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겨울은 이상난동이라고 할 만큼 따뜻했는데, 그래서인지 봄봄도 좀 일찍 찾아드는 것 같다. '봄'하면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대개는 들판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과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노랑나비, 그리고 개나리꽃 진달리꽃에 귀가 따갑도록 지저귀는 새소리가 아닐까? 한마디로 겨우내 죽은 듯이 움츠리고 있던 생명들의 소생이요, 대자연의 희망이 넘치는 약동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봄이 왔기는 해도 우리의 자연은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가 따가울 정도인가? 봄이 오기는 왔으되, 그리고 새싹은 돋아나고 꽃은 올해도 잊지 않고 피어났으되 자연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확인시켜주는 새소리는 과연 들리고 있는가? 꽃들은 울긋불긋 그림처럼 피어있으나 온 산과 들판에는 죽은 듯한 적막만이 감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가 희망의 계절인 봄을 맞이하면서 이런 유령들의 세상같은 죽은 봄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한권의 책 때문이다.
레이첼 칼슨의 '고요한 봄'(Rechel Carson: Silent Spring)은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미국의 한 복판에 어떤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은 자연과 절묘한 조회를 이루면서 살아왔다. 봄이 되면 들판에는 온갖 꽃이 피어났고 산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 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병아리도 송아지도 원인 모르게 죽어갔다. 그 많던 새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봄은 분명히 봄인데도 새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자연은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왜 봄이 왔는데도 이렇게 고요한가? 이 책은 그 이유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책은 또 적고 있다.
'이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는 생물과 그 환경사이의 상호작용의 역사다. 모든 생물의 형태나 기능은 전적으로 환경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극히 짧은 기간에 인간이라고 하는 생물의 한 종이 그 자신의 서식처인 환경, 즉 자연을 무자비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문명을 발달시킨다면서 스스로의 무덤을 열심히 파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인간에 의한 환경오염과 환경파괴를 실례를 들어가면서 고발하고, 그 환경파괴로 인한 인류생존 자체의 위협을 생물학적인 근거를 토대로 해서 설득력있게 경고하고 있다. 이 책이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1962년)인데, 저자 칼슨 여사가 파헤쳐 놓은 당시의 미국 곳곳에서의 환경오염의 참상을 보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특히 농약에 의한 새들의 절멸상태에 이르러서는 새도 지저귀지 않는 침묵의 봄, 죽음의 봄의 무서움을 실감케 된다. 인간도 그 새들과 마찬가지로 멀지않아 저렇게 죽어갈 것이 아닌가?
이런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심각성은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귀가 따갑도록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상황은 해가 갈수록 악화일로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책은 처음 출판된 당시보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더 읽혀져야 할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현대의 고전으로 읽혀져야 할 이유 그리고 또 필자가 이 묵은 책을 소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환경오염에 대한 당장의 특효약은 없으나 칼슨 여사는 그 대책의 하나로 "농약 등 살충제의 경우 생물학적 구제방법의 개발을 통해 그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들의 자손을 위해 늦었지만 만사를 제쳐놓고 지금부터라도 이와 같은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대책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공존해야 한다는 대명제 위에 있어야 한다.
백화가 만발하고 온갖 새가 지저귀는 '요란한 봄'을 위해 우리 모두가 우리의 환경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길상(李吉相)박사가 번역해 '침묵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탐구신서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