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나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체계는 그들 혼자서가 아니라 이미 수천년 전부터 여러 학자의 주장이 수없이 엎치락 뒤치락하던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에서 학문발달 과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여러분은 지금 기차 안에 있다. 여러분이 탄 기차의 운동을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구는 멀리 있는 가로수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기차가 달린다고 말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옆에 같이 달리는 기차를 보고 정지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지구라는 열차에 탄 우리는 어떻게 지구의 운동을 알았는가? 우리들은 이미 지구와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태양은 다시 우리 은하의 중심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주관은 불과 4백여년 전만 해도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지구와 우주의 실체를 밝히려는 노력은 인류가 지상에 탄생하면서부터 시작됐을 것이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중심체계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설명도 이미 수천년 전부터 우주에 대한 깊은 사고와 천문관측에 집착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실체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우주관의 변천
우주관은 천문 관측 결과를 토대로 성립됐는데, 천문 관측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정밀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일찍이 기원 전 2000년경에 이미 금성이 8년 동안에 5회는 태양과 같은 위치로 온다는 것을 알았으며, 기원 전 1000년 경부터는 비교적 관측기록이 정밀해졌다. 이러한 관측 기록이 조직적으로 기록 보존돼 있는 것도 있다(그림1).
고대 바빌로니아인과 이집트인은 우주의 첫째 구성 요소는 물 공기 흙이라고 생각했다. 밀레토스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610-545 BC)는 여기에 불을 덧붙여 생각했다.
우주는 이들 네 원소가 실체에서 분리된 후 흙 물 공기 불 순서로 층을 만들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불은 물을 증발시켜 건조한 대지를 만들고 수증기는 위로 올라가 안개의 원통이 돼 불을 둘러쌌다. 또한 빛을 내는 천체들은 통에 있는 구멍이며 이 구멍에서 우리들은 내부의 불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태양을 안에 넣은 통의 지름은 땅덩이의 27배이며 달이 들어 있는 통의 지름은 18배다. 지구 자체는 원주 모양을 하고 있고 그 높이는 폭의 약 3배다. 하늘은 지구의 주위에 나무껍질처럼 둘러싸여 있으며 지구는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모든 천체는 등거리에 있으므로 균형이 잡혀 있다고 생각했다(그림2). 유치하나 의미깊은 우주관이 아닌가?
밀레토스의 철학자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46 BC)는 제1의 우주의 실체로 안개 또는 공기를 들고 그것에서 다른 원소를 이끌어냈다. 그는 안개가 희박해지면 불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입을 크게 벌려 공기를 내 뱉으면 공기는 따뜻하지만 입을 오므리고 내 뱉으면 차가운 것은 이런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개를 농축해 가면 처음에는 물이 되고 이어 흙이 된다. 우주의 여러 원소는 안개가 농축되거나 희박해져서 형성된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아낙시메네스의 제자인 아낙시고라스(Anaxigoras, 499-428 BC)는 이오니아계의 철학자로 지구는 원주형이며 태양은 빨갛게 달아오른 돌덩이고 그 크기도 그리스에 비해 그다지 큰 편이 아니라 생각했으며, 달 또는 행성도 지구와 비슷하며 달에는 산도 있고 주민도 있다고 주장했다. 달이 태양빛을 받아 반으로 반짝이고 있으며 지상에 비친 달 그림자와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로써 일식과 월식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후 피타고라스(Pythagoras, 582-500 BC)는 우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고 생각했다. 즉, 차례로 열거하면 대지와 월면 아래의 우라노스, 다음은 천구들의 코스모스, 그리고 여러 신의 거주지인 올림푸스다. 지구와 우주 전체는 구형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은 기하학적으로 가장 완전한 모양은 구형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 속의 갖가지 천체는 똑같은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운동은 천체의 지위가 신성할수록 더욱 더 느리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천체의 운동은 한결같이 원운동이라는 그의 생각은 근세에까지 영향을 미친 우주의 원리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지구는 구형이며 태양 달 등 여러 천체는 우주의 중심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제각기 독립적으로 운동하고 그와 동시에 24시간마다 반대방향으로 1회전한다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이러한 가정은 지구 주위에 있는 천체의 겉보기 일주 운동을 잘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을 회전한다면 마땅히 발견돼야 할 시차(그림 3)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피라고라스 학파의 최초의 우주관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차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구의 날마다의 궤도가 이제까지 생각해 오던 것과 달리 훨씬 작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시사에 따라 피타고라스 학파인 히케타스와 에크판토스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고 날마다 지축의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견해는 별의 시차가 왜 없느냐 하는 설명도 가능할 뿐아니라 피타고라스 학파의 우주관도 해치지 않았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자연스레 우주의 중심이 지구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에우독수스(Eudoxus, 408-355 BC)는 수량적인 천문학과 사변적인 우주론을 통일, 바빌로니아인에 의해 관측돼온 천체들의 주기적인 현상을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구형의 껍질들을 가정해 설명했다. 이와 같은 천구의 조합으로 천체의 복잡한 주기적인 운동이 잘 설명 됐다. 어떤 구는 하늘의 겉보기 운동을 설명했고 회전주기가 서로 다른 구를 가정해 행성의 운동에 관한 주기적 현상을 설명했다.
그는 27개의 천구를 사용해 행성과 천체의 운동의 주기성을 설명했다. 관측이 불어나 주기적 현상이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이 체계는 더욱 확장됐다. 에우독수스의 제자인 칼리푸스(Callipus, 325-? BC)는 34개의 천구를 사용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22개의 천구를 덧붙였다.
그러나 동심천구설은 모든 천체는 언제나 같은 거리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의미하나 관측적인 사실은 이를 부정했다. 즉, 금성이나 화성의 밝기가 변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관측된 사실이며 이것은 행성이 지구에 대해 상대적으로 멀어지기도, 가까이 다가오기도 하는 운동을 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그림 4).
또한 일식은 때에 따라 개기식과 금환식으로 된다는 것도 동심천구설을 부정하는 관측결과라고 소시게네스는 지적했다(그림 5).
헤라클레이데스(Heracleides, 373-? BC)는 수성과 금성의 두 행성은 태양에서 멀리 떨어지는 일이 없고 태양 주위를 원궤도로 돌고 있으므로 이와 같은 밝기의 변화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한편 피타고라스학파의 주장을 지지해 지구는 지축 주위를 자전해 겉보기 운동이 일어 난다고 주장했으나 당시에는 그의 생각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없었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는 우주의 구조는 에우독수스가 생각하는 기하학적인 천구가 아니라 물체라고 생각했다. 즉 별이 붙어있다고 생각한 항성천구는 우주의 가장 바깥에 위치해 날마다 행성들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함으로써 그 안쪽의 천구에 운동을 전해 회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즉, 바깥쪽의 천체인 토성은 항성천의 힘을 이기지 못해 가장 긴 회전 주기를 가지며 안쪽의 천체인 달은 가장 빠른 회전 주기를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천체는 언제나 정해진 천구 안에 있지만 지상의 물체는 끊임없이 그 본연의 장소로 돌아가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즉, 흙과 물의 2원소는 무게가 있으므로 우주의 중심을 향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공기와 불은 가벼우므로 본연의 장소인 공중으로 상승하려는 경향이 있다. 불은 공기보다 높은 본래의 장소를 지니고 있으므로 공기보다 신성한 것이며 공기는 물보다, 물은 흙보다 신성하다. 따라서 천체는 지상의 어느 것보다 고귀하다고 믿었다. 달은 지상에서 가까우므로 덜 신성해 얼룩이 있으며 지상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완전성이 더해간다는 것이다.
아리스타르쿠스의 태양중심설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us, 310-230 BC)는 지구는 날마다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태양의 주위를 원궤도를 그리면서 1년에 1회 운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태양과 항성은 정지해 있고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원궤도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 기록은 보존돼 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잘 알려졌던 듯하다.
그의 저작 '태양과 달의 크기'에서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상대적 거리를 재는 최초의 시도가 그려져 있다. 그는 달의 위상이 정확히 반달일 때는 태양과 달과 지구가 직각 삼각형을 만든다고 가정하고 반달일 때 그 각도를 측정, 87도를 얻고 태양까지의 거리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의 19배라고 계산했다. 그러나 실제는 이보다 커서 3백80배이지만 이것은 당시 관측의 정밀도에서 비롯된 오차여서 원리적으로는 틀리지 않다(그림 6).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크기 측정
종래 천체의 크기나 거리 등은 지구 크기의 배수로 흔히 표현됐으므로 태양과 달의 실제 크기를 알기 위해서는 지구의 실제 크기를 알 필요가 있었다. 이런 측정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장이었던 에라토스테네스(Erattosthenes, 192-84 BC)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 됐다. 그는 하지날 시에네에서는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태양광선이 수직선에서 7도 기울어지는 것을 측정, 지구의 원주는 25만 스타디아(4만6천㎞에 해당)가 된다고 주장했다(그림7).
우주의 실체를 벗기려는 아리스타르쿠스의 태양중심설 등의 과학적 접근 방식은, 등급이 낮은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으며 보다 완전한 천체는 한층 더 순수한 상부에서 한결같은 원운동을 반복한다는 관념적인 견해에 묻혀 근세의 코페르니쿠스에 이르기까지 빛을 발하지 못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
고대의 우주체계를 집대성한 프톨레마이오스(Ptdemaios, AD 2세기)의 '알마게스트'가 12세기경 발굴 돼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이의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게 됐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은 천문현상을 설명하는 데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천문학자들은 제멋대로 이론을 덧붙여 지구 중심설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됐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과 중세의 신학이 결합됨으로써 중세 전체를 지배하게 된 우주관이었다. 이 우주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지구는 중심에 있으며 달 태양 행성 등의 모든 천체는 완전한 원운동을 한다는 것이다(그림 8,9).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체계
그러나 천문관측이 정밀해지면서 (그림 10,11)과 같이 화성이나 목성 또는 토성이 서에서 동으로 나아가다가(순행) 갑자기 서는가하면(유) 다시 동에서 서로 후퇴하는(역행)등의 운동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폴란드의 북부 토론에서 태어난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에 근거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를 부정하고 1515년경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구조와 비슷한 태양중심 체계를 고안해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란 책을 발간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이 체계는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수학적 방법을 사용했으며 당시에도 여전히 연주시차가 관측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티코브라헤, 갈릴레이, 케플러로 이어지는 수많은 관측적인 증거의 제공으로 우주의 중심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바꾸어 놓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인 생각은 인정받게 된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주장하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를 너무 존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지구중심체계로는 행성들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매우 복잡한 행성구를 도입해야 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이의 완전한 이해는 물론 그 속에 숨은 일련의 간단한 원리를 발견해 태양중심설을 고안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로는 내행성이나 외행성의 운동을 그 자체로서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체계나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체계는 그들 혼자서가 아니라 이미 수천년 전부터 여러 학자의 주장이 수없이 엎치락 뒤치락하던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에서 학문 발달과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에 관한 혁명적인 생각은 바로 고대의 우주관을 잘 이해함으로써 고안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