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과학은 아주 최근에 형성·부각되기 시작한 새로운 학문분야. 이 인지과학의 형성 배경 및 특질들은 무엇이며 인지과학적 차원에서 언어는 어떠한 중요성을 띠고 있는가?
연전에 어느 동물원에서 있었던 일로, 사자우리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한 사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 대해 일반인들은 참 어처구니 없는 짓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람이 맨손으로 사자에 맞선다면 그 결과는 거의 뻔하기 때문이다. 사자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사람보다 힘센 동물이 얼마든지 더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그런데 이처럼 힘이 별로 세지 않은 사람이 만물의 영장으로 자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 이는 강한 자가 승리한다는 자연의 철칙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바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점이다. 즉 육체적인 힘은 비록 갈대와 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다 하더라도 인간은 생각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있기에 강자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와 같은 마음과 지혜는 무엇인가? 그런 것은 어디에 들어 있는가? 그런 것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우리가 만약 육체의 힘과 관련해서 위와 같은 질문을 했다면 그 대답은 비교적 자명할 것이다. 육체의 힘은 팔 다리를 중심으로 한 근육에서 나오고 그러한 근육은 대개 겉으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효과적이고 꾸준한 훈련을 하고, 양질의 영양분을 섭취하면 근육이 잘 발달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의 힘, 마음의 능력은 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들어 있는지도 잘 모른다. 어느 정도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 인간의 육체적 능력과는 반대로 마음의 능력, 즉 지능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의 힘은 무궁무진하다. 거대한 쇳덩이를 하늘이나 우주로 날아가게 할 수 있고, 지구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힘도 있다.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이룰 수 있는 일이 얼마만큼인지, 또는 어디까지인지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언어는 마음의 산물
'마음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물론 아주 오래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던져온 질문이다. 그 중에서도 학자들은 그러한 의문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아주 초기에는 이런 사람들을 모두 철학자라 칭했다. 즉 잘 알려진 바대로 철학이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었다.
철학자들에게 궁금한 것은 물론 인간의 마음만이 아니었다. 낮과 밤이 왜 있는지, 하늘에는 별이 왜 있는지, 사람들은 밥을 굶으면 왜 죽는지 등 부지기수였다. 이 모든 질문을 철학자가 모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따라서 수많은 칠문들을 적절히 나누어 탐구할 필요성이 자연히 생기게 됐고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수의 학문 분야가 생겨났던 것이다.
사람의 정신, 마음과 관련된 질문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분야들도 여럿 생겨났다. 심리학은 사람들의 정신력집중 기억력 지각력 추리력 문제해결능력 등에 초점을 맞춘다. 인류학은 인간의 행동 및 사고의 틀을 밝히고 인류의 본래 모습, 즉 원형을 밝혀내는데 관심이 많다. 신경과학은 사람의 뇌를 중심으로 한 중추신경계 및 기타 신경체계를 생물학적으로, 화학적으로 밝혀내고 싶어한다.
언어학 역시 마음의 산물로 여겨지는 언어의 신비를 알아내고자 노력한다. 최근 전산학의 발전과 더불어 그것의 하위분야인 인공지능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기계에 담아둘 수 있을까라는 데 큰 흥미를 느낀다. 순수 철학자들은 보다 근원적이고 종합적인 물음, 생각하고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며, 그것이 인간존재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라는 질문에 계속 매달리고 있다. 이처럼 각 분야별로 질문의 범위를 알맞게 축소해 그 축소된 질문에만 몰두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분야별 단편적 연구가 그대로 단편적 연구로만 머물 수는 없었다. 앞에서 열거한 대부분 문제들이 결국 사람의 마음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그러한 단편적인 연구들을 합칠 때 비로소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본래의 질문에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뒤에서 말하게 될 정보라는 개념의 발전으로,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각 분야 연구들을 한데 묶어 줄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즉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인지현상을 종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틀이 필요하게 됐고 그 틀을 확보할 가능성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학이나 논리학 철학에서는 형식주의의 발전으로 사물에 대한 엄밀하고 명확한 인식의 바탕이 마련됐다. 철학에서는 새로운 인식론적 과학철학이 등장하게 됐고, 정의하거나 검증하기 어렵다고 봤던 심성적 개념들을 과학적 개념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언어학에서는 이른바 촘스키(Chomsky)혁명이 일어나 언어를 마음의 반영물로 보게 됐다. 물론 심리학을 비롯해 각 분야별로 인지적 현상에 대해 제각기 그동안 쌓아 놓은 연구들 또한 새로운 시각의 전환을 필요로 하게 됐다.
여기에다가 디지털 컴퓨터가 등장해 우리 머리 속에서 일어난다고 여겨지는 복잡한 논리적 증명이나 계산과정, 더 나아가서는 마음의 움직임까지도 이제 컴퓨터를 통해 실제로 조작해보고 유추해 볼 수 있게 됐다. 이리하여 1950년대를 기점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인지과학이란 분야는 오른쪽 (표)에서 보듯 여러분야가 공동으로 연합해서 연구하는 학제적 연구분야로 자리잡게 됐다.
마음을 한 정보처리장치로 봐
어떤 연구든 과학적인 연구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과학이 요구하는 명확성 엄밀성 간결성 등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오랫동안 인간의 마음과 지식의 실체에 대해 알고 싶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학문적 탐구차원으로까지 발전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마음에 대한 단편적인 연구의 수준을 넘어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연구를 추구하기 위해서 마음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해 주는 방법론의 등장이 필수적이었다.
특히 정보라는 개념의 등장과 발전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요즘 들어서 정보화 사회라는 말이 다반사로 쓰이고 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정보라는 개념에 대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자료정도로 받아들인다. 도서관에 쌓여 있는 것도 정보요, 남을 미행해서 알아낸 것도 정보다. 그런데 새로운 과학적 철학적 관념에서 본 정보는 그저 인간이 사용할 때까지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곧 행동의 주체라는 능동적인 개념으로 파악된다.
흙 속에 떨어진 한 알의 씨앗 속에는 그것이 이 다음에 어떤 모양과 어떤 크기로 발현되는지를 결정해 주는 정보가 들어 있다. 동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정란은 그것이 앞으로 어떤 모양과 크기의 동물로 발전할지 매우 세밀한 데까지 결정해 주는 정보의 결합체다. 수동적으로 다른 생물체에 의해 이용되기 위해 있는 정보가 아니라, 때를 기다리다가 적절한 기회가 주어지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행동의 주체인 것이다. 조그마한 씨앗을 거대한 나무로 변화시키는 것도 정보다. 눈에도 잘 안보이는 수정란을 완전한 인간으로 점차 바꾸어 주는 것도 역시 정보다.
이 개념을 확대하면 우리가 목격하는 삼라만상의 모든 형상 뒤에는 그러한 현상을 일어나게 하고 변화시키고 조작하는 원천으로서 정보가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정보라는 개념 및 이의 활동은 우주의 보편 원리의 하나로 자리잡게 됐다. 전통적 물리학에서는 물질과 에너지가 우주의 근본을 형성한다고 봤는데, 여기에 추가해 정보의 역할과 능력이 본격적으로 인식되고 발견되기 시작했다. 마음의 활동 역시 정보가 그 주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사물이나 개념을 여러 경로를 통해 인지하고, 이를 저장하고, 가공처리하고, 또는 전파한다. 즉 마음이란 정보의 수집 처리 저장 등을 행하는 주체라고 볼 수 있다.
언어는 인문사회과학의 수학역할
이와 같이 정보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관점이 부각되는 한편, 1940년대 이후로 정보의 구조 및 흐름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에 커다란 성과가 있었다. 컴퓨터의 등장 및 논리 형식적 상징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그것이다. 컴퓨터는 정보의 기본 단위를 0과 1로 본다. 컴퓨터는 그처럼 단순한 기본 단위를 바탕으로 무수한 조작, 즉 계산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요즈음 주위에서 수없이 눈으로 목격하게 되는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낸다.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웠던 마음의 여러 복잡한 현상도 그 근저에는 비교적 단순한 기본 단위가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컴퓨터 기술 및 새로운 정보이론이 발달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사람 마음의 움직임까지 흉내낼 수 있게 되자, 마음을 하나의 정보처리장치로 보는 시각이 점차 신빙성을 더하게 됐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로봇의 등장이 더 이상 꿈만은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사람의 마음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엇인가? 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있다. 사고가 언어에 앞서는가, 아니면 언어가 먼저인가라는 논쟁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각"이 어느 정도 있는 것도 같고, 반면 "언어는 사유의 집"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의 입장을 취하든 한가지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어떤 형태로든 언어와 결부되지 않은 사고란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쉽지 않다.
잠시 앞에 제시한 도표로 돌아가 보자.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곳에 등장하는 여섯 분야 중 심리학과 언어학만이 다른 분야와 '강한 연결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을 정보처리체계로 볼 때, 언어만큼 구체적이면서도 고차적인 정보처리도구는 없다. 정보처리체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언어만큼 품성하면서도 다양한 고도의 정보처리체계는 아직 없다.
언어를 배제한 인간사회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거의 모든 행위에 언어는 필수적으로 개입되고 있다. 어찌 보면 자연과학에서 수학이 하는 역할을 인문-사회과학에서 언어가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언어라는 상징체계의 본질을 밝혀낼 수만 있다면 '마음이란무엇인가'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언어체계와 그밖의 인지체계와의 연관성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시각과 언어해석은 동일한 경향
인간의 시각과 언어해석 사이에 동일한 경향이 발견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예가 하나 있다. 오른쪽 (그림)을 보자.
우선 오른쪽을 손으로 가리고 왼쪽 정육면체만 살펴 보자. 그러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육면체의 앞면이 오른쪽 위쪽을 향해 놓여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왼쪽 아래쪽을 향해 놓여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두가지로 지각될 수 있다.
이번에는 가린 손을 치우고 두 개 정육면체를 동시에 관찰해 보자. 이상하게도 둘 다 앞면이 같은 방향으로 놓은 것으로 보이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한쪽 앞면이 오른쪽 위쪽이라고 보면 다른쪽도 그렇게 보인다. 반대로 한쪽 앞면이 왼쪽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고 보면 다른쪽 정육면체도 동일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지각된다. 즉 한쪽은 오른쪽 위쪽으로, 다른 한편은 왼쪽 아래쪽으로 지각하려 해도 쉽게 되지 않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이처럼 시각적으로 동일하게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언어표현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다음 문장을 보자.
The Curry was hot.
영어단어 hot에는 뜨겁다와 맵다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다. 따라서 위의 문장은 카레가 맵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뜨겁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 문장이 하나 더 추가된 표현을 보자.
The Curry was hot and the coffee was hot.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카레가 맵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는 쉽지 않고 뜨겁다는 뜻으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들린다고 한다. 즉 위의 정육면체에서 경험한 동일해석경향이 언어표현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단편적인 예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언어 활동과 기타 인지활동 사이의 같은 점 및 다른 점에 대한 연구는 매우 흥미로운 분야임에 틀림없다.
20세기 언어학혁명을 주도한 촘스키에 따르면 '언어는 마음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라고 한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밝혀 내는 것은 곧 마음의 본질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뜻이다.
언어는 마음의 거울
촘스키는 표면적인 현상을 기술하는 것보다 심층적인 원리를 찾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전의 언어학자들과는 달리 촘스키는 겉으로 드러난 언어현상에 관심을 보이기 보다 그러한 현상을 가능케 해주는 드러나지 않은 규칙과 원리에 초점을 맞췄다. 이를 물리학 연구에 비교하면 눈에 보이는 물리적 현상보다 그런 현상을 야기하는 기본 원리, 즉 분자나 원자 및 이들의 운동원리 결합원리를 밝혀내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과 흡사하다.
따라서 촘스키는 언어가 책이나 녹음테이프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 속에, 우리 머리 속에 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책이나 녹음테이프에는 그저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있을 뿐이다. 언어구조의 연구가 마음구조를 밝히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은 바로 이런 데 기초하고 있다.
언어연구가 마음의 구조 및 작용원리를 밝히는 데 핵심적인 공헌을 할 것이라는 촘스키의 견해는 그의 언어습득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언어는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난다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정신이 그러하듯이. 인간과 다른 지구의 생명체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 차이 중에 하나가 바로 언어라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언어적 능력을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것이라면 그 복잡한 체계를 아주 짧은 시기에 습득한다는 사실은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 하나 배우기 위해 그처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서도 별로 큰 진전이 없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언어란 얼마나 복잡한 체계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복잡한 체계를 사람들은 생후 4~5년이면 거의 다 습득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쉽지 않다. 촘스키에 의하면 마치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듯이 사람이 타고난 언어능력이 적절한 토양, 즉 환경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 바로 언어습득이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가 있다. 겉으로는 매우 다양하고 서로 아주 다르게 보일지라도 근본적인 원리는 동일하다는 것이 언어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보편원리라 부르며 보편원리를 찾는 데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러한 보편원리에 대한 추구가 긍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의 구조와 작용원리를 알아내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