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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두개의 신성(神性) 레닌과 붉은 군대

군복입은 소년 가장 멋있다고

소련이라는 나라에는 서방세계 사람들의 눈에는 기묘하게 보이는 것이 많다.

군대도 그런 존재의 하나. 토요일 오후 웬만한 가정의 아이들은 군복을 거치고 우쭐대며 외출한다. 군인이 대부분 청소년의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에 군복은 멋있게 보일 수 밖에 없는 것.

소련에는 두가지의 성물(聖物)이 있다. 하나는 볼셰비키혁명의 주도자 '레닌'이고 다른 하나는 붉은 군대(Red Army)이다.

누구도 레닌의 위대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을 가할 수 없다. 그의 어록은 매일 '프라우다'신문에 게재되고 있다. 소련사회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비판을 하고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고르바초프'도 레닌에 대해서는 비판은 커녕 오히려 '레닌으로 복귀하자'는 식의 발언을 거듭하고 있다.
 

레닌과 적군은 신성불가침


조국과 이념과 사회주의 수호자
 

조국과 이념과 사회주의 수호자


군을 이상하게 높히 평가하는 풍조는 우선 '마르크스'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무력은 혁명의 객관적 요소'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레닌은 '혁명은 스스로 방위할 수 있을 만큼 힘이 클 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현실적으로 1917년 혁명과 계속된 내란, 그리고 외국의 무력 간섭 등에서 공산혁명은 힘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또한 2천만명이나 희생된 대독(対独)전투에서 적군(赤軍)의 위신과 조국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는 끝없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적군은 조국을 방위하며 이념과 사회주의를 지킨다. 적군은 또한 공산당의 방패이다." 이런 내용의 문구가 소련 헌법에까지 명시되어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병사는 애국자일뿐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양심의 수호자'라는 인식까지 갖게 된 것이다. 실제 소련군은 장교는 물론 병사들까지 군사교육뿐 아니라 사상교육을 철저히 받는다.

1956년의 헝가리침공, 1968년의 체코침공, 그리고 최근에 있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있어 소련군이 보여준 심리적인 견고성은 이런 사상적 무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세월이 갈수록 소련군의 병사들가운데 남부 지역의 회교도들이 늘어남에 따라 군의 심리·사상적 단결이 다소 문제가 되고 있다는 보고도 나오고 있다.
 

적군의 오락시간


스탈린을 구제한 적군

2차대전이 끝난지도 40년 이상이 지났지만 전쟁중 적군이 세운 공로는 아직도 소련 인민들사이에 생생히 살아있다. 각종 홍보물과 전시관 교과서등에서 적군의 활약을 대대적으로 계속 선전하고 있기때문에 전후 세대들도 체험하지 못한 역사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갖게 된 것이다.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전쟁중 독일군은 자기들을 환영하는 우크라이나인들까지 참혹하게 대했다. 넓은 국토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스탈린그라드의 혈전, 정복된 베를린시내에 적기(赤旗)를 꼽고 있는 이름모를 병사의 이미지는 소련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소련이 전쟁이 끝난뒤 동유럽과 발틱3국(최근 소요가 일어나고 있다)을 합병하고 극동에서까지 세력권을 넓힌것도 적군의 '위대한 공적'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소련 인민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2차대전과 이때 세운 적군의 공적은 스탈린의 잔혹한 통치를 결국 합리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최근의 일부 주장에 따르면 수용소군도로 유폐된 반(反)스탈린주의자나 스탈린체제에 다소라는 비판적이었던 사람들 약 6천여만명이 수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이러한 잔혹행위를 잊게 했고 오직 '위대한 영도자 스탈린원수'와 그가 이끈 군대의 영광만이 기억남게 했다.

전쟁이 끝난뒤는 또 어떤가. 미국에 이어 곧 원자탄과 수소탄을 개발해 적군의 위신을 계속 드높혔으며 이러한 위세를 배경으로 해군까지 초강대국의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군사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주개발에서는 미국을 부분적으로 크게 앞서기도 했다.

적군과 고르바초프

군의 절대적지위는 장교와 병사의 개인적 복지혜택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부족한 주택에서 제1의우선 입주권, 의료혜택권, 소비재 구입권에서 군은 다른 직종보다 우선이다.

그러나 이러한 군의 위세와 팽창은 대가 없이 이뤄질수 없는 일. 인력과 자재등 자원을 군이 거의 독점함으로써 시민의 궁핍은 피할 수 없게 됐고 은연중 불만이 확산되게 되었다. 70년대 브레즈네프시대가 군의 항금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그의 개혁·개방정책은 적군을 크게 동요시키게 되었다.

그는 소련 경제의 회생을 위해 이 신성불가침의 존재에 대해 도전을 한것이며 이 도전은 감정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볼수는 없다. 그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피할수 없는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는 적군의 특권을 폐지하고 병력을 감축하고 있으며 주요 지휘관들을 교체하고 있다.

1백만명의 인원을 줄이고 있으며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군사예산을 14% 줄였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시켰다. 소련군의 철수는 복합적인 영향을 주고있다. 이것은 소련군이 최초로 패배를 인정한것이며 이로인해 '소련군의 위대함'이라는 신화가 벗겨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이런 심리적인 측면까지 고려해서 철수를 결정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허나 고르바 초프가 적군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소련군은 규모에서 세계 최대라고 할수있지만 과연 덩치만큼 강력하고 효율적인가? 고르바쵸프는 적군을 크게 신뢰치 않고 있다.

어쨌든 사상 처음 축소의 길을 걷고 있는 적군이 그대로 참고 견디어 나갈 것인지 또는 국내의 여러 소요사태를 핑계, 고르바초프에 반격을 가할것인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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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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