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앞에 앉아서 "나의 몸이 이렇게 불편한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물으면···.
병원에 한번 가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는 의료자원도 부족하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어서 정말 큰 병이 생겨도 병원에 찾아가기가 힘든, 흔히 말해 병원 문턱이 높던 때였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이 많이 해소된 요즈음에 와서도 병원에 가기가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이것은 또 어찌 된 일인가. 물론 요즘에 병원가기가 어렵다는 말은 큰 병이 생겼음에도 경제적인 이유로 병원에 가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상대적인 의미로 어려움이 따른다는 얘기다. 생활이 바빠서 병원에 갈 틈을 내기가 어렵다거나, 병원에 가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처럼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찰을 받는데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의사를 대신해서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 시기가 우연히도 컴퓨터가 발달을 거듭하는 때와 일치하고 보니, 당연한 결과로 '그 무엇'을 컴퓨터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사실 근래 들어 널리 보급된 개인용 컴퓨터를 생각하면, 병원에 가서 복잡한 수속을 거치는 대신 집에서 컴퓨터를 통해 질병을 해결한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다.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나의 몸이 이렇게 불편한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질문을 하면 '그것은 이러한 병이니 이렇게 하십시오'라고 답이 나온다면 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컴퓨터가 의사와 비교할 때 과연 그 능력이 어떤가 하는 점이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이것도 그리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여러 명의 유능한 의사들로부터 '이런 증상이 있으면 이런 병이니 이렇게 하면 된다'는 고도의 의료지식을 모아서 컴퓨터에 입력해 두었다가, 사용자가 물어보는 경우 찾아서 대답해 주면 될테니까. 그러나 세상 일이 이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우리는 아직 주위에서 컴퓨터가 의사를 대신해서 진료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어떤 어려운 점이 있길래.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 우리 주위에서 가능한 것은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의사의 진료과정 모방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까지 개발된, 그리고 개발 중에 있는 모든 컴퓨터 진단 소프트웨어들은 인간의 진료과정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컴퓨터진단 시스템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사의 진단과정을 알아보는 것이 될 것이다.
의사의 진단과정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어떤 증상이 있으면 이것이 곧 어떤 병이고 따라서 어떻게 치료하면 된다는 식의 의료공식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질병에 걸리면 반드시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증상이 한가지 병이 있을 때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의사는 환자로부터 가능한 한 여러가지 방법으로 각종 자료를 모아 이들을 조합해 진단을 한다. 여기서 자료라고 하는 것에는 환자의 성별이나 연령 등 인적사항, 여러가지 증상, 병이 생기기까지의 과정(이것을 병력이라고 한다), 특별한 방법을 써서 이때 나타나는 환자의 반응(증후라고 한다), 때로는 기계를 이용한 검사의 결과, 환자의 신체나 배설물의 일부를 이용해 얻은 검사실 결과 등이 포함된다.
의사는 이러한 자료들 중에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을 모으고 여기서부터 추측이 가능한 몇가지 병을 생각한다. 이때 가능성이 있는 병들이 떠오르면 이 몇가지 병 중에서 정답을 찾기 위하여 다음 단계의 자료수집을 한다. 이렇게 자료수집과 분석을 통한 판단을 몇차례 거듭한 끝에 최종진단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기본원리는 확률에 바탕을 둔 것이다. 즉 어떤 자료가 어떤 병이 있다는 사실을 확률적으로 얼마나 뒷받침하는가 혹은 그 병이 없다는 사실을 얼마나 뒷받침하는가 하는 것을 모아서 어떤 병의 존재유무를 판단한다.
이렇게 해서 어떤 병이라고 진단이 내려지면 그 다음 단계로 그 병에 대한 치료과정이 시작된다. 치료는 앞 단계에서 얻어진 진단에 따라 그 내용과 방법이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적절한 치료를 하여 질병이 치유되면 모든 과정이 끝나게 되지만, 치료과정에서 질병의 경과가 의사의 예상과 다르게 나타나면, 다시 진단단계로 돌아가 환자의 자료를 가지고 판단하는 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컴퓨터진료도 이 과정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다. 환자에 대한 각종 자료를 모은 뒤 이 자료가 어떤 병이 있다는(혹은 없다는)것을 어느 정도 확률로 뒷받침하는가 하는 것을 계산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네 분야에서 응용돼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질병의 진료와 관련, 컴퓨터진료라는 말이 대략 네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첫째 각종 건강진단 등에서 검사의 결과를 컴퓨터로 출력하여 주는 것을 가리켜 컴퓨터 건강진단이라고 부르고 있다. 둘째는 검사기계 등에 컴퓨터가 사용되는 경우(전산화단층 촬영 등)이고, 셋째는 자신의 증상을 컴퓨터통신을 이용하여 의사에게 알리면 의사가 이것을 보고 역시 컴퓨터 통신을 이용하여 답을 해주는 것, 그리고 넷째로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지칭한다.
우리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컴퓨터 건강진단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검사의 결과를 컴퓨터로 처리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 중간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컴퓨터처리가 개입될 여지는 있으나 가장 중요한 기능, 즉 어떤 사실을 판단하는 일은 컴퓨터와 무관하며 전적으로 사람이 수행하게 된다. 단지 결과를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나 데이터베이스 등을 이용하여 프린트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컴퓨터 진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요즘 많이 보편화된 전산화단층촬영(흔히 CT라고 한다)기계는 분명히 컴퓨터를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질병을 진단하는 전체과정에서 본다면 이것도 단순히 병을 진단하기 위한 '자료'를 만드는 일에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이므로 이것 역시 정확한 의미의 컴퓨터 진단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최근 몇몇 컴퓨터통신회사에서는 의학상담 혹은 컴퓨터클리닉이라는 이름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컴퓨터통신을 통신매체로 이용하는 의료상담으로 일반인이 자신이 상담하고자 하는 내용을 컴퓨터통신을 통해 전송하면, 이것을 수신한 의사가 이에 대한 해결책을 역시 컴퓨터통신을 이용해 되돌려 보내주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컴퓨터가 전달매체로 이용될 뿐 진단과정 자체에 컴퓨터가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컴퓨터진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이 진정한 의미의 컴퓨터 진단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컴퓨터진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국내에서 개발되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환자의 증상 등 환자에 대한 자료를 입력하면 몇 단계를 거쳐 그 환자의 질병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병명을 제시하여 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아직은 의과대학 등에서 실험용으로 일부 질환에 국한해 제작한 것이거나, 컴퓨터 통신회사 등에서 기본적인 질환을 대상으로 제작한 것이어서 일반적인 사용은 어려운 실정이다.
컴퓨터 통신을 이용한다
다른 컴퓨터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진단 프로그램도 사용자의 수준에 따라 그 내용이 크게 달라진다. 즉 환자의 질병을 보다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서는 고급의 정보가 필요하게 마련이므로, 사용자가 어느 정도로 정보를 다룰 수 있는가에 맞추어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된다. 이런 분류에 따르면 컴퓨터진단 프로그램은 일반인들이 단순히 자신의 증상을 입력하고 여기에 따라 진단을 해주는 일반용 프로그램과 의사가 자신이 진찰한 환자의 자료를 입력하면 그 내용에 따라 의사의 판단을 도와주는 내용을 출력하는 전문가용 프로그램 등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전문가용은 의사들이 사용하도록 제작된 것이므로 논외로 하고 일반용에 대한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현재 진단프로그램으로 실용화된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이들은 모두 컴퓨터통신회사를 통하여 서비스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컴퓨터진단 프로그램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통신회사에 접속을 하고 해당 서비스를 호출해야 한다. 일반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먼저 사용자의 증상을 물어보고 몇가지의 추가질문을 거쳐서 사용자의 질병을 진단해주고 현재의 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권고사항을 제시해주는데 컴퓨터통신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컴퓨터 진단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신뢰성이 있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으로는 한국데이타통신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자가진단 정보시스템을 꼽을 수 있다.
0차 의료기관
컴퓨터진단은 얼핏 듣기에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더구나 컴퓨터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으로 인해 모든 병을 정확히 진단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여러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우선 병을 진단할 때는 환자의 증상 뿐만 아니라 각종 검사결과 등 앞에서 말한 여러가지 자료가 필요한데, 이 중에서 컴퓨터에 제공되는 자료는 환자 자신이 알고 있고 다룰 수 있는 증상 뿐이다. 이렇게 환자의 증상만을 가지고 진단하기 때문에 자연히 정확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또 진단은 확률에 기초를 둔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오차는 불가피한데 일반인들은 이 오차를 상황에 맞게 수정할 능력이 없으므로 오차를 그냥 감수할 수 밖에는 없다.
무엇보다도 현재 우리의 수준이 개발 초기단계라는 사실이 큰 한계점이다. 이것은 아직 대규모의 자료를 이용하여 보다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아직 컴퓨터진단이 의사의 진료를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질병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유익하며, 특히 어떤 증상이 나타났을 때 이것을 가지고 병원에 가야할지 아니면 기다려야 할지를 판단하는데는 (0차 의료기관의 기능) 상당히 큰 도움을 준다.
컴퓨터진단은 현재의 위치를 정확히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어떤 면에서 보면 상당한 발전이 있으나 또 어떤 부분에서는 아주 느리게 발달하고 있다. 특히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는 진단 프로그램의 진보는 국내외 모두 저조한 실적을 보이고 있어 앞날을 낙관하기가 쉽지 않다. 질병의 진단이라는 것이 대단히 복합적이고 전문적인 일로 매우 고급의 정보가 요구되는 행위인데, 이것을 일반인이 다룰 수 있는 단순한 정보를 이용하여 해결하여야 한다는 모순된 상황이 컴퓨터진단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게 만든다.
컴퓨터는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것에 필적할 만한 발명품이다. 과거에 문자가 그러했듯이 미래의 모든 문명은 컴퓨터를 매체로 하여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을 입증하듯이 컴퓨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이 분명 현재로서는 매우 어려워 보이는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아주 가까운 장래에 제시할 수 있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