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에로의 전환을 겪고 이미 기술 수준이 세계 제1급으로 올라선 일본은 오늘날 산업체의 주도 아래 순수과학의 발전에 주력하고 있다.
산업체가 순수과학의 연구를 주도
일본은 낮은 기술 수준을 극복하기 위해 모방꾼이라는 비방을 들으면서도 기술을 적극 수입하고 더 나아가 개량함으로써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산업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여론에 부응하여 기초 순수과학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일본에서 여론의 힘은 절대적이다. 예컨대 통산성은 70년대 말에 산업체 전반의 여론때문에 산업에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포기하고 새로운 역할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순수과학에 일본 산업체가 관심을 쏟게된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첫째 구미로부터의 기술 수출이 증가하고 있다. 둘째 옛날 노동집약적 산업이 기초과학에 바탕을 둔 기술집약적 산업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이 새 산업들은 너무 급속히 성장하고 있어 산업체는 정부나 대학이 기초과학의 연구를 해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다. 한편 정부는 심각한 재정적자로 연구에 투자할 여력이 없으며, 대학은 급속히 발전하는 산업에 발맞추어 연구를 진척시키기에는 너무 정태적인 체제에 빠져있다.
그러나 산업체가 장기적인 연구에 투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정부는 당장에는 산업적인 전망이 없는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연구 과제에 투자함으로써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통산성은 사회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과학기술단지 설립을 계획하는 등 연구 및 기술개발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힘쓰고 있다.
이미 일본의 총 연구개발비 가운데 75%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산업체는 이윤의 증대로 더욱 많은 돈을 연구개발에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기술을 수입하여 응용·개량함으로써 성공한 경험으로 자신을 갖고 있다. 이러한 자신감이 새로운 분위기를 자극하고 있다. 정부의 연구개발기구에서 연구행정 책임자로 있는 '시바 겐야'박사는 "일본은 일본의 미래가 기초과학의 발전에 바탕을 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있다는 여론에 이끌려 가고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두드러진 증거는 최근 경이적인 성장을 맛보아온 전자업계의 주도로 사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순수과학 연구를 위한 연구실을 설립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기초과학 연구는 언제나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인은 트랜지스터나 DNA 재조합같은 진짜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드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거창한 과학적 도약보다는 산업의 성장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의 개발을위해 기초과학을 연구한다.
기술의 진보-연공서열 무너뜨려
순수과학에 대한 산업체의 관심은 노동집약적 산업이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대체되는 산업구조의 변화에 크게 기인한다. 이 변화와 함께 기업체에서의 전통적인 연공서열 체제가 능력 위주의 승진체제로 바뀌는 한편 종신고용의 관념도 무너지고 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외국인 학자의 초빙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체들은 오래 전부터 사원의 해외연수를 실시해 왔는데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이들은 외국인 학자와 함께 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본은 연구개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잇점이 있다. 군사안보상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연구에서의 협력이 용이하고 연구결과의 발표가 자유스러운 것이다. 이는 연구자들의 의욕을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 시장 규모는 총 연구개발에 비례하므로 일본 산업 전체의 시장을 크게 확대시켜 주는 요인도 된다.
오늘날 일본의 산업체들은 최첨단의 기초과학, 특히 반도체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일본은 장차 극심한 국제 경쟁 속에서도 살아남을 희망을 반도체 산업에 걸고 있으며, 이에 따라 반도체 연구개발에 쏟아붓는 금액도 매년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
대학은 아직도 구태의연
오늘날 일본 대학은 낡은 위계질서의 틀에 묶여 연구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 일본 대학의 체제가 젊은이로 하여금 권위에 복종하게 만들고 따라서 독창적인 연구를 가로막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1981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후꾸이겐이찌'의 경우를 보면 대학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그는 '쿄뚀'제국대학의 학생 시절 원래 물리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키따 겐이쯔'교수의 충고에 따라 공업화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학생이 배운 것을 응용하는 데 매달렸던 것과는 달리 화학이론부터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코또'대학의 교수들은 이러한 그의 개별적인 연구를 적극 격려해 주었다. 결국 이러한 자유롭고 독자적인 연구 분위기 속에서 그의 뛰어난 업적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후꾸이'는 "이제까지는 일본이 기술을 수입해 왔지만 이제 독자적인 기술을 만들어 낼때"이며, 이를 위해서는 "순수과학의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제창하고 있다.
1970년대 초까지 외환 통제를 통한 기술수입의 통제로 산업정책을 좌우해오던 통산성은 일본 산업을 크게 성장시켰지만 바로 그때문에 존재가치가 희박해졌으며 결국 1979년에는 의회에 의해 외환 통제권을 상실당했다.
통산성의 새로운 역활-첨단기술지원
이후 통산성은 새로운 역할을 찾아 나섰는데 그것은 일본이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 속에서 독자적인 기술개발을 필요로 하며 21세기에도 계속 번영하기 위해서는 80년대부터 기술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첨단기술의 개발로 귀착되었다.
현재 기술개발의 세 단계-기초단계, 응용단계, 그리고 상업화를 포함한 개발단계-가운데 개발단계에서는 일본이 미국과 유럽에 뒤지지 않지만, 앞의 두 단계에서는 상당히 뒤져 있는 상태이다. 이에 통산성은 첨단기술의 개발에 있어서 기초단계와 응용단계에 주력할 계획을 세오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많은 투자를 할 여력이 없다. 따라서 통산성은 특혜 융자 및 세제상의 혜택 등으로 민간부문의 연구개발비 투자를 유도하고, 산업과 대학 그리고 정부연구기관의 공동연구-특히 규모가 크고 장기적인 연구-도 추진하고 있다.
기업체도 자체적으로 장기적인 연구에 투자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통산성의 계획에 동조하는 입장이며 공동연구에의 자금 염출에 호의적이다.
정책운영 구조의 변화
오늘날 일본 정부의 과학 정책운영 구조에는 커다란 변화의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우선 가장 큰 문제로는 대학에서의 낮은 연구수준이 대두되고 있는데, 통산성은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나 문부성은 교사연합회의 극좌 성향에 반발하여 개혁을 극력 반대하는 입장이다. 둘째 정보산업의 발달로 전화선의 용도가 다양해지는 데 발맞춘 전화사업의 민간이양에 따른 문제이다. 국립전신 전화공사 산하에서 전자공학과 원거리 통신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4개 연구소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세번째 문제는 통신위성 산업과 관련하여 과학기술처가 처해 있는 어려움이다. 미국은 통신위성의 구입을 요구하고 있으나, 이미 위성의 자체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한 국립전신전화공사는 개발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여 과학기술처가 양쪽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
야심적인기획-생체컴퓨터의 개발
오늘날 일본은 순수과학 연구에 많은 힘을 쏟고 있으며, 통산성 산하 전자공학연구소에서 오징어를 실험하여 생체컴퓨터의 실현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마쯔모도 젠'그 대표적인 예이다.
기존의 디지탈 컴퓨터는 스스로 생각할수 없기 때문에 정교해질수록 더욱 더 많은 소프트웨어를 필요로 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두뇌와 같은 생체컴퓨더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소프트웨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쯔모도'는 신경의 신호전달 작용을 연구하여 생체컴퓨터의 개발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으며 오징어는 그 큰 축색돌기때문에 좋은 실험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야심적인 연구가 정부 산하 연구기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여러 대규모전자업체들도 이미 생체전자공학의 연구에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무정형 실리콘
일본의 대기업에서는 곧바로 응용될 전망이 없더라도 좋은 착상을 계속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경영진은 대놓고서 '안된다'고 말하는 대신, 비공식적으로 연구를 계속하게 내버려 둔다. 대개 이러한 비공식적인 연구에 회사의 근무시간과 자금 그리고 설비가 이용되어도 사장은 이를 모르는체 묵인한다. 무정형 실리콘을 소재로 한 태양전지 개발에서 일본이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은 '산요'의 '쿠와노유끼노리'가 회사의 설비를 이용하여 비공식적인 연구를 독자적으로 한 덕분이다.
'쿠와노'는 개인적인 연구를 통해 무정형 실리콘으로 반도체 스위치를 개발하고, 같은 소재에서 반도체 기억소자를 발견해냈으며, 무정형 소재를 얇은 필름으로 가공해 내는 공법을 개발해 내었다. 얼마 뒤 미국에서는 무정형 실리콘을 소재로 한 태양전지가 개발되었고 이로부터 대량생산을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쿠와노'가 이미 개발해 놓은 공법 덕분에 처음부터 미국을 앞지를 수 있었다.
무정형 실리콘으로 태양전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대량생산에서의 문제는 빛을 전기로 전환시키는 효율을 얼마나 싸게 얼마 만큼 높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고 이 점에서 일본은 '쿠와노'의 개인 연구 덕분에 미국보다 한발 앞서 있었던 것이다.
태양전지를 이용한 상품은 1980년 휴대용계산기를 필두로 시계와 라디오 텔레비젼 그리고 태양열 발전설비 등에 이르기까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이제 태양전지는 산요의 주된 상품이 되었다.
현제 오사까에 있는 '산요'의 기술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쿠와노'는 무정형 소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한다. 정형 소재의 불변성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약점이기도 하다. 반면에 무정형 소재는 얼마든지 형태를 변화시킬수 있기 때문에 변용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쿠와노'는 오사까의 연구소에 "독창적으로 도전하라"는 구호를 내붙이고 있다. 산요는 그의 독창적인 업적에 보답하여 오사까의 연구소를 '쿠와노' 연구소라 이름지었다.
산토리회사의 유전공학
5년전만 해도 '산토리'는 위스키와 맥주만을 생산하고 있었다. 오늘날 '산토리'는 감마인터페론을 비롯한 여러 약품을 유전공학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산토리는 이를 위해 생의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그 책임자로 동경 대학의 생화학교수로 분자생물학 전문가인 '노구찌 테루히사'를 초빙하였다. '노구찌'는 생체공학자를 양성하는 데에는 10년 가량이 걸리리라는 것을 때닫고 해외의 유능한 일본인 과학자를 끓어 모았다. 그는 또한 외국인 학자를 초빙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리하여 '산토리'는 일본의 대다수 기업이 탁상에서만 생명공학에의 진출을 꿈꾸고 있을때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결과 지난 82년 5월에는 감마 인터페론의 유전자 복제에 성공하였고 뒤이어 그 양산기술도 개발하였다.
오늘날 '산토리'연구소는 감마 인터페론과 같은 암치료제 뿐만 아니라 고혈압등 혈관계 질병의 치료제 개발에도 힘쓰고 있으며 장차 노망과 같은 노년기 질병의 치료제도 개발할 예정이다.
'울바크'의 연구독려 정책
일본에서 가장 큰 진공기기 제조업체인 '울바크'회사에서는 모든 아이디어가 돈거래를 통해 유통된다. 창업자이자 사장은 '하야시 치카라'는 돈거래를 통해 사원들이 서로의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믿는다. 입자물리학자였단 '하야시'는 아이디어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
그 자신 끊임없이 연구에 몰두할 뿐만 아니라 사원들에게도 풍족한 연구개발비와 교육비를 투자하면서 연구를 권장한다. 어떤 사원의 아이디가 '울바크'의 필요에 닿지 않는 것이라 해도 '하야시'는 그 아이디어가 다른 곳에서 이용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울바크'는 여러 연구팀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팀은 로열티를 지불하고서야 그 아이디어를 이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연구의욕을 더욱 부추긴다.
'울바크'의 이러한 놀라운 연구독려는 12명의 이사진 가운데 8명이 공학자나 과학자이고, 초창기에 전혀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은행가들이 참을성있게 진공기술의 결실을 기다려준 경험을 겪었던 데에서 기인한 듯하다.
'하야시'자신은 두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울바크'가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 기업이며 둘째로 어떤 아이디어가 결실을 맺으려면 오랜 기간이 걸린다는 점을 '울바크'가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첨단기술과 '구마모또'현
'큐슈'의 '구마모또'현은 첨단기술의 유치를 통한 지역개발을 도모하고 있으며 그 방법으로 종합 과학기술단지의 설치를 계획하고 있다. 통산성이 젊은 공학자들의 고향 잔류 성향과 첨단산업 제품의 운송이 쉽다는 점에 힘입어 도꾜, 오사까의 공장밀집상태를 해소키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과학기술단지 설치계획에 대한 그 후보지의 하나인 '구마모또'현이 가장 먼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구마모또'현은 이미 반도체 산업을 유지하여 고용확대와 기술수준 향상, 토박이 업체의 성장을 맛본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농촌지역이면서도 여러 대학과 전문학교에서 많은 우수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게다가 '구마모또'현에는 유전공학 관계의 유명한 연구소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구마모또'현 출신의 이공계 인력들 가운데 대다수가 일자리를 찾아 외지로 나가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이들 중에는 반 이상이 일자리만 주어진다면 되돌아 오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러한 '구마모또'현의 상황이 과학기술 단지 설치계획에의 호응을 자극하고 있다. '구마모또'현의 주민은 지역 산업체를 중심으로 83년에 '구마모또'재단을 설립하여 과학기술단지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재단은 과학기술단지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재단은 숙련 노동자를 훈련시키고 최근의 기술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과학기술단지의 설치와 더불어 여러 기술분야의 상호 교류를 통한 총체적 여러 기술분야의 상호 교류를 통한 총체적 발전을 추구할 것이다.
'구마모또'현의 과학기술단지 설치계획은 주민의 적극적인 호응과 지원, 그리고 우수한 기술인력의 존재로 밝은 전망을 보이고 있다.
놀랄만한 보건통계-육식과 암의 관계 밝혀
일본은 보건통계는 서구의 의사들이 놀랄만큼 매의 자세하고 그 표본도 25만명이 넘는다. 이는 거의 전적으로 국립 암연구소의 '히라야마 히다께시'와 그의 여섯 친구들덕분이라 할 수 있다.
1947년에 '히라야마'는 6명의 친구와 함께 공중보건 연구소를 졸업하였다. 이들 7명은 서구에서의 학우 관계와는 전혀 달리 평생토록 동기동창으로 긴밀한 유대를 맺게 되었다.
1965년에 암연구소에 들어간 '히라야마는 즉각 모두 고위 보건책임자로 재직하고 있던 6명의 친구에게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건강기록부를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친구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고 논의를 거쳐 한 사람당 생활양식에 관한 30가지의 문항을 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6명의 친구는 각기 자기 현에서 대표적인 5개의 보건소를 조사대상으로 지명하였고 결국 29개의 보건소가 확정되었다. 조사는 65년 10월에 보건소의 간호원과 조산원들의 도움으로 행해져 12월에는 40세 이상의 남녀 26만5천백18명의 답변결과가 집결되었다.
"66년 1월에 '히라야마'는 6개 현의 당국을 설득하여 모든 사망증명서의 사본을 제공받기로 약속받았다. 그리고 그는 매해 10월에 전출입 신고서를 입각하여 추소의 변동을 세밀하게 추적하였다.
이러한 20여년에 걸친 사망증명서와 생활양식에 관한 답변서의 대조로 '히라야마'는 흡연과 육식이 암에 걸릴 확율을 높이며 담배를 피우지 않는 아내도 남편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 폐암과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삼키는 비디오 카메라도 곧 시판
일본에서는 의사나 공학자들의 협력으로 기관지를 통해 허파로 들어가 허파 내부를 촬영할 수 있는 극소형 비디오카메라가 개발되었다. 이 비디오 카메라는 '펜탁스'제품으로 2년 안에 시판될 것이다.
더 나아가 꿀꺽 삼킬 수 있도록 알약처럼 생긴 비디오 카메라도 개발되고 있는데 이 카메라는 환자의 소화관 속에서 영상뿐만 아니라 그 안의 산도와 습도를 바깥으로 전달해줄 것이다.
이미 사용되고 있는 또 다른 진단기로는는 디지탈 발사선 사진기를 들 수 있다. 이는 기존의 방사선 사진보다 훨씬 적은 방사선조사량으로도 더욱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 있고 게다가 컴퓨터를 통한 영상처리이기 때문에 영상을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조각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영국의 생화학자 로버트 뮬러가 격은 일본 대학의 분위기
내가 문화적·언어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라 일본으로 연구를 하러간 것은 일본이 오늘날 모방과 개량의 단계를 넘어서서 자체적으로 순수과학 연구에 기반을 둔 첨단기술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활력이 넘치는 연구장소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는 그것이 순수과학 연구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상품개발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나로서는 기업체 탐방에서 거의 얻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 정부도 연구를 촉진하고있고 대학에서는 나를 충심으로 환영해주었다.
기업체는 지나치게 높은 학력을 원치 않아 대개의 학생이 석사학위로 만족하므로 외국인 학생이 박사과정에 들어가기는 비교적 쉬운편이다. 대개 외국인 학생은 이미 석사학위를 지니고 있고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2년동안 연구를 하게 된다. 그 다음에 교수의 판단에 따라 3년간의 추가 장학금이 주어지면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어떤 외국인 학생도 적어도 처음에는 집단을 이루는 성향이 강한 일본인 학생들 틈에서 소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단 그들과 융화되면 그 대가는 엄청나게 크게 돌아온다.
외국인 학생은 일본인들의 사회적 관습에 적응해야 한다. 크게 술에 취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미덕이다. 취중의 실수는 다음날 깨끗하게 용서된다.
일본인은 종종 자기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 말하지 않는다.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곧잘 자기의 생각과는 달라도 대다수 사람의 의견에 맞게 대답을 한다. 그래서 누구도 고립되어 면목을 잃지 않는다.
외국인에게는 일본인 학생들이 교수의 생각을 그대로 추종하고 회사원이 회사의 방침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그 뒤에는 교수의 생각과 회사의 방침이 탄생하기까지의 격렬한 싸움이 숨어있다. 바로 이러한 숨겨진 싸움이 나에게는 큰 자극제가 되었다.
일본인 학생들은 도와주기를 즐겨하며 도움에 대해 별로 고마움을 주고받지 않는다. 상급생은 하급생을 당연하다는 듯이 도와주며 그대신 하급생은 자기의 실험결과를 상급생이 멋대로 차용해도 내버려둔다.
일본인의 관습은 젊은 외국인 학생을 종종 당황케 한다.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인사성이 밝다. 그러나 그들의 예절은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생은 교수의 말에 즉각 복종하지만 교수는 졸업생에게 취직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윗분에게는 예의바르고 정중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것이 정상으로 간주된다. 남녀평등에 관한 한 여성은 어떤 경우든 남성보다 아래에 있다.
이처럼 일본인은 복잡한 예절체계를 가지고 있어 외국인을 곤경에 빠뜨리곤 한다 그러나 지하철역에서는 이런 모든 예절이 깨끗이 무시된다. 그곳에서는 가장 빠르고 힘센 사람이 경쟁에서 승리자가 된다. 물론 그런 사람이란 대개 몸집이 작은 중년 부인들을 가리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