 없었거나 파악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 가이아 이론의 핵심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이론은 가설연역체계라고 하는 과학이 갖추어야 할 형식 요건을 일단 만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이론이 현실적인 과학이론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설연역체계의 형식을 취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또한 이것과 기존 이론들 사이의 정합성의 요건을 만족해야 한다.. 즉 이 이론은 기왕에 알려진 기본 법칙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거나 최소한 설명될 소지는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기존 기본법칙들에 분명히 어긋나거나 혹은 이들에 의해 설명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배제된다면 이는 적어도 현행 과학의 테두리 안에서는 과학으로 인정될 수 없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은 이러한 면에서 문제가 없지 않다. 우선 "지구가 살아 있다"는 말로 대표되는 그의 주된 가설이 자연의 기본 법칙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준다.

러브록은 "가이아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이것이 모든 지구상의 생물들에게 생존에 유리한 일정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는 가이아의 세계가 다윈의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해 왔기 때문"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이아 자체는 변이와 선택이라는 일차적 의미의 다윈 자연선택 과정을 거쳐 형성된 자기복제적 개체가 아니다. 따라서 목적지향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가이아의 속성은 기존 진화이론의 메커니즘을 통해서는 설명되기 어려운 성격을 지닌다.

여기에 대하여 러브록은 최근에 나온 저서 '가이아의 시대'에서 이른바 데이지(Daisy) 모형을 제시하며 이러한 목적지향적 기구의 형성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가이아자체가 아닌 가이아의 구성 생물들이 자연선택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전체 시스템인 가이아도 이러한 조정기능을 간접적으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간단한 모형을 통해 보이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2차적 의미에서의 진화를 통해 과연 가이아가 러브록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최적의 조정 기능을 가지는 기구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납득되기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한편 과학이 지녀야 할 여건들이 만족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좋은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과학 이론이 좋은 이론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이러한 가설이 얼마나 생산적인가, 또 그 논의가 얼마나 엄격한 논리와 개념들을 바탕으로 합법칙적으로 전개되고 있느냐 하는 구성상의 문제에 관련된다.

먼저 가이아 이론이 얼마나 생산적인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이 이론이 이전에는 기대하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을 찾아내고 설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러브록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가 하는 점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전문학자들이 대체로 찬반의 엇갈린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 이론이 얼마나 엄격한 논리와 개념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는가 하는 구성상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취약점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는 가이아 이론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가이아' 자체의 모호성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러브록에 따르면 가이아란 생물권과 지구의 화학적 물리적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그 어떤 현상에 대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며 이를 하나의 실체처럼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감성을 가진 그 어떤 존재인 듯 말하기도 하는 것은 오직 '어법상의 편의'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가이아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이것이 그 안에 놓인 생물들의 생존에 유리하도록 일정한 물리, 화학적 조건을 유지시켜준다는 일종의 기능적 측면이다.

그러나 그는 이 기능적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이를 의인화하여 '가이아'로 지칭하면서 그 어떤 신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풍겨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또다른 맥락에서는 가이아에 대하여 '생명의 가장 큰 구현'이라고 규정하면서 마치도 이것이 지구상의 생명을 대표하는 가장 근본적 실체인 듯한 여운을 남겨주기도 한다.
 

인간들이 낸 도로는 인공적인 생태섬을 만든다. 산성비로 수풀이 죽어가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도로변(위), 도시화와 오염의 관계도 밀접하다. 사진은 미국 LA의 도심지역(아래).
 

의인화된 가이아의 신화성

가이아 개념에 대해 러브록이 부여하고 있는 모호성은 이것이 지닌 신화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앞에서 언급했듯 러브록은 가이아에 대한 자신의 강력한 감정적 연대를 숨기지 않고 있으며 가이아 이론에 대한 신화화를 의도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사실상 그는 가이아 개념을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이를 틈타 의인화된 가이아가 다시 신화적 의상을 걸치고 그의 이론 속으로 자연스럽게 잠입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화'라는 말은 허구라든가 비과학적이라든가 하는 많은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를 떠나서 진정한 의미의 신화가 지니는 그 본연의 기능마저 거부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신화가 현대인의 삶에 어떠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 주는가 하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러브록의 가이아 신화는 대략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러브록은 가이아가 지구 위의 모든 생물계와 지표계로 구성된 유기체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때 그의 가이아가 인간까지 포함한 생명 전체의 본질적 면모를 대표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규모 지구물리, 화학적 환경이 생물계와 결합되면서 지니는 생명의 한 속성을 대표하는 것인지에 대해 불분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의 이론이 지니는 전체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대략 후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듯하며, 이렇게 볼 경우 가이아 안에서 인간이 점유하는 부분은 매우 미미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을 제외한 지구적 유기체의 사이버네틱스적 속성을 신화 속의 가이아에 투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승화되고 신격화되는 과정에서 인간과의 교섭대상이 되는 신적 존재로 부상하는 것이다.

만일 가이아 이론에서 러브록이 제안하는 여러 과학적 내용들이 사실로 인정된다면 가이아는 이 지구 생명 안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그 기능을 방해하거나 마비시킬 그 어떤 행위를 해서는 안되리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가이아의 존재를 신성시하여 인간이 이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또 그 안에서 심적 위안을 느끼게 한다는 데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구 온 생명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몫은 가이아의 신화가 함축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렇게 왜소한 것만은 아니다. 마치 사람이 사람됨에 있어서 두뇌와 정신이 중추적 역할을 하듯이 지구 위의 인간은 이 전체 생명 안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이에 반하여 가이아의 존재는 그것이 아무리 지구 생명을 위해 중요한 기능을 한다 하더라도 생명의 한 부분적 측면일 뿐이다. 이는 마치 사람의 순환기 계통이 아무리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사람 생명의 한 부분적 측면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인간의 건강이 순환기 계통의 건강만으로 유지될 수 없듯이 지구 생명의 건강도 가이아의 건강만으로 진단 할 수는 없으며, 더구나 가이아가 마련해주는 '보호'만으로 유지될 수도 없다.

가이아 신화가 지닌 위험은 바로 그 존재를 신격화함으로써 이 지구 생명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을 잘못 파악하여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역할과 책임마저 잠재워 버리는데 있다.

인간이 만일 지구 전체를 하나의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생명체로 파악한다면 그 가운데 한 기능적 단위인 가이아에 대해 이를 모시고 섬겨야 할 존재로서가 아니라 소중히 간직하고 보호해야 할 신체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옳다.

그리고 만일 인간이 이러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지각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위에만 몰두하여 스스로의 번영만을 일삼는다면 이는 마치 신체 안에서 암세포가 하는 역할과 다름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가이아 신화에 사로잡힌 러브록은 인간이 이 전체 생명체 안에서 암적 존재가 될 수 없음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가 보는 시각에 의하면 인간은 너무도 왜소하여 암적 존재가 되기에는 몹시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인간의 존재 의의를 부당하게 격하시킬 뿐 아니라 인간이 지닌 위험성마저 감추어버리는 위험을 지닌다.

러브록이 가이아의 안위를 위해 열대 삼림의 보호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가이아는 인간들의 거친 행동에 의해 해를 입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므로 환경주의자들이 말하는 많은 주장들은 불필요한 우려라고 말하는 것이 그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과연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혹은 지구는 과연 인간이란 종을 지켜줄까. 걸프전의 잔해가 널린 스산한 현장.
 

인간을 수동적 존재로 만들 우려

몇 가지 결함에도 불구하고 가이아 이론은 과학으로서의 기본성격을 지녔을 뿐 아니라 의미있는 생산적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무엇보다도 지구 생명을 보는 거시적 시각을 새롭게 마련했다는 데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러브록은 또한 이러한 내용을 단순한 과학 언어에만 묶어두지 않고 경외와 교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신화의 형태로 엮어냈다. 그럼으로써 현대인들의 감성에 호소하여 그 중요성을 한층 부각시키고 이들의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다른 한편 상황을 왜곡하고 자칫 오도된 판단으로 이끌 수 있는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암암리에 인간은 신적인 존재인 가이아의 규칙에 복종해야하는 피동적 존재이며, 동시에 그의 규칙에 복종하기만 하면 그에 의해 안락한 보살핌을 받게 된다는 안이한 원시 종교적 세계관에 빠져들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가이아 이론이 하나의 과학 이론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좀 더 선명한 과학적 개념에 입각하여 그 체계를 가다듬음과 동시에 성급한 신화화에서 탈피하여 보다 넓고 깊은 의미를 담아낼 개념의 틀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하리라 생각된다.
 

유정의 불길이 타오르는 장면을 배경으로, 원유를 담았던 드럼통의 모습이 '전쟁의 끝'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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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장회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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