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은 이제 자기증식이 가능한 인공생명을 탄생시키는 연구가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21세기 중반에는 창발적 행동이 가능한 '생명기계'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생물처럼 새끼를 낳고 진화하는 기계를 만들수는 없는가. 이 질문에 해답을 내놓은 사람은 폰 노이만(1903~1957)이다. 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대학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20세기의 기장 탁월한 수학자의 반열에 오르는 학문적 명성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원자탄 등 병기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세계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인 에니악(ENIAC)프로젝트의 기술자문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말년을 컴퓨터 과학의 이론 정립에 바쳤다.
폰 노이만은 1945년 프로그램 내장식(sotred program)컴퓨터를 제안했다. 오늘날 컴퓨터 설계의 기초를 확립한 혁명적 개념이다. 하나의 제어장치를 사용하며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처리하는 직렬컴퓨터의 구조를 '폰 노이만 구조'라고 부르게 된 까닭이다. 따라서 여러개의 제어장치를 사용하여 복수의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는 병렬컴퓨터를 '비(非) 폰 노이만 구조'라고 이른다.
자식을 낳는 기계
그러나 이러한 획일적인 용어 사용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폰 노이만이 소개한 세포자동자(cellular automata)이론은 따지고 보면 이른바 비 폰 노이만 구조의 선구적인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세포 자동자는 1948년에 발표된 자기증식(self-reproduction) 자동자이론을 진일보시킨 것이다. 자동자(오토메타)는 본래 생물의 행동을 흉내내는 자동기계를 뜻하였으나 컴퓨터의 출현으로 인간의 두뇌처럼 정보를 처리하는 기계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동자의 개념을 더욱 확장시킨 것이 폰 노이만의 이론이다. 그는 계산능력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복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계, 즉 자기증식 자동자가 설계 가능함을 주장하였다.
폰 노이만의 자동자 이론을 요약하면, 자기 증식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기계의 기술(description) 안에 포함된 정보가 반드시 두 종류의 상이한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한 번은 자식기계를 생산할 때 부모기계가 실행하는 명령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자식 기계에게 부모기계의 기술을 전달하기 위하여 복제할 때 사용된다.
이것은 분자생물학에서 유전이 성립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과 흡사하다. 디옥시리보핵산(DNA)의 유전정보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두번 사용되기 때문이다. 한번은 유전정보에 의하여 단백질이 합성되는 과정에서 사용되고, 또 한번은 유전정보를 아비로부터 자식에게 전승하기 위하여 복제할 때 사용된다.
폰 노이만의 이론은 비록 상상력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로부터 5년 뒤에 DNA분자의 이중 나선구조가 발견되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실로 경이로운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생명 게임의 선풍적 인기
증식기능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는 본질적 특성의 하나이다. 이러한 증식기능을 기계로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임에 따라 생명의 논리(logic)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생물체를 구성하는 물질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생물체의 논리적 구조에 입각하여 생명체의 행동을 연구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폰 노이만은 자신의 자동자 이론에 만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증식 과정의 논리가 그 과정의 물질로부터 보다 완벽하게 분리되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 이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3년 뒤에는 세포자동자라고 명명된 새로운 자기증식 모델을 내 놓았다. 바둑판처럼 생긴 격자(格子) 모양의 평면을 사용하는 이 모델에서는 자기증식하는 유기체가 네모난 칸의 집단으로 구성된다.
이 모델을 세포자동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네모난 칸이 세포처럼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기본단위이고, 또한 세포가 분열을 거듭하면서 그 수효를 증식시키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폰 노이만은 세포자동자의 연구를 체계화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논문은 동료에 의해 마무리되어 1966년 폰 노이만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 소개된 폰 노이만의 세포자동자에 대한 수학적 증명은 무려 1백쪽을 넘고 있다.
세포자동자 이론이 전세계 과학자들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1970년 마틴 가드너가 미국의 과학월간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고정칼럼에 '생명'(Life)을 소개한 뒤부터였다. '생명'은 영국의 수학자인 존 콘웨이가 1968년에 발명한 세포자동자다. 네모난 칸으로 구성된 격자모양의 판 위에서 혼자하는 일종의 게임이다. 각 칸의 운명이 아주 간단한 규칙에 따라 생존 죽음 탄생의 세 가지로 결정되기 때문에 게임이 진행되면서 매우 다양한 형태가 나타난다.
예컨대 한송이 꽃의 생명이 순환하는 과정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경우(그림1) 씨앗이 자라서 꽃이 피고 그러다가 시들어서 작은 씨앗을 남겨놓고 죽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섯개의 칸으로 구성된 어떤 구조의 경우에는(그림2) 시종일관 그 형태를 유지하면서 마치 글라이더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와 같이 단순한 규칙에 의하여 생명체처럼 복잡한 행동과 구조가 생성될 수 있음을 멋드러지게 보여줌에 따라 세포자동자는 70년대 초반에 젊은 컴퓨터 과학자들의 대화에 곧잘 등장하는 단골 상투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랭론과 인공생명
그러나 컴퓨터를 이용하여 생명체의 행동을 연구하려는 움직임은 곧바로 그 열기가 냉각되어 쇠퇴하고 말았다. 컴퓨터 연구인력이 대부분 실질적인 응용분야쪽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컴퓨터에 기초한 생명의 연구는 서로 격리된 채, 고집스럽게 탐구를 계속해온 극소수의 학자들에 의하여 그 명맥이 유지되었을 따름이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다. 생명체의 행동을 컴퓨터로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분야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어온 연구를 하나로 통합시킨 새로운 학문이 태동하였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이다. 인공생명이란 용어를 만들어내고 1987년 9월에 이 학문의 탄생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세미나를 주관한 장본인은 크리스토퍼 랭톤이다. 미국 태생(1948년)인 랭톤은 80년대 중반까지 과학기술계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인사였다.
랭톤은 단순한 논리적 규칙에 의해서 세포자동자가 보여주는 행동, 즉 자기증식기능을 이용하면 생명을 컴퓨터 안에서 인공적으로 합성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생애를 건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컴퓨터를 사용하여 자기증식하는 고리(loop)를 만들어냈다. 산호초처럼 생긴 이 고리는 큐자(Q)자 모양의 생명체가 증식을 거듭하여 생성된 수많은 Q자가 서로 연결된 세포자동자다.
폰 노이만이 생명체처럼 증식하는 기계의 설계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증명했지만 그것을 컴퓨터 화면 위에서 처음으로 실현해보인 사람은 랭톤이기 때문에, 폰 노이만이 인공생명의 아버지라면 랭톤은 그 산파역이라는 비유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생명은 창발적 행동
랭톤에 따르면 인공생명은 '생명체의 특성을 나타내는 행동을 보여주는 인공물의 연구' 라고 정의된다. 말하자면 살아 있는 것 같은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인공물의 개발을 겨냥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기계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방법의 연구가 기장 중요한 과제다.
생물학에서는 생명체를 하나의 생화학적 기계로 본다. 그러나 인공생명에서는 생명체를 단순한 기계가 여러개 모여서 구성된 집합체로 간주한다. 가령 단백질이나 DNA분자는 살아 있지 않지만 그들의 집합체인 유기체는 살아 있다. 따라서 인공생명에서는 생명을 이러한 구성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한 복잡한 집합체로부터 출현하게 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생물체를 구성하는 물질 그 자체의 특성으로 보는 대신에 그 물질을 적절한 방식으로 조직했을 때 물질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창발(創發)하는 특성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요컨대 생명은 수많은 무생물 분자가 집합된 조직으로부터 솟아나는 창발적 행동(emergent behavior)이라는 의미다.
창발적 행동은 인공생명의 기본이 되는 핵심개념이다. 따라서 인공생명에서는 구성요소의 상호작용이 생명체의 행동을 보여줄 수 있도록 구성요소를 조직할 수 있다면 그 기계가 생명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를테면 구성분자를 적절한 방법으로 조직하여 완벽한 박테리아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인공박테리아는 틀림없이 자연의 박테리아처럼 살아있는 것 같은 행동을 보여주게 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므로 인공생명에서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요소의 행동을 이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구성요소 사이의 상호작용이 본질적으로 비선형(非線型)이기 때문에 선형계에서처럼 구성요소의 행동을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선형계는 전체의 행동이 구성요소의 행동의 총계와 일치하기 때문에 구성요소를 분석하여 이것을 짜맞추면 전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비선형계는 전체의 행동이 구성 요소의 행동의 총계를 항상 상회하기 때문에 분석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체의 행동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인공생명에서는 구성요소를 조직하여 전체의 행동을 합성해내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여기서 인공생명과 생물학이 생명을 연구하는 접근방법이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생물학은 하향식(top-down)이지만 인공생명은 상향식(bottom-up)이다. 생물학은 개체 기관조직 세포의 순서로 계층을 내려가면서 구성 물질을 분석한다. 그러나 인공생명은 비선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구성요소를 적절한 방식으로 조직하면서 집합체의 행동을 합성한다. 말하자면 생물학은 환원주의(reductionism)에 의존하지만 인공생명은 전일주의(holism)에 입각하여 생명의 이해에 접근하는 셈이다.
인공생명의 다양한 접근 방법
인공생명은 풋나기 과학임과 동시에 학제간 연구이다. 따라서 연구 영역 역시 매우 광범위하며 접근방법 또한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은 컴퓨터를 도구로 사용하여 생명의 창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요한 관심분야는 △자기복제 프로그램 △진화하는 소프트웨어 △생명의 기원 △컴퓨터 그래픽 △로봇공학의 다섯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자기복제 프로그램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컴퓨터 바이러스다. 컴퓨터 사용자를 괴롭히는 골칫덩어리임에는 틀림없지만 컴퓨터 바이러스가 생명체의 주요한 특성을 대부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인공생명 연구에 유용하게 사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생물학적 바이러스가 질병을 일으키지만 의약품 개발에 사용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생물처럼 진화하는 소프트웨어로는 유전 알고리즘(genetic algorithm)과 띠에라(Tierra)가 유명하다. 미시간 대학의 존 홀란드교수가 자연도태를 모의(simulation)하여 만든 유전 알고리즘은 게임이론에서부터 복잡한 기계 설계에 이르기까지 그 실용성이 입증된 문제해결 프로그램이다. 한편 델라웨어 대학의 토마스 레이가 생태계를 모의하여 개발한 띠에라는 기생생물이 숙주와 경쟁하면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생태학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수십억년에 걸쳐 진행되는 생물의 진화과정을 짧은 시간에 컴퓨터 화면으로 볼 수 있게 됨에 따라 띠에라는 인공생명연구의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띠에라는 스페인어로서 '지구'를 의미한다.
또한 인공생명은 생명체의 자기증식 과정을 컴퓨터로 보여주기 때문에 생명의 기원에 관한 수수께끼를 푸는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인공생명은 생물체와 거의 흡사한 행동을 컴퓨터 화면으로 보여줄 수 있으므로 컴퓨터 그래픽에 활용되고 있다. 캐나다의 프로신키위츠 교수가 식물이 성장하는 모습을 모의하여 컴퓨터 그래픽으로 생생하게 보여준 소프트웨어가 단연 돋보인다.
인공생명의 접근방법에 의하여 가장 괄목할 만한 결과를 내놓은 분야는 로봇공학이다. 매사추세츠 공대의 로드니 브룩스는 종래의 인공지능 기법과는 달리 인공생명의 상향식 방법으로 이동로봇의 개발에 접근하여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가 개발한 곤충로봇은 텔레비전 화면의 청소에서부터 화성 탐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될 것 같다 인공생명은 아직 생명현상을 모의하는 단계이지만 21세기 중반까지는 스스로 증식하고 진화하는 기계를 창조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