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식교육 시급히 도입해야 합니다"
또다시 대학입시의 열풍이 한바탕 지나갔다. 이번 입시에선 선지원 후시험제, 주관식출제 등 제도적 개선과 함께 눈치·배짱지원이 줄어들고 적성지원현상이 두드러졌다는 등의 긍정적 결과가 얻어졌지만 고득점자의 대거탈락, 28만명에 이르는 재수생의 양산 등 부정적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양상으로 드러났다. 이에 교육계에선 대학입시의 본질적 개혁을 포함해서 교육제도와 방법에 근본적인 수정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활발하게 나오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에 깊히 뿌리 박혀있는 주입식·암기식 교육풍토는 가시적인 제도개선에 앞서 반드시 불식되어야한다는 지적의 소리가 드높다. 학습자 개개인의 잠재능력이나 소질이야 어떻든간에 입시에 출제될만한 정답을 찾고 단편적인 지식을 외우게 하는 훈련에 급급한 현실을 넘어서 학생들의 창의적인 문제해결능력을 기를 방법은 없을까.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인 한종하(韓鍾河·과학교육)박사를 만나 '토론식교육'의 의미와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에 뿌리
-토론식 교육의 뿌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읍니까.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겠지요. 그는 길거리와 공원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문제를 일문일답식의 토론을 통해 추구했읍니다. 이 대화법의 근본취지는 대화 대상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케 하여 발전을 유도한다는 거지요. 이 방식을 확대해 집단적인 대화를 가능케 한 것이 토론식 수업인 셈이지요. 미국과 같은 곳에서 20~30명의 학생이 원탁에 둘러앉아 토론을 통해 공부하는 방식이 전형적 예입니다."
-토론식 교육의 의의라고 한다면…
"예컨대 진자의 운동에 관한 수업이라고 합시다. 진자는 진폭이 어떻든간에 왕복하는 시간(주기)은 일정합니다. 이 현상을 두고 토론식 수업을 진행한다고 하면 학생들은 각자 그 원인이 중력때문이다, 아니면 지구자전탓이다 하는 식으로 의견을 말합니다. 물론 교사가 볼 때는 미숙한 생각도 많겠지만, 이것들을 고쳐줌으로써 과학개념을 확실히 심어주는 값진 성과를 얻을 수 있지요.
상대편의 비판을 받아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하는 과정은 과학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입니다. 비판과 토론을 거치지 않는 생각은 과학계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지요. 현재의 과학은 이런 과정을 통해 발전해 왔읍니다. 어떤 논문은 3년에 걸쳐 3백편가까운 반박·비판논문을 불러일으킨 경우도 있지요. 결국 토론식 교육은 학습자의 개인발전은 물론 나아가 학문발전에도 이바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박사는 과학교육을 떠받치고 나갈 두개의 바퀴가 우리나라엔 모두 구비되어 있지 않다과 지적했다. 즉 실험과 관찰을 통해 문제를 스스로 생각해 나갈 수 있는 장치와 거기서 나온 생각을 대화와 토론을 거쳐 발전시키는 제도가 마련되어있지 않다는 것. 그렇다면 토론식 교육이 이루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확성기」와「복사기」의 수업
"우선 한 학급당 학생수가 너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지요. 86년 현재 6대도시의 경우 국민학교는 한 학급당 평균 53.6명 중학교는 63.3명 일반계 고등학교의 전국평균은 57.3명입니다. 한 학급이 60명이라 친다면 토론식으로 수업을 할 때 1인당 1분씩밖에 말할 여유가 없는 형편이지요.
게다가 학교별로 교사가 담당하는 학급수는 6대도시의 경우 중학교가 31학급 일반고등학교가 34학급이나 됩니다. 제가 알아본 결과 과학교사 1명이 맡고 있는 학생이 3백명 정도인 경우는 극히 드물고, 보통은 6백명, 극단적으로는 1천명인 곳도 있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문답식 수업은 애당초 무리입니다. 칠판에 쓰고 일방적으로 설명하다 보면 수업시간이 끝나거든요. 말하자면 '확성기와 복사기'의 수업입니다.
-개인차를 무시한 획일적인 교육여건도 심각한 문제라고 하던데요.
"토론식으로 하려면 기계적으로 시간을 쪼개 써도 모자랄 지경인데, 학생들의 수준에도 차이가 큰 형편입니다. 따라서 교사와의 대화는 공부잘하는 몇몇 학생들에게 국한되고 나머지는 야단맞는 것 빼고는 침묵의 대상일뿐이지요. 이런 획일적인 교육상황에선 학생 개개인의 독창적인 사고는 격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귀찮은 대상이 되기 쉽고 틀에 맞는 평균적인 사고가 암묵적으로 강요되게 됩니다."
획일적 교육의 이면에는 과다한 학급당 학생수와 학생들 수준의 차이 뿐만 아니라 교사의 과중한 업무량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중학교의 경우 1주일에 22시간 이상을 담당하는 교사가 73%, 고등학교의 경우 19시간 이상을 담당하는 교사가 62%에 이르고 있음은 교사의 과중한 수업부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교사들에겐 정규수업외에도 보충수업과 소위 '야간 타율학습'으로 일컬어지는 자율학습 그리고 학생지도와는 무관한 각종 잡무도 많은 시간을 빼앗아간다.
●―교실은 없고 원탁만 있어
-외국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미국의 경우는 토론식 수업이 벌써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읍니다. 특히 명문학교는 전적으로 이런식으로 교육을 하지요. 브롱크스고등학교의 예입니다. 전교생 1천7백명이 모두 수학을 공부하는데 수학교사는 27명이나 되더군요. 그래도 교사들은 숫자가 모자란다고 불평입니다. 사립학교인 뉴햄프셔의 액세타고등학교의 경우엔 학교를 방문했을 때 교실을 찾아 볼 수가 없었읍니다. 토론을 위한 원탁만 있었던 거예요. 교사는 학생들에게 주제를 던져주고 몇달간 토의를 진행한 다음 보고서를 제출토록 하는 수업방식을 채택하고 있었읍니다.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국민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흑인이 주로 다니는 콥하이스쿨에 딸린 어느 국민학교에선 제가 방문했을 대 리더쉽이란 주제를 가지고 여러가지 견해를 학생들이 열심히 발표하는 수업광경이 인상적이었읍니다. 소련과 동구권에서도 결론을 끌어내는데 경직된 모습을 보이지만 토론교육은 매우 중시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일본은 우리와 비슷한 것같습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입시교육을 통한 훈련으로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지난 1월16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같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교육계에선 '일본식 고등교육이 토론식 교육을 장려하지 않아 학생들로 하여금 편협한 사고방식을 지니게 만든다'는 인식아래 미국식 교육제도의 수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산 상품들은 경쟁력이 약하나 미국식 고등교육은 쓸만한 제품'이라는 것. 그 일환으로 이미 미국의 '템플대학'이 지난 82년 일본 도쿄에 분교를 설림했으며 '조지아테르' '미시시피주립대학' 등도 일본에 분교설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주입식 교육은 비효율적
-토론식 교육이 안됨으로써 빚어지는 파급효과도 있겠지요.
"그 영향은 대단히 넓고 길게 미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토론을 잘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즉 자기 생각은 표현해도 남의 의견은 안듣는 경향이 있고, 상대방의 생각과 자기 의견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용납치 않으려 하지요. 이것은 어릴 때부터 토론의 경험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토론교육은 과학교육을 떠나서 민주주의적 훈련을 위해서도 무척 중요합니다."
-토론식 교육이 좋다고 하지만 주입식 교육에 비해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은 분명할 겁니다. 토론식 교육의 '효율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장 써먹기엔 주입식교육이 편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토론식 교육이 문제풀이 능력에서 월등히 유리합니다. 얼마전 시내의 7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학교에서 수학에 투입하는 시간을 알아보았더니 2학기에 주당 20시간 꼴이었읍니다. 그중 세학교에선 하루 4~5시간을 수학수업에 쏟아붇고 있었지요. 그렇게 6개월 동안 수학에 투입한 시간은 엄청나고, 그동안의 문제풀이 연습량도 막대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입학시험에서 정답을 맞추는 수학문제는 25%에 불과합니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교육방식입니까?
게다가 주입식 교육으로 얻은 지식은 쉽사리 잊혀집니다. 뜻도 모른채 공식만 외어 문제를 푼다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읍니까. 그런데 아무도 이런 '밑지는 장사'를 고치려 하는 사람이 없읍니다. 그러면서도 뉴턴이나 아인슈타인같은 대과학자가 나오길 바란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이지요."
-과밀한 학급이 토론식 교육에 큰 장애가 된다면, 학생수가 적어 걱정인 지방의 학교에선 비교적 잘되고 있겠군요.
"실상 그렇지가 못합니다. 교육방법은 대도시와 마찬가지이니까요. 그 이유는 우리나라 교육의 분위기와 보다 중요하게는 교사들의 자질에서 찾을 수 있읍니다. 교사를 키우는 사범대학에서 토론식으로 교육하지 않을진대 교사들에게 그런 교육을 하라고 요구하는 게 무리일지 모릅니다. 막상 교직원회의도 이런식으로 진행되지 않거든요. 교사들의 재교육문제가 심각하게 고려되야 할 겁니다."
실험실습과 토론을 통해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수업을 중시하자는 의식은 교육계에 팽배해 있다. 예컨대 교육개혁심의회는 '교육개혁종합구상'이란 보고서를 통해 2001년까지 교원당 학생수를 중학교 22명 고등학교 20명으로, 학교규모도 6대도시의 경우 중·고등학교 모두 24학급으로 줄일 것을 권고하고 있으며, 교육예산도 선진국수준엔 못미치지만 86년도 3.3%에서 2001년에 4.7%까지 끌어올릴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대로만 된다면 토론식 교육을 위한 바탕은 어느정도 갖춰지게 될 전망이다.
●―저학년부터 당장 시행할 수 있다
-당장 주어진 여건에서나마 토론식 교육을 꾸려나갈 방법은 없겠읍니까?
우선 입시의 압력이 덜한 국민학교와 중학교 1, 2학년부터 이 방식을 도입할 수 있읍니다. 1주일에 한번쯤 하는식의 부분적 도입은 큰 마찰이 없을 겁니다. 고등학교 1, 2학년에도 부분적인 도입이 가능하겠지요. 과학시간이 한 학기에 72시간이니까 이가운데 10시간은 토론식 수업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내용은 실험을 주제로 할수도 있고 또는 '공해'와 같은 별도의 주제를 채택할 수도 있겠지요.
대학의 경우엔 지금도 토론식 수업방식이 어느정도 시행되고 있지만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읍니다. 특히 사범대학의 경우가 그렇지요.
결론적으로 토론식 교육은 당장 효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과학기술의 발달이나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기르는데도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과장보도에 당황 질의·응답식 수업을 했다는 고교의 실상
올해 첫 졸업생을 내는 신설고교에서 질문응답식수업 등 새로운 교육방법을 통해 이번 대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해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부산의 충렬고와 학산여고. 충렬고는 이번 입시에서 서울대 전체 공동수석과 가톨릭대 인문계열 수석을 차지했고, 서울대에도 17명의 합격자를 냈다. 한편 학산여고는 이화여대의 전체수석과 인문계열 수석, 부산대 인문계 및 사범대의 수석을 차지했고 전기대 합격률도 다른 학교에 비해 10% 이상 높았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 일간지와 방송의 보도와는 달리 정작 이들 고교는 다른 학교와 '특별한 교육방법상의 차이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학산여고의 경우 "어느 정도 주입식 교육을 탈피, 질문응답식 수업을 시도한것은 사실이지만 교육여건상 저학년에 이런 방식을 치중했다"는 것. 충렬고의 경우는 "신설교로서 남다른 노력을 한 것일뿐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고 한다.
아뭏든 이들 학교가 질문응답식 또는 토론식 수업으로 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이번 파문을 통해 토론식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은 부각된 셈이다.
●―노벨상의 산실 교토(京都)대 왜 도쿄대를 앞지르고 있나?
일본을 대표하는 대학이라면 '도쿄'(東京)대를 꼽을 수 있지만, 과학적 업적으론 '교토'대가 단연 앞선다. 도쿄대가 단 한명도 배출하지 못한 노벨상 수상자를 '교토'대는 '유가와'(물리학상, 49년) '도모나가'(물리학상, 65년). '후쿠이'(화학상, 81년) 그리고 작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도네가와'등 4명이나 배출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두 학교의 교풍차이에서 온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도쿄대의 경우 전통과 위계질서가 강해 규격화된 성과를 내는데는 강하지만 창의적인 분야에선 약하다는 것.
한편 교토대는 개성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연구하는 분위기가 지배적. 심지어 대학원생에게는 논문주제도 주지않고 스스로 문제를 찾아 연구하도록 한다는 것. 공과대학에서도 기초연구를 중시하고 언어학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또 수학과의 경우엔 시험직후 무엇이 틀렸는가를 알아내 나중에 답을 고쳐도 점수를 준다는 것.
'모방'에서 '창조'로 넘어가려 발버둥치는 일본이 교토대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 자유롭고 개성을 존중하는 분위기에서만 창의력 있는 '괴물'이 자라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