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설명절. 설날인 지난 2월10일 새벽부터 12일 낮 사이 충남 및 전남·북해안지방의 42만5천여 가구는 느닷없이 정전사고를 당해 강추위에 떠는 설명절을 보내야 했다. 또 비닐하우스의 농작물이 얼어 죽고 축사의 닭 돼지 등 가축과 양어장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력측은 이번 사고는 바다의 소금성분이 섞인 짙은 안개(濃霧) 때문에 일어난 '염해사고'(鹽害事故)라고 밝혔다. 즉 염분을 많이 포함한 농무가 때마침 내린 눈에 섞여 진눈개비로 변해 송전탑의 애자(碍子)등 송전설비에 얼어 붙으면서 섬락현상(閃絡現狀)이 발생, 전주나 변전소의 자동차단장치가 송전을 차단해 일어났다는 것.
섬락현상이란 염분 등 전기가 잘 통하는 이물질이 전선 밑에 있는 부도체인 애자에 붙어 순간적으로 전기가 흘러 불꽃이 일어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 경우 애자가 열화현상을 일으키면서 파손돼 전기가 흐르지 않게 된다.
섬락현상으로 인한 정전사고는 국내에서는 비교적 드물게 일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지난 87년과 91년 태풍 셀마와 오키드가 상륙했을 때 동해안지역에서 발생한 일이 있으나 서해안지역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번처럼 집중적으로 광역정전사고가 발생하기는 한전사상 처음있는 일.
전문가들은 서해안지역보다 눈이 더 많은 동해안, 또는 이번에 폭설이 내린 남해안에서는 그와 같은 사고가 없었으며 특히 서해안에 눈이 많이 내려도 이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던 점을 들어 중국쪽에서 밀려 온 대기속의 중금속이 원인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한창 개발붐에 휩싸인 중국으로부터 황사현상을 방불케 하는 '중국산 눈보라'가 몰아쳐 빚어낸 사고라는 것.
그러나 이번' 중국산 눈보라'가 기상학 및 전기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돼야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해안 정전은 주목을 끄는 연구대상이다.
한편 한전기술연구소는 지난 86년 염해사고 발생우려 제기와 함께 이의 예방을 위해 전국 해안지역의 송·배전 설비를 내염(耐鹽) 자재로 교체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으나 시설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이 건의가 묵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전은 기술연구소를 통해 염무(鹽霧)로 인한 광역정전사고가 예상되는 전국 동·서·남해안 주변의 3백 33개 지역을 대상으로 송전탑과 전주의 애자에 붙어 있는 염분정도를 조사한 바 있다.
그 결과 동해안 전지역은 애자의 염분성분이 5단계 등급 중 가장 심한 A급으로 판정됐고 이번 사고지역인 서해안에서는 조사대상 1백29개 지역 애자의 1㎠마다 0.06-0.125mg 까지 검출돼 B급으로 판정됐었다. 이에 따라 기술연구소는 한전에 동해안은 물론 B급인 서해안에도 송전탑과 전주의 일반애자를 내염자재나 현수(縣垂) 애자로 전면 교체해야 한다고 건의했었다.
그러나 한전측은 동해안만 설비를 바꾸었을 뿐 비용을 이유로 나머지 지역은 교체하지 않았다. 실제로 염무농도가 서해안보다 더 심했던 동해안에서는 염무로 인한 정전피해가 없었고 서해안에서도 지난 해 일반애자를 내염애자나 현수 애자로 교체한 서산지역에서는 이번에 정전 사태가 없었다.
이번의 광역정전사고에 대해 전기 전문가들은 전력선을 아예 땅에 묻거나 염해에 견디는 특수 애자를 개발하는 일 등 대책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미구에 닥칠 중국산 '산성 눈보라' '공해 눈보라' 등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