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봄과 가을에 열리는 컴덱스쇼는 세계 최대 규모의 컴퓨터 전시회다. 특히 가을 컴텍스쇼는 규모 면에서 뿐만아니라 다가올 새해에 어떤 기술의 컴퓨터가 등장할 것인가를 예측하게 하는, 전시회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태경제협의회(APEC)가 미국 태평양 연안의 수많은 도시 가운데 하필 시애틀에서 열리게 된 것은 우연치곤 의미심장한 알이다. 미국이 '태평양국가'임을 선언하면서 아태지역의 협력과 유대를 힘주어 강조했던 그 곳, 시애틀은 미국 산업경쟁력의 숨은 본거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미국 최대의 항공기 제조업체인 보잉사와 세계적인 소프트웨어업체 마이크로소프트의 본사가 있다. 미국이 자랑하는 항공우주산업과 컴퓨터산업의 총아가 바로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클린턴은 한눈으로 미국 하이테크산업의 경쟁력을 확인하고 다른 한눈으론 태평양의 광활한 시장을 내다본 것이 아닐까.
세기말을 불과 6년 남짓 앞둔 오늘의 세계는 소리없이 전운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경제전쟁, 기술전쟁, 기업전쟁이다. 그중에서도 컴퓨터, 통신기술은 21세기의 주도권을 결정짓는 신형 핵탄두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스페인의 제국주의자들이 성경책과 대포를 앞세워 영토확장을 이루었다면 향후 세계시장은 컴퓨터와 통신을 앞세운 나라가 장악할 게 틀림없다.
15년 연륜의 컴덱스쇼 열기
지난해 11월 15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가스에선 세계최대의 컴퓨터 제전 '컴덱스 93'이 열렸다. 닷새동안 열린 이번 쇼에는 세계 1백여개국가에서 2천2백개업체가 참가, 20여만점의 각종 제품이 출품됐으며 관람객만도 17만명을 넘어서는 사상최대의 성황을 이루었다. 이번으로 15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컴덱스쇼는 전세계 컴퓨터업계가 한자리에 모여 그 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의 판도변화를 점치는 중요한 만남으로, 통계숫자만으론 그 열기를 짐작하기 어렵다.
일단 라스베이가스에 도착하면 잠자는 일부터 고생은 시작된다. 시내 모든 숙박시설의 방이 모조리 동나 미처 호텔예약을 못하고 온 사람은 십중팔구 로비에서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다. 아니면 차를 타고 변두리로 한참 빠져나와 허름한 모텔에, 그것도 아주 비싼 돈을 주고서야 묵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참관단을 인솔하고온 여행사 직원의 말을 빌자면, 컴덱스 기간중 이곳 호텔객실의 대부분을 브로커들이 일괄 예약해놓고 여행사들에게 넘기는데 서너단계를 거치면서 프리미엄이 몇 배씩 뛰어오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호텔 교환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한국투숙객들의 이름대신 낯선 중국사람들 명의로 모두 예약이 돼 있었다. 놀랍게도 앞으로 5년 이후까지 방이 이렇게 예약돼 있다고 한다.
컴덱스의 전시장은 처음 간 사람들에게는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다. 우리나라 KOEX(한국종합전시장)크기의 대여섯배는 족히 됨직한 라스베이가스 컨벤션센터를 비롯, 시내 4개호텔 전시장에서 동시 개최된다. 사전에 참관할 업체를 점찍어놓지 않으면 기간중에 모든 전시장을 꼼꼼하게 돌아보기는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다.
'대화'와 '이동'을 위한 기술
올해 컴덱스쇼를 관통하는 주제는 '대화(Interactive)와 이동(Mobile)의 시대를 준비하는 정보기술'이다. 일방적인 정보전달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양방향통신과 휴대형정보시스템이 봇물터지듯 쏟아져나왔다. 일단 대화형 시스템을 지원하기 위한 고성능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새로운 운영체제가 컴퓨터업계의 중대한 판도변화를 예고했다. 이미 올초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인텔의 '펜티엄'과 IBM-모토롤라-애플의 공동작품 '파워PC', 디지털이큅먼트사의 '알파'가 6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차세대운영체제 '윈도즈NT'와 IBM의 'OS/2 2.1'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10년 아성을 자랑하는 인텔은 내년에 창사 이래 최대의 고비를 맞게 된다.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슈퍼 스팍'칩과 DEC의 '알파', IBM의 '파워PC' 등 '펜티엄'의 성능을 앞지르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본격 출하될 뿐 아니라 AMD와 사이릭스 등 호환 칩메이커도 일전을 불사할 태세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세계 시장의 83%를 차지해 왔던 인텔이 내년에 어느 선까지 후퇴할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파워PC'는 PC업계의 선두를 달리는 IBM과 애플이 적극적인 확산 의지를 보이고 있는데다 대만의 개미군단까지 포섭,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부상하고 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비롯한 하드웨어시장이 혼전을 거듭하고 있는 반면 소프트웨어쪽에서는 한 회사의 독주가 돋보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전시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IBM의 대를 잇는 컴퓨터업계의 왕자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컴덱스쇼의 단골 기조연설자인 이 회사 빌 게이츠회장은 특유의 유머를 섞어가며 향후 기업의 경쟁력은 '통합사무환경'을 어떻게 구축하느냐에 달렸다고 역설했다. 올 컴덱스쇼에서 응용소프트웨어의 핵심은 워드프로세서 스프레드시트 데이터베이스 개인정보관리를 한데 묶어놓은 '통합사무용 패키지'. 워드퍼펙트나 로터스와 같은 전문업체들도 일제히 통합패키지를 선보였다.
한편 '붕괴하는 제국'의 이미지를 벗고 재건을 도모하려는 IBM의 안간힘은 한마디로 눈물겨웠다. 이른바 'M웨이브 전략'을 앞세워 40여개의 멀티미디어관련 업체와 공동전선을 구축, 새바람을 일으키느라 분주했으며 예전엔 그토록 깐깐했던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을 대대적으로 권장하는 변모된 양상을 보였다. 지나가는 관람객의 손에 배지를 쥐어주면서 '파워PC'를 한번 보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권하는 IBM 직원들을 바라보면서 이 동네의 격세지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도색 CD-ROM의 당당한 주장
이번 컴덱스쇼에서 단연 주목을 끈 곳은 멀티미디어전시관이었다. 엄청난 저장능력을 자랑하는 대화형미디어인 CD-ROM이 이제 완전히 뿌리를 내려 대부분의 저장매체로 활용되고 있었으며 프로그램의 질적수준과 양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중에서 도색 CD-ROM을 들고나온 일부 업체들이 당당하게 기자회견을 청해 '새로운 성문화'를 주창하고 나선 것도 이채로웠다. 이 제품을 만드느라 그동안 고생한 이력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들은 "억압된 성의 욕구를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해소함으로써 사회적 생산성향상에 이바지한다"는 거창한(?) 주장을 펼쳤다. 어쨌든 멀티미디어의 대중화과정에서 도색물은 필요악일 수도 있다는 시각이 이 곳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이밖에도 PC를 통한 화상회의시스템이 다수 선보였으며 음성인식을 통한 교육용 프로그램, 장애인을 위한 멀티미디어 지원시스템도 제법 눈에 띄었다.
'이동의 시대'를 실감케하는 제품으로는 애플이 자랑하는 휴대용 개인정보시스템인 '뉴턴'과 AT&T의 '퍼스널 커뮤니케이터'를 꼽을 수 있다. 이 제품들은 손바닥만한 액정판에 전자펜으로 기록하면 자동으로 기억해서 필요할 때 꺼내볼 수 있고 원하는 사람에게 전자메일을 보낼 수도 있는, 컴퓨터와 통신겸용시스템이다. 벌써 일부 성급하고 호기심많은 기자들이나 비지니스맨들은 뉴턴을 들고다니며 인터뷰에 적절히 활용하고 있었다.
이번 컴덱스쇼에 참가한 40여개의 한국업체들은 주로 샌즈호텔 컨벤션센터에 모여 있었다. 삼성전자와 금성사, 대우통신 등이 대규모부스를 마련했고 다우기술 컴픽스미디어 등 유망중소업체들이 공동전시관을 열었다. 삼성과 금성은 고해상도 모니터와 평판 액정 디스플레이를 전시해 바이어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정작 설명하는 사람들의 성의부족과 언어장애로 모처럼 찾아든 손님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돌아서는 등 국제적인 쇼에 임하는 대기업다운 자세에 구멍이 발견되기도 했다. 오히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들의 태도가 한층 진지하고 열의가 있어 보기좋았으나 초라한 부스시설이 품격을 떨어뜨리는 듯해 못내 아쉬움을 남겼다.
컴덱스쇼를 지켜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이 있다면 미국정부의 적극적인 지원태도였다. 바이어들과 전시업체의 상담을 지원하는 국제비즈니스센터에는 미 상무부에서 파견된 23명의 공무원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이들은 쇼가 있기 전에 이미 각국 대사관의 담당자를 통해 유력한 현지 고객업체들을 선정, 충분한 사전정보를 제공하고 컴덱스쇼 현장에선 무역거래에 필요한 각종 자문을 실시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다.
이 센터를 관리하는 상무성관리 빌 크로포드씨는 "한국의 업체들에게 컴덱스에 대해 자세히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관련 자료를 수북이 안겨주기도 했다. 민간업체가 주최하는 쇼에 대거 파견나와 자국업체의 이익을 위해 성심껏 봉사하는 공직자들이 대견해 보였다. 그러나 한쪽으로는 어쩌다 국내에서 이런 류의 행사를 주최할 때 후원을 부탁할라치면 이런저런 핑계로 도리질을 해대는 우리나라 관리들의 모습이 떠올라 우울하기도 했다.
이번 쇼에서도 중소기업 공동부스 한모퉁이에는 한국을 알리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담당직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시장과 산업현황을 소개하는 흔한 팸플릿 한장 놓여있질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된 필리핀 인디아 전시관에는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공무원들이 곧은 자세로 서서 바이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개미군단을 자랑하는 대만업체들은 숫적으로도 미국업체 다음으로 많이 나온데다 제품의 질이나 상담태도가 모두 국제수준에 손색이 없는 면모를 과시했다.
컴덱스 93을 둘러본 후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미국 일본의 앞선 기술과 탁월한 경쟁력에 주눅들기도 했지만 그보다 있는 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우리 모습이 더 한심하다"고 혀를 찼다.
컴덱스는 국민학교 운동회처럼 참가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 기술수준과 제품의 경쟁력이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는데 가치를 두어야 한다. 말로만 국제화를 떠들면서 정작 국제무대에선 촌뜨기를 면치 못하는 이율배반을 이제는 극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