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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 없는 항암제 만든다

암억제 유전자 기능 연구단

암은 왜 생길까. 우리 몸의 세포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수명을 다해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성돼 그 자리를 대신한다. 세포의 수명은 대부분 100일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 죽어야 할 세포가 죽지 않고 끝없이 분열을 계속하면 암이 된다.

우리 몸에는 암을 억제하는 여러 유전자가 있다. 지금까지 대장암을 억제하는 유전자(APC), 유방암을 억제하는 유전자(BRCA1, 2), 췌장암을 억제하는 유전자(DPC4) 등 여러 종류가 발견됐다. 노화와 식습관 같은 환경적 요인으로도 암에 걸리지만 암억제 유전자가 고장 나도 암에 걸릴 수 있다.

만일 모든 암을 억제하는 유전자가 있다면? 이런 ‘만능 유전자’를 조절할 수 있다면 암을 정복하는 일도 시간 문제다. 충북대 의대 배석철 교수가 이끄는 암억제 유전자 기능 연구단은 ‘만능 유전자’의 비밀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한 연구원이 렁스3 활성화 약물을 시험하기 위해 암을 일으키는 물질을 쥐의 복강에 주사하고 있다.


유전자를 지배하는 자, 암을 다스린다

암억제 유전자 기능 연구단은 ‘렁스3’(RUNX3) 유전자를 연구한다. 배 교수는 1995년 세계 최초로 이 유전자를 발견했다. 당시 그는 백혈병 발병을 억제하는 렁스1 유전자를 연구하고 있었다.

“사람의 1번 염색체에서 렁스1 유전자와 비슷한 렁스3 유전자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우연’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그가 렁스3 유전자를 발견한 일은 ‘필연’인 것처럼 보였다. 렁스1 유전자도 그가 발견했기 때문.

배 교수는 렁스3 유전자의 기능을 알아내기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쥐의 렁스3 유전자를 제거했다. 그러자 렁스3 유전자가 없는 쥐는 위 점막 세포가 계속 분열하며 위암이 생겼다. 2000년에는 렁스3 유전자가 사람에서도 암과 관련되는지 검증하기 위해 위암 환자 46명의 암 조직을 분석했다. 그 결과 60%인 28명의 암 조직에서 렁스3 유전자가 제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반면 암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의 렁스3 유전자는 모두 정상이었다.

배 교수는 “렁스3 유전자가 고장 난 세포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와 같다”고 설명했다. 렁스3 유전자가 고장 난 세포는 끊임없이 분열하다가 암세포로 변하기 때문. 몸에 이상이 생겨 렁스3 유전자에 메틸기(-CH3)가 붙으면 렁스3 단백질을 만드는 RNA가 전사되지 않고 렁스3 단백질이 생성되지 않으면 위암이 발생한다.

배 교수는 이 같은 연구결과를 2002년 4월 세포생물학 분야 권위지인 ‘셀’에 발표했다. 당시 그의 논문은 전세계 의학계와 생명공학분야 연구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암 발생에 관여하는 수많은 유전자 중 핵심 인자를 찾아냈기 때문.

배 교수의 논문이 발표된 뒤 전 세계 연구자들이 앞다퉈 렁스3 유전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렁스3 유전자가 위암뿐 아니라 간암, 대장암 췌장암 같은 대부분의 고형암을 억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배 교수팀은 2005년 렁스3 유전자가 방광암도 억제한다는 사실을 추가로 밝혔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배 교수는 2003년 창의적연구진흥사업에 선정돼 암억제 유전자 기능 연구단을 설립했다. 현재 유전자를 이용한 암 억제 연구 분야에서는 연구단을 따라올 곳이 없다. 연구단은 메틸기가 렁스3 유전자에 붙는 염기서열에 대한 특허를 갖고 있다. 그런데 배 단장은 특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전 세계 연구소와 대학에서 실험과 연구 목적으로 특허 사용을 요청하면 아무런 조건 없이 허락한다.

“전자기기 같은 제품은 특허를 낸 개인이나 기업의 창조물이지만 유전자나 단백질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처음부터 몸에 있던 유전자의 역할을 알아낸 것에 불과합니다.”

암은 아직까지 알려진 사실보다 감춰진 내용이 더 많다. 연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특허가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인류가 하루 빨리 암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특허를 이용해 연구를 독점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현재 그의 관심은 유전자가 어떻게 암 발생을 억제하는가에 쏠려 있다. 아직까지 렁스3 유전자의 기능이 저하될 때 암세포가 생기는 과정은 밝혀지지 않았다.

배 단장은 “렁스3 단백질은 세포내 신호전달에 관여하는데, 세포에 문제가 생기면 분열 억제신호를 세포핵에 전달하거나 세포의 수명을 끝내도록 유도해 암 발생을 막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연구단은 암억제 유전자 렁스3의 기능을 밝혀 항암제 개발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렁스3 활성화제의 방광암 억제 과정^연구단은 렁스3 단백질(암 발생 억제)에서 일어나는 아세틸화 반응을 강화시켜 렁스3 단백질의 양을 늘리는 렁스3 활성화제‘BVX’를 개발했다.


렁스3 이용해 먹는 항암제 개발

렁스3 유전자를 이용해 어떻게 항암제를 만들 수 있을까. 연구단은 렁스3 유전자의 정체를 밝히는 한편 렁스3 유전자를 활성화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렁스3 유전자에 메틸기가 붙지 않도록 하면 되는데, 이론적으로는 메틸운반효소를 억제해 메틸기가 렁스3 유전자에 붙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배 단장은 “메틸운반효소를 차단하는 일은 삐뚤어진 그물코를 바로잡겠다고 잡아당겨 전체 그물의 모양이 틀어지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즉 렁스3 유전자에 메틸기가 붙는 걸 막으려다 몸 전체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것. 어떤 유전자는 메틸기가 있어야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도 해 메틸운반효소의 기능을 막으면 몸에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메틸기가 붙거나 떨어지는 반응이 렁스3 유전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메틸기는 ‘온코진’이라는 암유발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한다.

항암제를 개발하려면 고장 난 렁스3 단백질의 기능을 인위적으로 되살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연구단은 몸에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렁스3 유전자의 기능을 활성화시킬 방법을 고민했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바로 렁스3 유전자가 만드는 렁스3 단백질 양을 늘리는 것. 연구단은 렁스3 단백질의 분해 과정을 막아 렁스3 단백질의 총량을 늘리는 방법을 개발했다.

유비퀴틴이라는 단백질은 분해될 렁스3 단백질을 찾아가 꼬리표처럼 달라붙고, 단백질 분해효소인 프로테아좀은 유비퀴틴을 찾아낸 뒤 이 꼬리표가 붙은 단백질을 분해한다. 만일 유비퀴틴이 붙을 자리에 아세틸기가 붙게 되면 분해효소가 렁스3 단백질을 인식하지 못한다. 연구단은 렁스3 단백질에서 일어나는 아세틸화 반응을 강화하는 약물을 개발해 렁스3 단백질의 분해를 막았다.

국내 바이오벤처인 ‘바이오러넥스’는 연구단의 기술을 이전받아 먹는 항암제 ‘아미나-엑스’를 개발했다. 아미나-엑스는 방광암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 중이며 2~3년 안에 상용화될 전망이다.

연구단은 혈액을 분석해 간단히 암을 진단하는 기술도 개발했다. 암세포가 생기면 그 일부가 혈액을 타고 몸을 순환하는데 혈액에서 메틸기가 많이 붙은 렁스3 유전자가 발견되면 이는 몸 어딘가에 암 조직이 생겼다는 신호다. 이 기술의 핵심은 혈액에서 렁스3 유전자를 잘 찾아내는 것.

지금까지는 암을 진단하려면 조직검사를 했다. 조직검사는 조직을 배양해 분석하는 시간이 일주일 이상 걸리고 암으로 의심되는 특정 부분만 검사할 수 있어 환자들이 치료 시기를 놓친 뒤 병원을 찾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연구단이 개발한 기술로는 혈액만 채취하면 바로 암을 진단할 수 있다. 이 기술은 지난 6월 미국에서 특허를 출원했다. 하지만 상용화하려면 아주 적은 양의 유전자를 분석하는 기술이 필요해 4~5년이 더 걸릴 전망이다.

언제쯤 암을 정복할 수 있을까. 배 단장은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면서도 “렁스3 유전자의 메커니즘을 밝히면 무독성 항암 치료제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냈다.
 

연구단의 박사과정 이유석 씨가 전자현미경으로 폐암세포에서 렁스3 유전자를 관찰하고 있다.


인터뷰_배석철 단장

암 정복 기초 다진다

배 단장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암 전문가다. 2002년 논문을 발표한 뒤에는 외국의 유명 제약회사인 ‘노바티스’가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고액의 연봉과 연구비, 대규모 연구시설 등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배 단장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배 단장은 “우리 기술로 암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위암을 연구주제로 삼은 이유도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걸리는 암이 위암이기 때문.

2004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암을 연구하는 전 세계 의사와 교수들이 모여 만든 ‘렁스 유전자 학회’ 회장을 맡았다. 오는 9월 15일 미국에서 열리는 렁스 유전자 학회에서 배 단장은 렁스3 유전자의 기능저하가 위암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배 단장은 “논문이 발표되면 위암 발병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정립해 치료법 개발에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국내에서도 암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성과를 인정받아 배 단장은 2005년 ‘보령암학술상’을 받았다. 같은 해 연구단은 한국과학재단에서 선정하는 ‘대표적 우수성과사례 50선’에 선정됐다.

배 단장은 “1995년 5평 남짓한 연구실에서 시작해 2003년 350평의 종양 연구소를 세우기까지 힘들었던 여정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2002년 연구소를 건립할 당시에는 종종 연구소 부지를 찾아가 연구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곤 했다.

그는 올해로 암만 15년을 연구한 전문가지만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 배 단장은 1년에 수천 편 씩 나오는 암 관련 논문을 볼 때마다 마음을 새롭게 다진다. 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음을 느끼기 때문.

배 단장은 “암 분야의 연구는 발전 속도가 빨라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뒤처진다”며 “바쁜 시간을 틈틈이 쪼개 수많은 논문 중 일부라도 읽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암이라는 큰 봉우리를 넘으려면 얼마나 많은 계단이 필요할까. 배 단장은 오늘도 암을 정복하기 위해 한 걸음 내딛을 ‘발판’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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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이준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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