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 우리나라 수학자가 고안한 마법진들을 며칠 사이에 모두 풀어낸 사람이 있다. 대전의 기초과학 지원연구소 생체고분자팀에 근무하는 과학자인 이지원씨(남, 33세)는 이미 지난 7월호 과학동아에서 지수귀문도의 일반적인 풀이법을 제시해 한차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 후 과학동아는 이지원씨와 접촉하면서 최석정의 ‘구수략’에 지수귀문도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마법진이 있음을 알리고 이들에 대해서도 탐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수일간 자료를 검토한 이씨의 대답은 간단했다. “별 어려움 없이 풀리는 문제이던데요?”
지수귀문도를 두고 현대의 컴퓨터도 풀지 못한 마법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통의 마법진들은 신비하게 생각돼 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구수략에 실린 최석정의 다양한 마법진들은, 수년전 KAIST 수학과의 한상근 교수가 지수귀문도와 9차 복마방진을 한차례 탐구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3백여년 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는 전인미답의 영역이었다. 이지원씨는 아직 일반인에게는 형태조차 생소한 마법진들을 며칠 동안 궁리 끝에 일반원리를 파악해내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재미로 시작한 마법진 연구
그러나 이지원씨는 수학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분자생물학으로 석사를 마치고, 기초과학지원연구소에서 4년째 근무하고 있다. 다만 우연히 접하게 된 지수귀문도에 관심을 가지면서 마법진에 손을 대게 됐고, 지금도 순전히 일과 후에 취미로 마법진을 궁리하는 아마추어 연구가이다.
구수략에 제시된 마법진은 마방진으로 잘 알려진 방진을 제외하면 총 19가지다. 그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들은 크게 방사형진, 4각진, 6각진, 8각진, 복합진으로 대별할 수 있다. 최석정은 이들 마법진에 각기 독특한 이름을 부여해 그의 수리철학적인 해석을 덧붙이고 있지만 편의상 숫자합을 만드는 변의 개수로 고쳐부르기도 한다.
방사형진은 중앙에 중심수를 두고 좌우상하의 두 수열이 교차하는 십자형이지만, 교차하는 수열을 늘려 여섯갈래, 여덟갈래의 방사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4각진은 각 꼭지점에 해당하는 4개의 숫자합이 일정하게 배열된 구조다.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이 십자형으로 교차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6각진은 지수귀문도로 잘 알려져 있는데, 거북등 모양의 6각형 꼭지점의 6개 숫자합이 일정하다. 전체적으로는 6각형들이 이웃해 있으면서 벌집모양을 이룬다(과학동아 1999년 7월호 참조). 8각진은 꼭지점에 써넣은 8개의 숫자가 합을 이루는 구조다. 8개의 숫자 중 2개가 이웃하는 8각진과 공유되는 방식과 공유되지 않는 방식의 2가지가 있다. 복합진은 팔각진과 마방진을 겹쳐 전체합이 일정하도록 하는 형태다.
이지원씨는 이들 각기 다른 마법진들에서 각각의 숫자 조합을 만드는 일반적인 방식을 찾아냈다. 최석정은 특수한 한가지의 숫자조합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지원씨는 이들 각 마법진을 일반적으로 완성하는 방법을 발견해낸 것이다. 이씨의 방법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한가지 형태의 풀이에 그치지 않고 그 형태를 무한히 확장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8각진에서 최석정은 8각형의 개수가 8개인 중상용구도를 제안했지만, 이지원씨는 8각형이 몇 개가 되든지 숫자를 채워나가는 방식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반원리를 발견해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씨는 다각진 외에 ‘구수략’에서 제기된 복마방진의 원리를 일반적인 배열방식이 아닌 ‘직교 라틴 방진’이라는 방법을 이용해 완전히 풀어내기도 했다.
배열마다 숨겨진 규칙 있어
이지원씨는 전통적인 마법진을 풀어낼 때 다음과 같은 몇가지 원칙을 적용했다고 한다. ① 배열을 이루는 기본 숫자단위가 무엇인가?(홀수 또는 짝수로 끝나는가) ② 배열상의 대칭선 또는 대칭점이 존재하는가? ③ 보수관계(첫수와 끝수)의 배수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④ 이론적인 합은 보수의 합의 배수로 나타내질 수 있는가? ⑤ 보수쌍이 아닌 다른 몇 개의 숫자조합이 일정한 합을 형성할 수 있는가? 이지원씨에 따르면, 대부분의 정형적인 문제들은 이 중 한가지 방법에 관련돼 있기 마련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최석정은 과연 이러한 원리를 알고서 마법진들을 만들었을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최석정은 일반적인 방식을 찾아내는데는 관심이 없었고, 주역의 원리와 자신의 수리철학적인 원칙을 잘 표현해주는 특수한 배열의 마법진을 한두 가지씩만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마법진의 구성원리를 알고 있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이지원씨는 최석정의 마법진에서 보수관계나 홀수짝수관계 등을 파악해 일반원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법진을 만들 때 이미 최석정이 그러한 원리를 적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수학자 김용운 교수 또한 최석정이 이들 마법진을 만들 때 분명히 어떤 규칙을 알고서 만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지 않고 초보자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만든다면 단 한가지 형태를 고안해내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또한 최석정이 중국 송대의 ‘양휘산법’에서 제시된 기존의 것들과 다른 독창적인 마법진들을 만들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양휘의 마법진의 구성원리를 완전히 소화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마법진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개념적인 이해가 특히 필요한 수학분야는 정수론 분야다. 김용운 교수는 최석정이 정수의 가감승제에 대한 자유자재의 암산능력과 짝수, 홀수, 보수관계 등에 대해 철저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마법진의 풀이에서 암산능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이에 매달리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다. 좌우대각선의 합과 차를 순식간에 계산하고 서로 맞지 않을 경우 다른 숫자를 배열할 수 있는 순발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화된 풀이법 찾아야
마법진을 구성하는 어떤 요령이 머릿속에서 트이고 나면 처음 보는 마법진들도 쉽게 풀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풀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모든 마법진을 풀이하는 그 어떤 수학적인 원리도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마법진의 풀이방법을 발견하기까지 “어떻게 그런 배열을 발견할 수 있었느냐”고 물으면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아서”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최석정의 마법진을 통해 최석정이 어떠한 생각의 단초를 따라 이들을 만들게 되었는가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만 3백년 전 조선의 한 수학자가 상당한 수학적 지식과 재능으로 독특한 마법진들을 구성했고, 이것을 오늘날 재발견했다는데 만족할 뿐이다.
마법진 마니아들에 따르면, 마법진의 풀이는 말 그대로 ‘마력’이 있다고 한다. 외국의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에 마법진이 소개되고 동호인 모임이 있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PC통신에서 동호회를 조직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마법진의 풀이에 매달리고 있다. 지난 7월호 과학동아에 마방진 기사가 나간 후 편집실에 걸려온 수많은 문의전화에서도 그 열기와 중독성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마법진은 신비한 만큼 사람의 흥미를 끌기 때문에 이를 통해 숫자관계를 궁리하면 두뇌개발에도 도움이 되고 수학에 흥미를 유발할 수 있어서 교육적으로도 효용이 있다. 또한 일본의 농업시험장에서 비료와 종자의 성장관계를 보기 위한 표본화에 사용된 예가 있고, 컴퓨터의 암호와 기법에 사용될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최석정의 방사형진이나 8각진 등의 배열규칙을 매스게임이나 군대 예식에서 응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용운 교수는 마법진의 풀이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특수한 풀이 한가지를 완성하려고 매달리기보다는 풀이들이 갖는 통합적인 원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지원씨가 어떤 마법진의 특수한 배열에 만족하기보다는 배열을 완성하는 일반원리를 발견해내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마법진에 대한 관심은 이제 오묘한 숫자의 배열이 주는 마술적인 신비감에 머물지 않고 수학적 일반화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최석정(崔錫鼎)은 누구인가
최석정은 1646년(인조24년)에 나서 1715년(숙종41년) 70세에 죽을 때까지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671(현종12년)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숙종 때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노론 소론의 당쟁 속에서 소론의 지도자로서 많은 파란을 겪었으나 뛰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영의정에 8번이나 임명됐다. 그는 병자호란 때 큰 역할을 했던 최명길을 할아버지로 두었던 명문가 출신이었다.
최석정은 성리학과 양명학을 두루 공부했고, 특히 음운학, 수학 등에 관심을 갖고 많은 연구를 했다. 관직에 나간 후에는 서운관의 최고 책임자인 서운관영사를 맡아 조선의 천문학연구를 관장하기도 했다. 저술로는 ‘구수략’(九數略) ‘예기류편’(禮記類編)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구수략’은 그의 수리철학사상이 집약된 특이하고 귀중한 문헌이다. 그가 남긴 글들을 모아 후손이 정리한 문집으로 ‘명곡집’(明谷集)이 있다.
최석정은 주역철학에도 이해가 깊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해서 수학과 주역철학을 결합한 독특한 수리철학을 정립했다. 그는 수학을 유학자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지식으로 생각했다. “수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며, 세상의 수학적인 질서를 보면 리(理)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마법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수학을 통해 우주의 진리에 이르고자했던 수리철학자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예로부터 주역에서 중요시하는 하도와 낙서는 다름 아닌 마법진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동양의 주역철학과 수학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최석정도 마찬가지로 수학과 주역철학이 하도와 낙서에 함축돼 있다고 생각했다. 최석정은 마법진을 통해 수학이 우주의 원리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이지원씨가 찾아낸 일반원리
이지원씨는 ‘구수략’에 나와있는 마법진 중에서 일반화가 가능한 형태들을 탐구하고 모든 형태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원리를 찾아냈다.
구수략에 나와 있는 모든 형태의 마법진에 대해 일반원리를 찾아냈지만, 지면 관계상 이들 중 가장 간단한 몇 가지만 소개한다.
(이 방법은 개인적인 탐구의 결과이므로 함부로 도용하거나 허락 없이 상업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1. 방사형진 - 범수용오도, 장책용칠도, 중상용구도
● 일반원리: 방사형 줄의 개수만큼 숫자를 돌려가면서 내부로 들어갔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나온다. 이러한 배열은 각 줄과 원주가 동시에 보수배열을 이룰 수 있는 배열이며, 마치 태극모양을 따라 배열이 완성된다. 이러한 배열은 구수략에 나타난 모든 방사형에서와 같이 중앙에 위치하는 숫자를 동일한 방법을 이용해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 합은 줄수보다 1이 적게 변화된다. 이러한 원리는 중앙의 숫자가 없는 짝수개의 배열에서 뿐만 아니라 원주의 숫자가 늘어나도 일반적으로 적용이 가능하다. 또한 이지원씨의 탐구에 따르면 최석정의 방사형진도 이와 동일한 원리에 입각해서 배열된 것이고 단지 배열 위치만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
2. 사각진 - 하도사오도, 낙서사구도(사오도보다는 사구도의 배열이 더욱 일반적이다.)
● 일반원리: 각 사각진을 분리된 하나로 보고 순서에 따라 해당위치에 숫자를 매긴다. 마지막에 좌우의 사각진은 대칭변환한다. 초보적인 원리에서는 중앙 사각진에 인접한 외부 사각진의 개수가 홀수/짝수에 따라 다른 풀이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지원씨는 홀수/짝수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일반원리도 발견해냈다. 이는 독자들의 탐구를 위해 남겨두기로 한다.
3. 복합진 - 낙서구구도(팔각진과 내부수까지 9개의 숫자합이 369를 이룬다. 팔각진의 내부에 3행3열의 마방진을 결합시킨 것.)
● 일반원리: 이는 각각 9개의 숫자합을 일치시키는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9개의 8각형 각각의 동일한 위치에 차례로 1부터 9까지 배열하고, 다음 번 자리 9군데에는 반대로 18부터 10까지를 위치시키는 식으로 숫자를 계속 써 나간다. 그름에서처럼 1-9, 10-18, 19-27 등으로 숫자를 써나가는 순서는 반드시 정수의 배열을 따를 필요 없이 홀수/짝수를 분리해 매겨가더라도 다음 번에 이를 보정해줄 수 있는 수를 써주면 총합이 맞아 떨어진다.
4. 팔각진 - 후책용구도, 팔진도, 기책용팔도
● 일반원리: 개별 8각형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좌에서 우로 한칸씩 건너뛰어 해당위치에 숫자를 매겨나간다. 줄이 바뀔 때는 한줄을 건너 뛴다. 이는 8각형의 한변에 해당하는 두 수가 서로 보수(첫수와 끝수)쌍이 되면서 8각형 사이에 있는 4각형을 구성하는 숫자의 합이 일정하게 배열하기 위함이다. 이 외에도 팔각진을 완성하는 더욱 간단한 방법이 여러가지 있으나 독자들의 탐구에 맡긴다.