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주)한글과 컴퓨터가 7월초 기능이 크게 향상된 '한글2.0'을 발표하고 시판에 들어간다
89년 5월경이었다. 군을 막 제대한 시절이었는데 당시 필자는 입대 전부터 계속 해오던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군복무시절에 기획하였던 가정정보시스템을 개발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는 틈틈이 색다른 아이디어를 얻을까 해서 당시 우리나라 PC(개인용 컴퓨터) 산업의 메카라 불리던 세운상가를 자주 방문하곤 했다.
89년 3월초에 제대하고 한달만에 가정정보시스템을 완성해 어느 컴퓨터잡지에 기사를 제출한 후 세운상가를 방문하였다. 그때까지 컴퓨터 실력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가게 앞에서 필자의 앞길을 결정짓는 일이 발생하였다.
나로 하여금 어설픈 소프트웨어개발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도록 종용한(?) 사건은 바로 '한글' 워드프로세서와의 첫만남이었다. 당시만 해도 보석글(삼보컴퓨터에서 제작)이 우리나라 워드프로세서의 대명사였고 다소 불편하였지만 아쉬운 대로 사용할만했다.
그런데 위지위그(WYSIWYG, What You See is What You Get)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한글을 처음 접하는 순간 한편으로는 놀라움과 또 한편으로는 불신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러 곳에 수소문하여 정보를 취합해본 결과 나의 눈을 놀라게 했던 모든 사실들이 현실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군복무시절 운이 좋아 군 전산실에 근무한 관계로 전산관련 서적을 계속 접할 수 있었고, 그동안 미진했던 소프트웨어에 관한 많은 서적을 접하면서 소프트웨어 개발쪽보다는 소프트웨어 설계 및 분석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려고 했던 필자에게 "더 이상 소프트웨어 개발이 내 갈길이 아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기초 실력도 없고 군복무 3년이라는 공백 때문에 이미 20대 후반이 되어버린 필자는 한글과의 만남을 통해서 진로를 좀 더 빠르게 결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글이 이달초 2.0판을 선보이면서 새롭게 탄생한다.
기존 파일 구조를 버리고
이번 2,0판의 발표는 (주)한글과 컴퓨터의 이찬진사장이 밝힌 바 있지만 종전의 1.x판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파일구조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체계로 변환하였다는 점에서 앞으로 상당한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과거의 파일구조는 워드프로세서에 대한 지식이 별반 많지 않았던 대학교 재학 시절에 설계한 형태로서 사용자들에게는 커다란 무리가 없었지만 범용성의 문제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살펴보았을 때 문제점이 많았다.
물론 2.0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듯이 사용자의 입장에서도 아래에서 소개하겠지만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또 한글 2.0 발표의 이면을 본다면 외국 워드프로세서들과 한판 승부를 겨룰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사실이다.
한글 2.0이 외국의 우수한 워드프로세서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개발자적인 측면에서 과감하게 과거의 파일구조를 버리고 새로운 파일구조에 의해 설계를 하였다는 점은 무척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지난 1년간 한글의 버전업(version-up, 성능향상)은 기대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찌보면 불행이고 어찌보면 행운이지만 신제품 개발기간 동안 한글의 경쟁상품이 출하되지 않았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경쟁제품이 나왔으면 좀 더 발전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겠지만, 이 점은 한글과 컴퓨터를 아끼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한글과 컴퓨터는 사용자들의 빗발치는(?) 요구를 조금이라도 수용하기 위하여 지난해에 커다란 골격의 변화는 없었지만 1.52판를 발표했다. 1.52판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버전업이란 측면보다는 사용자들의 대한 당연한 책임의식의 실천과 유사상품들의 지속적인 출하와 버전업에 따른 대처방안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마케팅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기존 한글 소프트웨어 판매에 조금이라도 도움주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2.0판에 추가될 여러가지 기능 가운데 일부 미리 개발된 부분들이 사용자들에게 제시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급변하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제스처로 여겨진다. 1.52판의 발표가 글을 아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2.0판의 출하를 기다릴 수 있게 한 일종의 청량제 역할을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2만단어가 등록
그림 2.0판에 추가된 주요 기능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번 2.0판의 발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한글에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직 시판 전이라 완벽한 상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난달에 발표된 베타버전(소프트웨어회사가 제품을 개발한 후 그 제품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전문가들에게 시험적으로 배포한 시제품)과 (주)한글과 컴퓨터의 발표에만 의거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먼저 일반 사용자보다는 논문을 쓰거나 아니면 간이출판(데스트톱출판)을 하는 유저들에게 불편함을 주었던 문서편집시의 메모리 활용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2.0판을 사용할 때 편집가능한 메모리 용량이 8천문단 정도이며 이를 페이지로 환산한다면 약 5백11페이지라고 한다.
당연한 추세이지만 EMS XMS 등 확장된 메모리를 지원하며 가상 메모리(virtual memory)기법도 사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양의 문서편집시에 불편함이 있었는데 이번에 추가된 기능으로 이러한 문제는 많이 해소되었다.
두번째로 외국 소프트웨어에서 이미 예전부터 제공되던 맞춤법교정기능(spell checker)이 작년부터 소문만 무성하다가 이번에 선을 보였다. 사용자가 맞춤법을 잘 모르더라도 워드프로세서가 알아서 문장을 고쳐주니 이 얼마나 편한 일인가. 사용자측면에서 보면 놀라울 변화라고 볼 수 있는 이 기능의 추가로 우리 소프트웨어 수준도 한단계 높아졌다고 할만하다.
외국 소프트웨어의 경우 워드프로세서 뿐만 아니라 엑셀 4.0(Excel 4.0) 같은 스프레드시트용 소프트웨어 조차 맞춤법교정기능을 자연스럽게 제공하고 있지만 영문 보다 훨씬 복잡한 우리 한글에서 이러한 기능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현재 발표된 내용으로 보면 네가지 선택사항을 통해 교정이 가능하다. 프로그램 내부의 사전에는 약 6만단어가 등록되어 있으며 자주 틀리는 단어에 대해서 특별히 빠르게 검색을 해주는 기능도 포함되어 있다.
공무원층 겨냥한 서식기능
세번째로 글자크기의 제약으로 무척 불편함을 겪었던 우리는 2.0판을 통해 전세계적인 추세가 되어버린 아웃라인(out-line font)을 좀 더 친근감있게 접하게 되었다. 물론 작년에 발표된 한글 윈도우즈 3.0에서 이 기능을 선보인 바 있지만 우리 워드프로세서에서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폰트(글자체)를 가지게 되었다.
이번에 발표된 아웃라인 폰트는 1포인트부터 1백27포인트까지 크기의 조절이 자유로우며 폰트가 아주 매끄럽다. 또한 전문인쇄용도로 사용하는 사람을 위해 장평과 자간조절이 무척 용이하여 간이 출판용으로 매우 편리하게 되었다.
네번째 특징은 서식 기능이 보강되었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문서를 기안할 때 우리를 괴롭히는 점이 바로 각종 양식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식에 대한 선호도가 강하고 특히 사선처리를 많이 요구한다. 1.52판까지는 선그리기 기능을 이용하여 어렵게 양식을 작성해야 했고, 그나마 폭의 조절이나 서식내에서 형식을 변경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2,0판에서 보강된 서식기능을 이용하면 각각의 셀(shell)에서 필연적이라고 여겨지는 정렬방식 등의 지정이 각 셸별로 가능하며, 또한 그 크기의 변동 또한 셸안에 들어있는 글자의 양에 따라 자동으로 조절이 되어 일일이 선을 그릴 필요가 없다. 물론 셸안에서의 워드랩(칸이 차면 밑칸으로 밀려나는 것)기능은 기본이다.
사선처리의 경우 인쇄후 볼펜을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는데 2.0관에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속시원하게 해결되었다. 물론 외국 워드프로세서 제품에도 이 기능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양식구조가 조금 다르기 때문에 바로 적용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2.0판은 우리 환경에 알맞도록 설계되었다.
또 각각의 셸에 보호장치를 설정할 수 있어 타인이나 본인의 실수로 인하여 양식이 변경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사용자가 많이 사용하는 양식은 확장자가 .frm이라는 이름으로 저장할 수 있다. 저장된 양식은 나중에 블럭읽기 등을 통하여 다시 사용한다.
이찬진사장은 "이 기능이 많은 양식을 필요로 하는 공무원층을 겨냥한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우리 환경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기능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4단까지 다단편집기능
다섯번째로 이번에 추가된 여러가지 기능 중에 사용자들의 사랑을 독차지 할 것으로 보여지는 기능이 바로 스타일(style)기능이다. 이 기능은 아직 조금은 생소하겠지만 쉽게 정의를 내려본다면 사용자정의 포맷(format)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주 사용하는 문단의 형식을 한번만 작업한 후 해당 문단의 제목 부제목 중간제목 본문형식 정열방식 문단모양 등등의 여러가지 속성을 정의할 수 있는 기능으로, 추후에 해당 형식을 똑같이 적용해야 하는 문단의 경우 블록설정후 단지 이 형식을 적용하기만 하면 똑같은 형식의 문단을 만들 수 있다.
이 기능을 효율적으로 이용한다면 많은 양의 문서편집을 손쉽게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스타일 목록(style library)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회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여섯번째로 전문편집인들이나 간단한 사보 등을 제작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다단편집기능의 추가도 무시할 수 없다. 4단까지 편집이 가능하며 다단편집과 함께 1.52판에서는 인쇄시에만 적용되었던 문자와 그림의 화면동시편집도 가능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형식의 그림을 화면에서 동시에 편집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1.52판에서 느껴지는 무미건조한 맛이 없어졌으며 간이 DTP(데스크톱출판)를 지향하는 듯한 인상이 강하게 느껴진다. 물론 본격적인 DTP용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많지만.
일곱번째로 그동안 한글에서 마우스를 사용할 수 없어 무척 불편했는데 이번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마우스 지원기능이 들어 있다. 다음 버전 발표시에는 좀 더 완벽한 지원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용지가 90도 돌려서 찍히는 랜드스케이프(land scape)방식의 지원이나, 수학관련 문서작성시 필수적인 수식편집기의 추가, 불러오기 기능의 추가, 블럭복사시 머리/꼬리말 각주내용 등을 함께 복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번에 추가된 모든 기능들을 전부 다 나열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위에서도 밝혔지만 이번 2.0판에서 드러난 많은 변화가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물론 7월초 정식발표 이후 상당기간 혼란스러움이 있겠지만 3년전 나의 인생 여정을 바꿔버린 한글을 열심히 개발한 (주)한글과 컴퓨터측에 바램이 있다면 이제 이 회사의 경쟁상대는 국내기업들이 아니라 미국 다국적기업 마이크로소프트사라는 점을 명심하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자존심이 (주)한글과 컴퓨터에 의해서 지켜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