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과학기술 싱크탱크(think tank) 「정부출연연구소」들이 비틀대고 있다. 비정상적인 예산집행과 인력구조, 잦은 연구과제 변경, 관리들의 행정만능주의, 해바라기성 과학기술자 등의 문제로 표류하는 출연연구소의 실상을 파헤친다.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소는 국가과학기술이라는 무거운 짐을 싣고 가기에는 너무 '낡은 수레'인가. 예산을 멋대로 전용하며 국민의 세금이나 낭비하는 '특혜집단'인가.
과학기술전쟁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출연연구소의 이같은 '노화현상'이 사실이라면 국방에 구멍이 뚫린 것만큼이나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연연구소의 문제는 얽힌 실타래에 비유된다. 그만큼 만성화되고 복잡하다는 얘기다.
책임 소재의 규명에도 주관부처인 과기처와 출연연구소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 감싸안고 격려해줘야할 한 식구끼리 감정적인 언사도 불사할 정도로 대립되어 있다.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일까. 출연연구소의 실상과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선방향을 찾아 본다.
두가지 다른 시각
과학의 달인 지난 4월 출연연구소들은 각 언론에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았다. 지난해 10월에 실시한 출연연구소에 대한 감사원의 지적이 뒤늦게 노출됨으로써 발생한 이 사건은 가뜩이나 의기소침해 있는 연구원들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크나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출연연구소가 불필요한 인력을 마구 채용, 인건비를 남용하고, 연구비를 소장 개인판공비로 전용함으로써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곳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되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작년 8월 과기처가 발표한 '출연연구소 합동평가 결과'는 이들 연구소가 방만한 경영을 일삼고, 연구생산성도 저조하다는 식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해 경쟁적인 연구영역확장으로 기능이 중복되고 있고, 기술수요조사 및 예측부족으로 연구수요자와 연계가 안되고 있으며, 안일한 연구수행, 개혁의지와 사명감의 결핍, 정원 외 인력의 비대화 등 갖가지 '성인병'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이같은 사실은 정부 뿐만 아니라 출연연구소 관계자도 일부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의사가 환자를 오진, 잘못된 처방을 내리듯 정부의 출연연구소에 대한 평가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자칫 생명까지 앗을 수 있는 실책(기능재정립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우선 평가의 '잣대'가 틀렸다는 것이다.
연구원들은 최근 출연연구소를 상품화 기술전략인 'G7프로젝트'와 연계시키거나 한국전자통신연구소와 인삼연초연구소를 정부 투자기관인 공사로 이관시킨 예에서 보듯, 상공부와 경제기획원의 논리와 기업의 시각에서 평가하는 것은 출연연구소의 고유기능을 이해못한 발상이라고 지적한다.
출연연구소는 기업이 기피하는 국가원천 및 공공기술에 연구의 비중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실용화율로 연구생산성을 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단기성 실적 위주의 평가는 오히려 '교각살우(矮角殺牛)의 우(愚)'를 범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출연연구소 종사자들은 연구예산의 전용이라든가 가(假)T.O.문제 등 기관운영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정부 스스로가 원인제공자였고, 또 이를 묵인해온 '방조자'였다고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왜곡 경영 낳는 예산구조
정부 돈을 받아 운영되는 출연연구소의 경영이 왜 파행적으로 운영될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예산의 절대액 부족과 연구소의 특성을 살리지 않은 회계제도에서 비롯된다.
출연연구소는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의해 비영리 독립법인으로 설립되어 정부로부터 출연금을 받아 운영된다. 여기서 정부지원금을 '투자' 또는 '출자' '보조금' 등으로 표현하지 않고 굳이 '출연'(出損)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일종의 기부금과 같이 '재정적 지원은 받되 운영에 있어서는 간섭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연구기관운영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 연구의 기능을 극대화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지원예산은 출연연구소 총운영비의 60~70%에 불과하고, 그나마 세부 항목까지 통제, 자율운영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정산제도와 예산전용의 불인정. 정산제도는 정부예산이 연구소의 자체 수입분(기업수탁연구 기부금 등)을 제외한 뒤 지급되고, 결산시에도 정부인정 예산항목에서 이익 또는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규정짓고 있다.
이러한 제도 아래서는 잉여금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액수만큼 다음해 정부지원예산이 삭감되기 때문에 구태여 연구소가 기업수탁과제 등 재원의 다양화를 위한 자구노력을 할 필요가 없고, 남은 돈을 어떤 식으로든 소진해야 하기 때문에 예산낭비를 유발할 여지가 많다.
또 예산진행 변경시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예산항목간 전용이 어려워 연구환경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것도 연구소운영을 경직화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결국 잘못된 제도가 왜곡된 경영을 유도하게 되는 것이다.
"일례로 연구장비 수입국의 부두노조파업으로 배로 와야할 장비가 항공편을 이용했다고 하자. 이럴 때 운송시간 절약으로 인한 비용효과, 연구의 생산성 등은 무시되고 오직 당초 계획대로 예산을 집행하지 않은 사실만 추궁당한다. 연구는 콜럼버스의 항해에 비유되듯 진행과정에서 수없이 방향을 수정해야 하는데 정부 회계제도는 연구의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착, 행정우선풍조라는 기현상을 낳게 된다." 한 연구원의 푸념이다.
특히 이같은 세부예산통제는 갈수록 심해져 올해 개정된 연구개발 관련법령집에 따르면 과제마다 각종 증빙서류와 현금출납부까지 만들도록 제도화함으로써 규모가 큰 어느 출연연구소의 경우 감사원의 지적을 받지않기 위한 자료가 용달차로 1대분은 족히 되어야 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출연연구소경영의 목줄을 죄는 또다른 요인은 정부 출연금 지급기준이 현실과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건비의 경우 출연연구소 종사자의 정부 인정 급여 수준이 공무원보다도 적기때문에 이를 보전하기 위해 체력단련비, 시간외 근무수당 등을 신설하고 있고, 특히 역사가 오래될수록 직원 승급분의 규모가 크지만 정부에서는 획일적인 호봉정원만을 기준으로 예산을 배정하므로 써 적자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지난해 정원에서 78명을 미달 운영했음에도 인건비에서의 호봉차액 6억1천만원을 비롯, 모두 28억원의 적자가 발생했고, 올해에는 5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가(假)T.O.」인가
가(假)T.O.(위촉연구원)란 정원외 인력을 말한다. 즉 정부의 인건비예산에 포함되지 않는, 연구소가 부족한 연구일손을 충당키 위해 자체적으로 뽑은 인력이라는 뜻이다. 감사원 지적대로라면 정원 외 인력은 67.4%에 이르고, 이같은 현상은 출연연구소들의 무모한 연구영역 확장에서 비롯된 '군살' 이니만치 감원되어야할 대상이다.
그러나 정부의 정원개념은 인건비 예산지원을 위한 수치일 뿐 원래 출연연구소는 타정부기관과 같이 T.O.제도의 적용을 받지않는 것이 원칙이다. 연구소의 인력 규모는 사회의 연구개발수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프트웨어 개발의 필요성이 높아진다면 시스템공학연구소의 인력은 자연 증원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을 받는 정원수는 80년 초 연구소 통폐합 당시 숫자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10년간 출연연구소의 특정 연구개발사업규모도 2백억에서 1천여억원으로 5배이상 늘어났고, 국제연구 투자규모도 엄청나게 확장되고 있는데 정부는 고작 동결된 인건비 기준에 맞춰 연구소를 평가하는 축소지향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무지를 반영하는 연구인력 동결 또는 감축지시는 결국 연구소마다 인력난을 초래, 고급두뇌 누수현상과 함께 출연연구소의 새로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연구소의 초과인력은 방만한 기관운영 등 부정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으나 한편으로 보면 그만큼 사회적수요, 특히 산업계의 연구 개발 수요가 크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가T.O.가 많다는 것은 수탁과제가 많다는 뜻이며, 장기적으로 산업계와의 연계를 통한 연구개발 시장성이 큰 유망한 분야라는 점에서 정부는 오히려 기술개발 수요분석을 통해 현실적인 인력지원예산을 펴도록 노력해야 될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정책·기획본부의 선임연구원인 L씨의 지적이다.
"과학기술정책 없는 게 낫다"
90년 12월 KIST 정책·기획본부가 20개 이공계 출연기관 종사자 1천7백여명을 대상으로 R & D 관리시스템 현황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재미난 현상 한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연구환경의 안정성을 묻는 항목에서 월급 지위 등 신분안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연구원은 24%에 불과했고 74%가 연구자금의 안정적 공급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수치는 연구비 절대액수의 부족에 따른 목마름과 함께 정부과학기술 투자정책의 잦은 변화로 연구비가 언제 중단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부의 일관성 없는 과학기술정책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례가 '특정연구개발사업'이다.
시행 10년을 맞고 있는 이 사업은 90년 '국책연구중심체제'로 전환되더니 채 1년도 못되어 G7프로젝트에 흡수·통합되는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90년 6개 국책연구개발단을 비롯, 정부가 2001년까지 추진계획을 밝힌 대형 연구과제는 모두 42개. 이 과제가 도출되기까지에는 1년여의 기간동안 전문가 1천여명과 관계 연구원들 역시 수십차례의 공청회와 회합에 동원됐고, 연구계획서 보고서 등의 준비를 위해 전체 출연연구소가 난리를 치렀다. 그러던 것이 91년 들어서자 특정연구사업은 상품화기술 중심의 G7프로젝트로 골격이 바뀌어 다시 과제선정을 한다고 지금까지 법석을 떨고 있다.
이렇게 국가 과학기술투자의 근간이 흔들리면 특정연구사업과제의 90% 정도를 수행하는 출연연구소도 함께 흔들린디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우선 42개 국책과제는 8개로 축소되고 나머지는 G7과제에 흡수되거나 '국가주도 첨단요소'라는 신설된 항목에 편입됐다. 물론 국책연구 예산도 90년 3백85억원에서 91년 1백41억원, 92년 72억원으로 삭감됐고, 첨단요소예산 역시 91년 2백31억원에서 92년 78억원으로 크게 감액됐다. 반면 올해 국책 및 첨단요소 사업축소로 전용된 3백75억원이 G7 프로젝트에 투입되고 많은 과제들도 이 프로젝트로 흡수된다.
결국 요란하게 잔치는 벌였지만 실상 연구원 입장에서 보면 과거 국책과제가 'G7'으로 옷만 갈아입은 꼴이 된 셈. 여기에다 G7 과제연구에 산업계 참여를 의무화함으로써 종래 지원받던 특정연구사업 관련 연구비는 기업들과 '갈라먹기'가 불가피하게 돼 가뜩이나 부족한 연구비 기근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G7'이 상품화 기술을 겨냥, 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원천 및 공공기술과제는 'G7'에 흡수되지 못한채 연구비가 중단되어 공중분해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수행하던 극한기술과 초정밀측정기술은 국책과제 1차년도사업이 끝나는 올해로, 고온초전도체 기술개발은 내년도를 기점으로 연구가 종료될 운명에 놓여 있다.
국책과제였던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소재 공정기술개발과 공업화공정기술 개발 역시 91년 통합되어 첨단요소사업으로 전환되는 우여곡절을 겪더니 그나마 올해로 핵심공정기술의 기반조성만을 마친채 막을 내려야 한다.
이같은 과학기술투자의 잦은 변화는 짧은 장관임기동안에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전시행정이나 업적주의가 정부의 대국민홍보전략과 맞아떨어져 자행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결국 출연연구소 연구원들은 정부의 알량한 '녹(祿)'을 받는 대가로 정책이 바뀔 때마다 연구방향을 수정하고, 연구비가 끊길까 전전긍긍하며 '해바라기' 과학기술인이 되고 있다.
자율뺏는 행정군림
불과 한달여전 과기처 주관으로 G7 프로젝트 연구과제가 선정·발표되었을 때 예상을 뒤엎은 결과에 당혹감과 불만을 표출하는 연구원들이 많았다.
이들은 당초 14개과제에서 예상외로 탈락한 지능형 컴퓨터와 감성공학기술개발 관계자들로, 이번 결정이 기술시장의 전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선정과정에 객관성과 공정성이 배제됐다고 주장한다.
이는 바로 현장중심이 아닌 관리중심의 행정만능주의와 연구원을 정부 하부조직쯤으로 생각하는 관료들의 행태를 여지없이 보여준 실례로 지목된다.
감성공학은 인간의 특성과 감각을 제품설계에 반영하는 기술로 모든 상품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꼽힌다. 따라서 심사 한달전만 하더라도 G7과제에 선정될 것이 확실시되었으나 기획책임자였던 표준과학연구원 박승덕 원장이 모 신문에 글을 기고한 것이 화근이 되어 탈락됐다는 후문이다.
당시 박원장은 언론에 출연연구소의 예산 전용문제가 보도되자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글을 신문에 게재했는데 이것이 감사원과 과기처의 신경을 건드려 '괘씸죄'로 걸려들었다는 것. 박원장은 과기처 감사 도중 불려가 해명까지 했고, 감성공학을 적극 추천한 당시 과기처 기계조정관(국장급) 역시 아무런 이유없이 인사조치 당해 연구소의 보직없는 자리로 좌천됐다(본인은 한사코 부인하지만 몇몇 관리가 이를 시인했다).
권력의 횡포가 과학기술정책을 변질시키거나 연구기능과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실례는 이외에도 많다. 연구현장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재벌기업의 로비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야근시 발행되는 저녁식권이 연구개발비에 포함되어 지출되는 것은 부당하다며 규제한 지침은 앞의 예에 속하고, 기업과 출연연구소가 함께 수탁연구과제를 놓고 경쟁입찰에 들어갔을 때 '중복연구는 자원낭비'라는 명분을 내세워 응찰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전횡은 과기처가 특정연구개발사업비라는 연구비의 '길목'을 지키고 있고 인사권까지 틀어잡고 있기에 가능하다.
물론 연구비의 경우 분야별로 실무소위를 구성, 객관성을 유지한다고는 하지만 이들 위원들 또한 각종 연구지원을 받으며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한 관리들의 '원격조정'을 받지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사권을 비롯한 경영 역시 연구소마다 이사회 관장사항으로 되어 있지만 관리들로 구성된 당연직 이사들이 사전에 안건을 심사, 여기서 통과된 안건만 정식 이사회에 올릴 수 있어 보이지 않는 통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출연연구소의 예·결산, 임원의 선임 및 해임 등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서 정부관리이사 비중은 40~50%선. 이들의 입김은 절대적이고 이사회는 정부결정사항을 사후추인하는 시녀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7월초 연구원들의 극렬한 반대의사표명에도 불구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신임원장에 취임한 서정욱 전(前)과기처차관의 경우도 이같은 낙하산인사의 '전통적 관행'을 따른 것에 불과하다.
이밖에도 개인적 성향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다 싶게 골프부킹, 술접대, 해외출장 시 용돈등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어 연구원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또 예산철이 되면 과기처 경제기획원 국회까지 거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연구소마다 1천여만원은 이런저런 경비로 항목에 기재할 수 없는 돈이 지출된다. 이렇게 지출된 돈을 감사원이 인정해줄리 없으니 결국 연구 관련 경비를 비롯한 여타 운영비에 얹혀져 눈속임 행정을 유도하게 되는 것이다.
출연연구소 스스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정부가 지적하듯 '노화현상'이다. 나이든 연구원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적당주의 파벌조성 관료화 보신주의 등 탐구 및 창조정신이 결핍된 정신적 고령화를 일컫는 말일 게다.
내부에도 적은 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불행하게도 이같은 현상이 일부나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연구원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박사학위 우대풍토에 적응하기 위해 연구보다는 유학준비에 애쓰는 연구원이 있는가 하면, 연구비를 이것 저것 따오기 위해 전공을 바꿔가며(좋은 의미에서) 변신을 해야 하는 책임연구원급 실장들도 있다.
이사람 저사람 다리를 걸쳐두어야 연구수탁을 받는데 도움이 되고, 연구내용보다 인간적 평가를 우선하는 사회에 적응하려다보니 '사팔뜨기'가 된다는 혹평을 받는 사람도 있다.
매년 되풀이되는 삭감에 대비해서 2, 3배 연구비를 신청했다가 '운좋게 잘보여' 신청 금액이 그대로 지급돼도 정산제도에 묶여 차기연구에 활용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정부에 반납하기는 아까워 돈을 쓰기 위한 연구집행이나 크게 필요치않은 첨단장비를 구입하기도 한다.
연구소 곳곳마다 먼지속에 쌓여있는 논문들이 비록 연구의 질을 평가하는 '잣대'가 모호하다고 해도 얼마나 국가과학기술발전에 기여했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한번쯤 자기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실(室) 단위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는 연구소 조직체계는 인력 정보 장비의 호환성을 어렵게 하는 등 부서간 유기적 협력관계를 깨뜨리고, 한창 연구에 매진할 책임급 연구원들에게 행정의 굴레를 씌우고 있기 때문에 하루빨리 부(部)단위의 매트릭스조직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정부가 우선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넓게는 '사고의 대전환'이다. 전세계가 영토분쟁 시대에서 기술전쟁시대로 돌입했다면 국방 예산 만큼 과학기술예산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22개 과학기술관련 출연연구소 예산은 1년에 2천5백억원 정도로 일본 나스타연구소 한곳에 투입되는 6천억원의 절반도 채 못 된다. 기업도 정부지원 연구비를 니눠먹을 생각으로 출연연구소를 비난하기 보다는 공공 및 원천기술개발에 일조하려는 의식으로 조건없는 장기적인 투자를 시작해야 한다.
정부가 해야할 일
투자규모를 늘리기 어렵다면 연구소가 자율적인 운영을 통해 경영을 개선하도록 정부는 간섭과 통제를 자제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잉여금을 반납하는 정산제도를 없애고 남은 연구비의 처분권을 위임하면 경제적인 연구를 유도할 수 있고, 예산의 과대신청도 예방할 수 있다.
인건비와 기타 경상운영비 등으로 나누어 지급하는 출연금 구조를 총원가 방식으로 개선하면 연구소의 책임의식을 고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정과목별 예산통제 때문에 빚어지는 편법경영도 사라질 것이다. 연구소가 개별적으로 벌어들이는 자체수입을 인정해 주는 방법도 생산성 동기부여와 기관의 자립도 향상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고려해 볼만 하다.
연구원의 신분보장과 연구비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서는 과학기술 투자정책이 장관 경질때마다 바뀌는 행태도 사라져야 하며, 부처간의 이해와 일부 관료의 권한으로 연구소 조직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출연연구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제도적으로 안정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도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출연연구소의 기능재정립은 우선 국내적으로 대학과 기업의 연구기능이 높아지고 있고 국제적으로 환경 등 국가적인 장기 대형 프로젝트의 필요성 대두와 정부의 과학기술 지원 제한 움직임 등 새로운 국제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만큼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 통산성 산하 연구소가 중소기업의 애로기술 및 공 인증실험만을 하고, 과기청 산하연구소는 순수미래기술에만 집중 투자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예컨대 무기재료연구소의 경우 10개 연구팀이 5년 단위로 테마를 바꿔 각종 물질을 합성하는데 어디에 응용될 것인가조차 생각하지 않고 고압프레스장비를 만들어 합성해 보고 새로운 물질이 나오면 특허를 내는 등 무차별 원천기반기술 확보에 나서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기초 및 인력양성은 학계가, 원천기술은 과기처 산하 전문연구기관이, 또 이같은 기술을 바탕으로 상품화연구 및 설계기술은 상공부 산하 출연연구소가, 마지막으로 현장적용시험과 운전기술은 산업계가 분담, 기능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
출연연구소의 한 원로 과학기술자는 "우리나라는 싼 임금과 손쉬운 기술도입으로 성장해온 만큼 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역사성과 국민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한 것이 과학기술 발전의 가장 큰 장애요인이다. 최고정책 당국자가 전방을 시찰하듯 연구계를 둘러보며 연구원의 애로사항을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작은 관심과 의지표명을 보일 때 출연 연구소 문제는 쉽게 매듭이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