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조류인플루엔자(AI)와 구제역. 지난해 11월 전북 고창을 시작으로 올해 1월 12일 기준 고병원성 AI 14건이 발생했다. 닭과 오리 159만 마리가 도살 처분됐다. 다행히 1월 20일 현재 구제역은 발생하지 않았다. 둘 다 바이러스가 옮기는 전염병이어서 백신은 한계가 있다. 예방이나 치료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차라리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 만큼 튼튼한 ‘슈퍼 가축’을 개발하는 건 어떨까.
AI나 구제역이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는 변이가 잦은 RNA 바이러스가 옮기는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에 비해 단순한 구조로, DNA나 RNA 중 한 가지 형태로만 유전물질을 갖고 있다. 바이러스는 사람이나 가축 등 숙주에 들어가면 세포 안에 있는 소기관과 효소를 이용해 자신의 유전물질을 증식시켜 번식한다.
AI 바이러스만 144종
DNA는 바로 발현이 되는 반면, RNA는 DNA로 변신하는 역전사 과정을 거쳐 DNA로 바뀐 뒤 발현된다. 이 과정에서 염기가 잘못 붙으면 돌연변이가 일어나는데, RNA 바이러스는 이를 교정하는 기능이 없어 변이가 특히 잦다. 이 때문에 백신이나 치료제가 잘 듣지 않는다. 약물을 개발하는 동안 변종 바이러스가 등장하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구제역 바이러스는 80가지가 넘고, AI 바이러스도 144종이나 된다.
농촌진흥청 차세대바이오그린21 동물분자유전육종사업단을 이끌고 있는 이학교 전북대 동물생명공학과 교수는 “바이러스는 숙주를 감염시켜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백신을 만들면 이 백신을 속일 수 있도록 다시 진화한다”며 “백신을 빨리 개발하면 바이러스를 빨리 진화하게끔 부추길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사람이 걸리는 인플루엔자(독감)는 매년 백신을 개발하기 때문에 오히려 바이러스의 변이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학계 보고도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인플루엔자의 경우 인수공통 전염병이기 때문에 가축을 감염시킨 바이러스가 사람에게도 감염되도록 변이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 구제역은 인수공통 전염병은 아니지만, 전파 속도가 빠른 만큼 감염된 몇 마리를 치료하는 동안 주변에 있는 수백 마리에게 퍼질 가능성이 있다.
미니항체 만들어 바이러스 증식 원천봉쇄
유전적인 측면에서 가축은 질병에 따라 저항하는 능력이 다르다. 특정 바이러스에 취약하거나 강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 개체가 가진 ‘저항 유전자’를 다른 개체에 삽입해 바이러스 저항성을 키우는 방식도 가능하다.
유전적으로 바이러스에 잘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바이러스가 세포에 붙지 못하도록 세포 표면에 있는 수용체를 없애면 된다. 바이러스가 몸속에 침투한 뒤라면 증식을 방해하거나, 바이러스의 침입을 재빨리 감지하고 방어하도록 항체를 많이 만들 수도 있다
가축의 유전체에서 어떤 유전자가 특정 질병에 대해 저항력이 있는지 알아내면 이 유전자를 활용해 ‘슈퍼 가축’으로 개량할 수 있다. 유전자가위(DNA의 특정 부위를 자르는 인공적인 효소)로 원하는 유전자를 잘라낸 뒤 수정란에 넣으면 된다.
축산업이 발달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가축의 유전체 연구는 오랫동안 활발히 이뤄졌다. 현재까지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소의 유전자는 2만6453개로 유전체 전체 크기는 2.6기가베이스페어(Gbp), 돼지의 유전자가 3만173개(2.45Gbp), 그리고 닭이 2만2117개(1.05Gbp)다.
※ 베이스페어(bp): 유전체 크기를 나타내는 염기쌍의 단위.
장길원 국립축산과학원 동물유전체과 농업연구관은 “유전자를 활용해 저항성을 가지는 가축으로 개량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며 “가령 소의 경우 ‘SP110’이라는 유전자에 특정 염기서열을 추가하면 결핵에 대해 저항성을 갖고, ‘PRNP’ 유전자를 조작하면 광우병 유발 위험을 낮춘다는 등의 연구결과가 있다”고 말했다.
존 라이얼 영국 케임브리지대 수의학과 연구원팀은 AI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때, 바이러스 유전자가 복제효소를 생산하지 못하도록 형질을 전환한 닭을 개발했다.
이 닭은 고병원성 AI 바이러스에 노출돼도 감염되지 않았다. 이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2011년 1월 14일자에 실렸다. doi:10.1126/science.1198020
이와 비슷하게 국내에서는 지난해 9월 국립축산과학원과 성균관대, 아주대 의대, 건국대 수의대 등 공동 연구팀이 8년간의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AI의 감염률을 30% 낮추는 ‘미니항체(3D8 scFv)’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자가면역질환에 걸린 생쥐에서 항체를 만드는 유전자(3D8)를 찾아낸 다음, 이를 활용해 일반 항체의 6분의 1 정도인 미니항체를 만들었다. 일반 항체는 단백질 항원을 찾아서 방어하지만, 미니항체는 항원이 단백질로 발현되기 전 단계인 핵산을 인지해 분해한다. 항원 형성 자체를 막는 것이다. 실험 결과 미니항체를 가진 닭은 AI 바이러스가 침입하더라도 미니항체가 바이러스의 핵산을 잘라버려 증식을 방해했다. doi:10.1038/s41598-017-05270-8
최유림 농진청 축산생명환경부장은 “미니항체 단백질을 항바이러스 소재 물질로 활용해 AI를 포함한 가축의 바이러스성 질병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만 닭을 비롯한 가금류의 유전체에서 AI에 저항성을 가진 유전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변승준 국립축산과학원 동물바이오공학과 농업연구사는 “가금류 중에서 AI에 저항력을 가진 종이 있는지, 어떤 유전자가 이런 저항성을 갖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밝혀진 내용이 없다”며 “외래 유전자를 도입했을 때 AI 발병률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는 있다”고 밝혔다.
소나 돼지의 경우에도 아직까지 구제역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 유전자를 찾아 개량한 사례는 없다. 다만 영국 에든버러대 수의학과 앨런 아치바드 교수와 크리스틴 버카드 박사 등 연구팀이 지난해 2월 바이러스성 질환인 돼지 생식기 호흡기 증후군(PRRS)에 취약한 유전자(CD163)를 찾아내 이를 변형한 DNA를 수정란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PRRS에 저항력을 가진 돼지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doi:10.1371/journal.ppat.1006206
또 소를 위협하는 광우병의 경우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동물생명공학연구소 연구팀이 2016년 11월 프리온 유전자(PRNP)를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편집해 광우병 감염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doi:10.1016/j.theriogenology.2016.06.010
『가축의 유전체에서 어떤 유전자가 특정 질병에
대해 저항하는지 알면, 이 유전자를 활용해
‘슈퍼 가축’으로 개량할 수 있다』
유전자 마커 이용 분자육종에 주력
유전자를 활용한 ‘슈퍼 가축’이 상용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장 농업연구관은 “유전 질환은 특정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했는지에 따라 발병 가능성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지만, 바이러스성 질환은 예측이 어렵다”며 “바이러스 저항 유전자가 있다고 해도 환경에 따라 감염률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특정 전염병에 관여하는 바이러스에 저항성을 가진 유전자 그룹을 모두 밝혀내는 일도 쉽지 않다.
유전자 조작으로 저항력을 가진 가축을 만들 경우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 교수는 “유전자 조작이나 편집이 오히려 더 독한 바이러스로의 진화를 부추길 위험이 있다”며 “AI 저항 유전자를 넣은 형질전환 닭이 AI에는 감염되지 않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질환에 취약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현재 국내에서는 좋은 유전자를 후대에 전해줄 수 있는 전통 육종 방법도 연구 중이다. 유전체에 원하는 유전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유전자 마커를 활용해 특정 유전자를 가진 가축만 선별하는 분자육종 기술이다. 지금까지 축산 분야에서 유전자 마커를 활용한 분자육종은 주로 맛 좋고 영양 높은 고기를 생산하는 데 사용됐다.
국립축산과학원은 한우의 육량을 늘리는 ‘마이오스타틴’ 유전자와, 육질을 부드럽게 만드는 ‘칼파인-칼파스타틴(CAPN1-CAST)’ 유전자를 찾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구제역이나 AI에 대해 직접적으로 저항성을 갖는 유전자는 찾지 못했다. 변 농업연구사는 “장기적으로는 AI 등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 유전자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