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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국내 제작환경에서 PC용 게임을 만드는 일은 어지간한 워드프로세서 만드는 것 못지 않게 힘들다. 엄청난 물량이 동원된 외국제품에 맛들인 사용자들의 눈은 고급이라서 힘겹게 한 작품 만들고 나면 남는 건 빚 뿐이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대개 '컴퓨터 프로그램 제작자'하면 시설좋은 고층 빌딩의 깨끗한 사무실과 컴퓨터가 놓인 넓은 탁자를 연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런 장면은 밑천 두둑하고 장사도 잘 된 경우에나 해당될까, 국내에서 소프트웨어, 특히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에겐 꿈같은 일일 뿐이다.

국산 컴퓨터 게임으로 드물게 1만카피가 팔리는 등 폭발적 인기를 모았던 '폭스 레인저' 시리즈의 개발자인 'SA팀(소프트 액션)'의 개발실은 서울 도심을 벗어난 구파발 넘어 북한산 자락에 있다. 작년 엑스포기간중 포항제철 소재관에서 상영된 입체 컴퓨터 그래픽의 음악을 맡기도 하는 등 컴퓨터 음악계의 작·편곡가로 널리 알려진 팀장 남상규씨(29)의 전세집이기도 한 이 작업실은 위치 만큼이나 내부 모습도 보통의 기대를 깨고 있다. 제작에 소용되는 도구라고는 정리되지 않은 자그마한 방 3곳에 각자 배당된 PC 한 대씩이 전부. 그나마 기대되는 모양새를 갖춘 곳이라면 음악을 담당한 남씨의 작업실이 유일한데, 이 방에 들어찬 용도 모를 기계들도 게임 제작과는 무관하게 남씨가 지금은 게임 몰두를 위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음악 편곡 일을 할 때 모아놓았던 것들이다.

지금까지의 발표된 작품뿐 아니라 게임 제작 학원의 강의 등으로 이 계통에서 명성높은 이팀이 이렇듯 '오지'에 묻혀 있는 것을 아는 이는 몇이나 될까. 명성에 비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이들의 작업환경은 우리 소프트웨어 업계의 전반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SA 팀의 구성원은 모두 10명이고 이들의 평균 연령은 24.5세. 평균 연령을 높여 놓은 팀장 남씨를 제외하곤 전원 총각이다. 모두 게임이 좋아 알음알음 하나 둘 모였다. 이들은 모두 1주일 내내 한솥밥을 먹으며 '아무리 자주 해도 질리지 않는 마약과도 같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남들 다 자는 시간까지 모니터 앞에서 머리를 짜낸다. 자, 그러면 이제 이들의 일을 통해 과연 게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펴보자.
 

SA팀 멤버들. 왼쪽부터 김의균(기획) 백일신(프로그래머) 정진범(프로그래머) 조중현(그래픽) 남상규(음악) 문준선(그래픽) 유성근(그래픽)  이현종(음악).
 

영화 만들기와 게임 제작

게임 제작은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영화 제작의 첫번째 일이 기획이듯 게임 제작의 첫번째 일도 기획. 완성된 게임이 나오기 전 기획자의 머리속에는 이미 완벽한 한 편이 제작돼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게임 기획자는 영화의 감독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게임은 기획자가 직접 각본을 써야한다는 정도.

기획자는 전체적인 줄거리와 구성 흐름도 등이 담긴 게임 원안서를 작성하고 이를 게임과 연결되도록 각색해 최종 완성된 기획안을 작성한다. 이 과정에서 게임 해석방법, 즉 아케이드 어드벤쳐 롤플레잉 시뮬레이션 중 어떤 장르의 것으로 할 것인가도 결정된다. 완성된 기획안이 부실하면 제작 전 과정에까지 영향을 미쳐 심지어 제작 마지막 단계에서 게임을 포기하는 불상사도 벌어지기 때문에 한 작품의 기획안은 수정에 수정을 거치고 나면 장편소설 몇 편은 나옴직한 엄청난 분량이 되고 만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성만으로 기획자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 보다 더 어려운 일은 시나리오 완성 후 6-7개월이 소요되는 동안 얼마든지 남아있다. 하이텔 구인광고를 보고 SA팀에 합류, 기획을 맡고 있는 김의균씨(22)는 "시나리오 작성은 기획자의 역할중 10%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프로그래머와 음악담당,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적정한 작업을 할당하는 것. 대개의 경우 프로그래머는 그래픽이 나와야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는데,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며 제작 일정이 어느 한 분야에서 정체되지 않고 순조롭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획자의 조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사실 게임 제작 전반이 그렇지만 기획 분야는 더더구나 국내에서 배울 곳이 없어요. 특별히 학문적 영역으로 구축된 것도 아니어서 외국의 자료를 찾아 읽으며 공부하는 게 전부입니다. 외국의 대형 게임 제작업체들은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된 기획서가 따로 있다지만 국내에서 그 정도 준비가 된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기획자는 또 프로그래밍으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을 프로그래머와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요구하지 않기 위해 하드웨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IBM PC용 게임은 메모리 한계와 같은 장벽에 의해 오락실 게임 제작과는 또다른 어려움이 있다. '좋은 게임 기획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불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은 바로 하드웨어에 대한 기획자의 이해도가 작품 제작에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달리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부터 MSX를 만지기 시작해 고교 졸업 당시는 집안에 10여대의 컴퓨터를 지니고 있을 만큼 컴퓨터와 가까웠던 김씨지만 컴퓨터 게임 제작을 위한 컴퓨터 하드웨어의 한계를 이해하는 문제는 여전히 어렵다고 토로한다.
 

국내 최초의 3차원 그래픽이 등장하는 게임 '어디스'가 곧 발표될 예정이다.
 

그래픽, 음악, 그리고 프로그래밍

한편 게임에 환상적 시각을 제공하는 그래픽은 기획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 시작된다. 게임 그래픽의 첫번째 일은 거개의 그래픽과 마찬가지로 밑그림을 그리는 일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 밑그림,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등장인물과 배경 사건 등의 구상작업은 보통 회화와 달라 게임에 직접 사용해도 무방할 만큼 세세한 부분까지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전체 게임의 분위기와 스타일 등을 짐작하고 기획자와 프로그래머와의 협의과정을 거치기 위해서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보통 하나의 게임에 들어가는 그림은 장르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략 5백장에서 1천장 정도인데, 특히 액션 게임은 사실적인 움직임을 생명으로 하는 특성상 등장인물의 동작이 많아 제작에 손이 많이 간다. 이 그림들은 제작기간 단축을 위해 배경화면이나 등장인물 별로 분담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 2차원 그래픽을 위한 툴은 오토애니메이터와 딜럭스 페인트를, 3차원 그래픽 도구로는 강력한 모델링과 랜더링 기능을 가진 3D스튜디오를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게임화면은 하드웨어의 제약으로 인해 320X200의 해상도에 256컬러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고해상도의 화려한 그림을 사용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또 각 그림의 팔레트(색상값)가 겹쳐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물체당 16색, 많으면 32색으로 완벽한 그림을 표현해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음악은 다른 부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가한 편이다. 그만큼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얘기다. 기획자가 각 스테이지별로 구상해 놓은 것을 참조해 그에 맞는 수만큼의 곡을 만들고 추가로 들어갈 효과음은 없는지 등을 체크하면 곧 바로 작업에 들어간다. 각 장면에 소용되는 곡의 길이는 1분에서 4분 정도이며 일반적인 배경음악의 수는 10-30개가 대부분. 여기에는 제작회사의 로고음악과 게임의 타이틀 음악, 프롤로그 음악, 스테이지 음악, 에필로그 음악 등이 포함된다.

게임 프로그래밍은 사운드와 그래픽 등을 모두 포함하는 멀티미디어 기법이 일찍부터 개발된 편이다.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램 작성 전에 프로그램이 기획과 함께 라이브러리를 설계하는데, 프로그래밍 툴은 어셈블러와 C언어를 주로 사용한다. 속도를 요하는 부분은 어셈블러로 처리하고 알고리즘은 C로 작성하는 것이 보통. 하지만 게임 프로그래밍은 프로그래밍 자체에 대한 지식만으로 해낼 수는 없다. 게임에 등장하는 그래픽과 음악 등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없다면 멀티미디어가 동원된 게임 제작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 그래서 그래픽 디자이너의 작업은 항상 프로그래머와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외국 제품과 대항하기 위해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하면 시나리오 작성-일정표 작성-등장인물 디자인-배경 디자인-사운드 삽입-프로그래밍-디버깅-완성의 순으로 게임이 제작됨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게임 제작 전 영역에 걸쳐 가장 강조되는 부분은 역시 팀워크일 수밖에 없다.

이 팀은 최근 그동안 '저녁 6시부터 새벽 3시까지'이던 근무시간을 폐지했다.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는 공자 말씀처럼 뒤늦게 출발한 다른 팀의 데모버전에 큰 충격을 받은 팀장의 폭탄선언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근무시간이 따로 없다. 그저 눈 뜨면 제작에 매달리고 눈감으면 쉬는 시간이다. 지금까지 매번 새로운 작품 발표 때마다 돈벌이보다도 '최초'라는 접두어를 얻었다는 것에 더 큰 위안을 느끼던 이들의 자존심이 앞으로도 '국내에서만큼은' 계속 유지돼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모아 모두 선선히 팀장의 제안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90년 11월 결성돼 1년 6개월 후 첫 작품 폭스레인저 I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게임은 혁명적 스크롤과 함께 국내 게임중 최초로 표준 미디 효과음을 지원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어 전편을 코믹하게 해석한 박스레인저II에서는 처음으로 우리 말이 지원되도록 했고, 중간에 구성원 일부가 빠져나가 고전한 끝에 내놓은 폭스레인저 II는 최대의 용량을 자랑하고 있다.

한동안 인원문제로 내부진통을 겪느라 작품 발표가 뜸하던 SA팀은 이번 봄에 두가지 게임을 발표하느라 분주하다. 국내 처음으로 액션과 롤플레잉이 결합된 게임인 '메카탐정'과 최초의 3차원 영상이 선보이는 '어디스'가 바로 그것. 어디스는 작년에 시연회를 마친 게임으로, 환경 오염으로 형태가 변한 지구를 포기하고 달로 이주한 사람들과 지구를 통치하는 독재자와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좋은 게임의 정의는 간단하다.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으면 족하다'는 것이다. 팀장 남씨의 이야기.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만든 게임이 수십 수백배의 인원과 자금이 투여된 외국의 것과 같은 수준에서 싸운다면 이길 승산은 거의 없지요. 하지만 희망적 상황은 아니어도 싸워 이길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저역시 게임이 좋아 게임을 만들고 있지만, 한작품을 만들고 나면 만드는 동안 진이 빠져 두번 다시 그 게임은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만든 우리가 더 신이 나서 즐기는, 질리지 않는 게임을 만들 작정입니다. 이게 바로 승부수죠."

이번에 발표될 두편의 게임이 시장에서 제대로 대접받는다면 넉달째 월급이 밀려 보기조차 민망한 팀원들에게 밀린 월급이나 주었으면 하는 게 팀장의 큰 소망이다.
 

합숙하며 작품을 제작하는 이들은 여가 역시 팀원들과 함께 즐긴다. 작업실에 마련한 당구대에서 당구를 즐기고 있는 SA팀원들.
 

1994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전민조 기자
  • 이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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